김남진展(미광화랑)_20160423

강선학(미술평론)

김남진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읽혀지거나 지각되는 것은 화면의 거친 바탕과 기존 표상 기법의 경계에 서 있기다. 그리고 조금 뜬금없이 등장하는 장난감이다.
재질감이라고 하는 바탕의 텍스추어는 묘사 대상의 사실성을 돋보이게 하고 직접적인 현실감을 전해주는 촉감적인 만남이다. 우리의 시각은 대상과 적당한 거리를 가져야 대상이 제대로 보인다. 후각도 직접적인 특성이 강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촉각은 바로 그것의 존재감과 주체와의 만남을 현실적 직접성으로 경험하게 한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자체다. 그리고 환영이 가진 대상과의 거리를 촉감이 줄여준다.
소재로 등장하는 동화적인 상황과 그 상황과 무관한 듯 등장하는 장난감은 그 종류와 관계없이 제유적이거나 환유적 성격을 가진다. 김남진은 이번 작품전에서 잃어버린 것, 회상에서나 가능한 물건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런 일차적인 인상을 지나면 그곳에는 의외의 상황, 현실적인 자연스러움으로 연출된 장면들이, 독립된 화면이기보다 연속적인 이야기에서 어느 부분이 잘려 나온 단절된 공간과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본적이 없는 장면이다. 원본이 없는 복제의 화면이다. 이런 장치들은 그가 구현하고 있는 장면들을 현실과 시간을 중성화 하는 시뮬라크럼의 실현으로서 제시된다.

웹이미지

우리가 익히 아는 회화적 이미지들은 환상이지만 온전한 존재감을 준다. 그리고 자율적인 의미를 생성한다. 그래서 한편 한편이 하나의 독자적 자율성을 기반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김남진이 만든 재질감을 통과하는 이미지들은 어느 것 하나 온전한 형태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는 흐려져 있고, 세밀하게 보일 것 같은 묘사는 어느 곳에서 형성을 거부하고 바탕의 재질감 속으로 후퇴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때로는 바탕의 질감이 형상을 거부한다. 그래서 바탕 위의 이미지들이 완결을 거부하고 있다는 인상과 완결을 요구하지 않는 작가의 태도를 함께 보게 된다. 힘들게 구축한 바탕의 거친 재질감은 사실적인 것의 명백함을 스스로 잃어가게 하고 비사실적인 것이 드러나도록 한다. 때로 그 미완의 기법을 ‘절대적 표상 기법에 대한 저항’이라고도 적극적 의미로 생각해 본다. 그런 면에서 그의 화면은 무형적인 것에 형태를 부여하지만 유형적인 것의 형태를 말소하는 이중성의 장소가 되고 있다. 더구나 작품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소재들, 인물이든 소품이든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찾는다. 관조의 대상을 그는 소유하고 만지려 한다는 안타까움을 준다. 장난감이 던지는 촉감적 인상과 회상, 등장하는 여인들에 대한 애착에 가까운 소환의 이미지가 그렇다. 회상의 성격이 강한 장면들이 주된 형식인 셈이다.

소파에 앉은 신부의 모습은 방 전체를 다 차지할 정도로 넓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 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책장, 스탠드, 화병, 토끼인형, 벽지에 붙은 이런저런 그림들이 보인다. 그 방 안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앉은 여자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신부의 모습이다. 투명하고 화사한 웨딩드레스와 미완의 형상들로 드러나는 인형과 방안의 집기들은 그런 정황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탕의 질감에 의해 배경으로 묘사된 아이의 방과 그 속의 소재들은 형태나 색채가 희미하고 부정확하다. 기억이거나 추억 혹은 회상의 한 장면이 그러할 것이다. 영화 장면 같은 효과도 그런 인상을 더해 준다. 그러나 현실적인 실체로서 신부의 희고 화사한 웨딩드레스는 또렷하게 드러나지만 온몸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드레스의 주름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하지 않다. 바탕의 요철에 의해 색채도 형태도 그 정도에서 미결정의 형태, 미완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시간적 소급이 작품의 주제로 읽히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이기보다 환각에 가깝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회한이나 기억이나 추억이 현실화될 수 없는 우울증의 강박, 시간을 거슬러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대체된 충족으로 여겨진다.

앞의 작품이 장난감을 등장시켜 현실적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소급하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또 다른 작품에서는 무시간성의 특성을 보인다. 구슬을 보고 있는 여인상이 그것이다. 의자에 당당히 앉아 구슬을 들여다보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혹은 타인을 점술의 세계로 퇴각시킨다. 그 구슬은 미래나 과거를 보아낼 수 있는 점술세계의 표징이다. 점(占)을 통해서 그녀가 보아내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 밖의 것을 보는 것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미래의 자아를 알고자 하나 자아로서 주체를 포기하고 구슬에 의탁하는 것이다. 욕망을 이미지로 충족하려 하는 짓이다. 그의 몇몇 작품은 대체로 이런 장치와 연출의 변주로 시간을 소급해서 가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회상, 혹은 물건에 대한 애착을 통해 충족시키려는 페티시즘의 섹슈얼리티를 보아내게 한다.

한 소녀가 등을 보이며 <놀이>에 몰두한 소녀를 바라고보고 있다. 놀이에 몰두한 소녀는 작은 상자 속에서 구슬을 찾아내는 듯하다. 놀이와 무관하게 둥근 빛 무리가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놀이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등을 보인 소녀의 맞은편에 거울에 비친 듯 소녀가 배치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시선은 그 가운데서 구슬을 가지고 노는 소녀와 어울려 그녀들이 바라보는 것이 떠도는 빛 무리, 환상이자 환각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소녀와 놀이, 구슬,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는 없고 다른 것이 그것들을 대신한다. 거울에 비친 상은 현실을 전제하지만 현실의 실재가 아니며, 현실 아닌 것이 현실과 뒤섞여 주체의 시선을 교란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섞는 것은 장난감이고 구슬이고 시선이다. 어느 것이 현실의 시선인지 투사된 사물인지 애매하다.
네 명의 인물이 물속에서 유영하면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 한다. 화면 바깥,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손을 뻗고 있다. 둥근 구슬 같은 모양의 빛 무리들이 떠돌고 있는 사이로 현실은 증발된다. <놀이>에 이어 이런 빛 무리는 장난감 탑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소녀가 배치된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전면의 소녀는 허리띠를 여미고, 뒤쪽의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손에 구슬을 쥐고 있다. 화면 전체는 불확실한 형태감을 연출하고 있지만 부유하는 둥근 빛 무리들이 화면 중앙에 떠돌고 화면 경계에서 들어오는 조명이 탑과 아이들을 비춘다. 마치 장난감을 호출해내듯이 연출된 장면임을 일부러 드러나게 한 장치들이다.
이런 장치는 작가가 대상을 대하는 혹은 장면을 연출하는 의식의 기저, 장난감과 연출된 장면을 장악할 수없는 것에서 오는 심리적 강박, 혹은 우울증의 징후, 페티시즘의 일단을 읽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욕망의 이미지이자 욕망의 층위다.

언급한 작품들은 이번 작품전을 일관되게 이끄는 태도를 잘 드러낸다. 몇 점 더 살펴본다.
<도로시>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소녀의 이름을 딴 작품이다. 동화나 TV 드라마로,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된 기존하는 이야기의 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오리를 안고 있는 이 소녀는 그 순간 원작과 다른 재해석의 이해로 들어서게 한다.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꽃들은 사람의 키만큼 크고, 집들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줄에 매달려 머리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소재로 선택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환상과 비현실적인 이미지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로 상징과 은유, 자동기술적 연상 등의 복잡한 층위들을 기법을 삼고 있어 다양한 해석으로 유명한 동화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원본을 가진다. 그러나 ‘도로시’라는 이름 뿐, 그 원본이 분명하지 않다.
호른을 부는 화관 쓴 소녀의 등장 역시 그를 둘러싸고 있는 나비들의 연출로 특정한 비현실성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기존의 환상성에 다른 환상을 접목하는 이 이중성은 앞의 작품들과 같은 은유적 계열로 보인다.
풀과 나무가 무성한 습지의 풀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 <평원>은 그녀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어떤 사전적 정황이나 당위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어떤 이야기를 서술하는 연속성에서 한 장면을 잘라낸 듯한 그런 장면이다. 현실 정합성이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주위에 장난감 곰 인형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곰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니다. 과거로 소급된 어느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이 분명하다. 밝은 불빛을 내는 램프가 그 옆에 배치되어 있고, 그 빛 때문인지 인물은 음영이 분명하게 묘사되어 보인다. 저녁 무렵의 물가의 풀밭을 배경으로 풍경이 펼쳐지지만 풍경과 무관하게 이 장면은 어느 순간부터 현실로부터 벗어나버린다.
강가 모래에 묻혀 발목이 드러나지 않은 소녀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 앞에 오리 한 마리가 마주 서 있고, 뒤로는 연못이거나 개울로 보이는 물길이 드러나고 숲이 이어진다. 때로 숲이 배경으로 펼쳐지고 그 앞에 물가가 드러나고 그곳을 뒤로 두고 옆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여자도 있다.
역시 여자가 등장하지만 팬티만 입고 일광욕을 하거나, 산책을 나온 듯 유유자적하거나 급한 걸음으로 앞으로 다가오는 여자도 등장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선들이 마치 리본체조의 리본처럼 인물 주위를 감싸 돌고 있다. 그것은 그저 빛, 혹은 선이지만 소재의 정황이나 현실감과 무관한 장치다. 도리어 인물들이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면의 모든 것이 미결정의 시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긴 테이블의 좁은 쪽으로 팔을 올리고 의자 위에 앉은 여자가 있다. 연못이나 물가의 느낌을 주는 개울이 그 뒤로 배치되고 숲이 펼쳐진다. 어느 작품보다 현장의 실재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테이블 아래로 장난감 개구리 한 마리가 등장한다. 현실은 한 순간에 애매해진다.
신디 셔먼의 컬러 사진 <무제>, 시골길에서 차를 기다리는 한 여인을 연출한 영화 스틸 사진을 흑백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신디 셔먼이 현실과 비현실, 작가와 모델의 경계를 사진화한다면 그는 사진이라는 현실을 비현실화 하고 다시 현실로 전환하여 현실이 단순한 현실 아님을 보이려 한다. 신디 셔먼이 일상의 무료한 장면 연출을 통해 우울한 권태와 무의미한 순간을 제시하면서 “모조가 실재를 대치한 미디어 사회의 은유로 남성적 시선을 좌절시키는데, 그는 예의 엉뚱하게 기린 장난감 하나를 덧붙임으로 가질 수 없는 욕망을 읽게 하는 기지를 보이며 원작과 복제의 경계에 서게 한다.

출품한 몇 몇 작품에서 일견되듯이 그의 작업이 연출된 장면임을 여러 가지 경로로 드러낸다. 연출이라고 말한 것은 그 장면들이 어디선가 본 듯한 재연의 친밀함을 준다는 뜻이다. 도로시도 그렇고 신디 셔먼도 그렇다. 테이블에 앉은 여자의 모습에서 에드워드 호퍼를 연상하거나 신부의 방에서 프라다 칼로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다른 장면들도 일일이 비슷한 장면을 들먹일 수 있을 것 같이 익숙하다. 그렇다고 그것들에 원본이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도리어 그것들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를 원본으로 삼았다고 하는 것이 옳다. 말하자면 원본 없는 복제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첨예한 동시대적인 미술현상과 연루되며 탁월한 묘사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주는 어눌함의 일단이 어디에 연유하는 지도 엿보게 된다. 그의 화면이 구체적 현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연출된 장면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장난감 곰과 인형, 장난감 집과 흔들의자처럼 만든 개, 꼬리에 새가 앉은 장난감 돼지 위에 앉은 여자 아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묘사와 해체, 현실과 비현실, 바탕과 이미지, 현재와 시간적 소급의 차이가 애매하게 혼성된 지대이다. 그것은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소멸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김남진은 잃어버린 물건(장난감 혹은 연출된 장면)을 통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인다. 역으로 그것들을 소환하는 것으로 자신의 작품을 구성한다. 장난감을 소재로 등장시키거나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연출은 현실을 증명하고 그에 대응하기보다 현실로부터 적당한 거리로 자신을 옮겨놓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가 견딜 수 없어 자신의 상처나 그리움 혹은 욕망을 기억의 어떤 사실로 대치하거나 어린 아이의 정황을 통해, 타자의 시선으로 전환시키는 퇴행에 가깝다. 그리고 장난감으로, 혹은 영화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함으로 자신은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관조의 대상을 소유하고 만지려 한다. 그러나 그의 욕망은 아이의 세계로, 장난감의 세계로, 이야기 속의 한 장면으로 빠져 달아나고 만다. 아니 애초부터 현실의 정합성, 완결성을 부정하는 바탕을 만들면서 이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에게서 아이들의 장난감에 대한 소환은 기억이거나 추억, 회상의 탈을 쓴 의식의 퇴행에 다르지 않으며 사랑하는 대상의 사라짐에 대한 거부의 심리적 대체이자 욕망이다. 그 욕망은 이제 영상으로,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바탕의 질감에 의해 와해되거나 불확실한 어떤 것으로 환각이 되고 만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짐에 대한 거부반응이 “어느 시점에서 주체가 현실을 거부하고 욕망의 환각성 고정관념을 통해 잃어버린 물건에만 매달리는 단계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욕망을 증명하고 욕망은 이미지에 꼭 어울리는 것으로 드러난다. 회상의 이미지에 집착하거나 새로운 이미지의 탐색에 탐닉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다. 우울증은 욕망의 기호 아래 놓여 있는 잠재태다. 그의 작업 안에 우리 시대의 우울증이 잠복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은유로밖에 드러낼 수 없지만 현실을 보아내는 우울증이야말로 현실을 증명하는 기제이다. 그리고 이미지야말로 작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 우울증은 작가 개인의 심리적 상태로 파악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시뮬라크럼 문화의 말소된 기억의 소환이라면.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작업이 가진 잠재를 다 이야기하기에는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물과 여자, 그리고 장난감, 숲의 병치는 이질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소재와 정황인데 어느 순간 현실을 부정하고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장난감이란 화면 속의 인물이 혹은 작가가 아끼는 것이고 그 아끼는 것의 소멸이 가져오는 애착은 환상을 불러낸다. 일종의 퇴행적 의식의 일단을 보이는 기제다. 최대한의 비현실을 움켜쥐고 최대한의 현실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고, 집요하게 편집증적인 우울함에 의해 펼쳐지는 공간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에서 읽게 되는 우울은 그것이 개인적인 의식의 일단인지 시대의 우울인지 섬세하게 읽어야 할 부분이 없지 않다.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의식 층위로 눈여겨 봐야할 부분이지만 여전히 애매하다. 현실감의 강조를 위해 구축된 재질감이 도리어 현실형상을 말소시키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작품에서 목격되는 장난감, 오리, 소녀, 구슬 등은 페티시즘의 혐의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작품 전체를 하나의 메타포로 옮겨가게 한다. “메타포는 한 가지를 다른 것과 교체하지만 그것은 후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전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다. 메타포가 원래 명명될 수 없는 대상을 부르기 위해 고안된 대체적 표현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메타포와 페티시즘의 연관성은 환유의 경우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해진다.”

김남진의 작품을 이리저리 뜯어보다 욕망의 환각적 충족을 포기하고 현실증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욕망이란 장난감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시간에의 집착과 소재로 선택한 동화적 상황, 타인의 작품을 인용하여 재해석하는 작업들에서 시뮬라크럼의 특징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를 묻는 것이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회상/재연하듯 한 연출 장면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이 된 우리의 일상을 다시 소비하는 것일 뿐이다. “시뮬라크럼의 문화는 사용가치가 말소된 기억을 간단히 교환가치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회에서의 삶이 되었고, 기 드보르가 주시했던 것처럼, 그러한 사회에서 ‘이미지는 물화’된 상품의 최종적인 형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눈을 만족시키는 형상들을 체험하기보다 심리적 층위를 보게 된다. 현실과 시간을 중성화하는 시뮬라크럼의 체험도 이런 하나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심리적 현상이나 그 결과로 볼 것은 아니다. 더구나 포스터모더니즘 기법에 탐닉했다거나 그곳에 정서를 기대고 있다고 단정하기도 쉽지 않다. 다양한 기법은 작품의 층위이자 작가의 심리적 층위이며 우리 시대를 읽어내는 시선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든 은유를 넘어서 기호가 순수한 대상으로 되는 것에 연결된 극단적 물신숭배의 세계가 우리에게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면, 원본 없는 복제의 이미지가 주는 욕망의 환각적 충족보다 현실증명을 선택하라는 요청의 까닭이 거기 있다.//강선학//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6. 4. 23 –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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