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가자展(갤러리 두)_20160712

//공란희//

사람은 흙으로 빚어졌다고 한다. 흙에선 생명들이 난다. 생명들은 숲이 된다.
흙은 형태를 만들기 전의 순수한 질료이다. 흙이 사람이 되고 숲을 내기 위해선 그 중간 단계에 무언가 개입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 신, 우주라고들 한다.

우리의 내부에는 분명 그 창조의 무언가, 질료를 형상 그 이상으로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다. 모래와 색을 가지고 나 자신의 숲을 만들어내면서 나는 그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내게 위안과 쉼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그저 흙더미가 아님을, 그저 현실과 이상의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으며 하릴 없이 사라져갈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임을 느꼈던 것이다.

고로 우리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숲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겐 우주의 끝없는 공허를 넘어서 존재하지 않던 의미를 되찾아내는 아주 뜻 깊은 순간인 것이다.

나에게 흙을 이용한 창조는 그런 의미다. 존재 자체에서 오는 공허에서의 해방은 우리가 흙에서 왔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흙을 넘어 생명의 숲을 이루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 낼 때 가능한 것이다.

내 작품을 보고 느끼는 이들에게 그 실낱같은 창조의 빛이 위로와 해방으로 다가오길.//공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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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택수//

나는 2010년 무더운 7월의 끝자락에서 어느 소녀의 죽음의 희생으로 인해 새 삶을 부여 받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새 신장을 이식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계셔서 내게 새 삶을 부여 하셨다면, 그것은 무엇 인가 뜻이 있으리라 생각 하였고, 그것은 남은 시간 하늘에서 준 재능을 썩히지 말고, 작가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란 뜻이라고 생각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예술가라는 보기 좋은 허울 속에 얼마나 현실에 안주하며 그 옛날 순수를 잊어버리고, 팔기위해 급급한 작업만 했나 돌이켜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수년전 제작한바 있는 반딧불 그림을 다시 꺼내들게 되었다. 물론 상당히 심화된 상태로 표현 하였으며 나만의 표현법을 쓰고자 노력 하였고, 이전 작업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많은 시간을 투자 하였다.
이런 나의 노력에 결과로 그토록 갈망하던 나만의 작품을 찾게 되었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그의20여년 만에 나만의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내게 있어 반딧불은 그냥 단순한 풀벌레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철학이요 세상을 밝히는 꿈이며 희망인 것이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그리 두려움만의 존재는 아니다.
다만 그 앞에 해야 할 일을 다 못한 채 빛을 소멸하는 불빛 이 되기가 싫은 것이다.
본 작가는 그림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반딧불로 존재 하고 싶다.
우리 아이에겐 늘 변함없는 희망이며 나 자신에겐 늘 첨과 같은 순수의 불빛으로 남아 있고 싶다.
반딧불은 흔히 도깨비불 이라고도 불린다.
적막한 밤의 숲속에 천적의 두려움 없이 맘껏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신비스러움의 결정체, 우리내 인생과 닮은꼴 이라 할 수 있다.
본 작가 또한 정막 하고 험난하기만 한 이 세상에 한줄기의 반딧불과 같은 소박한 빛이 되고 싶다. 아침이 되면 소멸하는 작은 꿈일지라도 …//남택수//

//윤형호//

유년은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이해타산적인 세상사에 물들지 않은 순수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년에 대한 추억은 번잡한 세상살이에서 잠시나마 심신을 정화하고 치유하는 영약일 수도 있다. 세속적인 욕망이 없는 천진무구한 유년이야말로 인간 삶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세계와 다를 바 없기에 그렇다. 적지 않은 화가들이 유년시절의 추억을 그림의 제재로 채택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윤형호의 작품은 다름 아닌 유년시절을 제재로 한다. 바닷가를 놀이터로 삼는 꿈같은 유년시절의 추억이 화면에 되살아나고 있다. 기와지붕이 줄을 잇는 골목길이며 바닷가의 바위에서 뛰어놀던 장면들이 꿈처럼 펼쳐진다. 그런가 하면 굵은 빗줄기가 사선을 그리는 비오는 날 처마 밑에 서 있는 노란색 비옷을 입은 아이와 형형색색의 우산이 골목길을 메우는 부감구도의 풍경도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기와지붕 위로 바깥을 기웃대는 복사꽃이 있고 느티나무 고목 아래 술래잡기 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슬러브 지붕 위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남녀도 보인다. 최근 작품 가운데는 땅에 떨어진 동백꽃으로 가득한 화면에 노란 비옷을 입고 서 있는 서정적인 장면도 있다. 이처럼 열거하고 보니 그의 작업은 온통 유소년시절의 에피소드로 채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재 및 제재가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은 확실히 밝고 화사한 현실적인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색채이미지에서 현실과는 다른 회고적이고 복고적인 향수에 젖어들게 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재료와도 무관하지 않다. 발색이 억제되는 오일 파스텔을 사용한 결과이다. 오일 파스텔은 기름 성분을 가졌기에 점착력이 높은, 분필과 유사한 재질의 파스텔과는 다른 재료적인 특징이 있다. 분필 형태의 파스텔은 점착력이 약하기에 질감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이에 반해 오일 파스텔은 유채와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물감의 질감을 강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파스텔의 가볍고 밝은 성향의 색채이미지와는 다른 중후한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분위기의 그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가능하면 밝고 아름다운 색채이미지를 지향하는 최근의 화단 경향과도 다르다. 설령 유소년 시절을 내용으로 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의 경우일지라도 대체적으로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다.
어쩌면 중후한 느낌의 색채감각은 그 자신의 말처럼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밝고 화사한 색깔을 선호하는 디지털 시대의 현대적인 색채감각과 다른 중후한 색채이미지는 이에 연유한다. 소재 및 정서를 자신이 체험한 유소년 시절로 설정함으로써 설득력이 강하다. 그의 경우와 같은 정서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지향하는 조형세계에 대한 감정이입이 한결 쉬우리라 생각된다.
그림세계는 여전히 현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현실을 빙자한다지만 실제로는 회화적인 이상이라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결코 어둡다거나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림으로서의 유소년 시절의 추억은 서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마치 꿈속의 어느 장면과 같은 환상에 빠져들게 한다.
이렇듯이 그의 작품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매개로 하면서도 그 시절의 꿈과 사랑과 희망 그리고 행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서정적인 이미지만으로 치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물들지 않은 순수하고 순연한 어린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감상자로 하여금 번잡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리라.
이들 작품은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했을지언정 과다한 욕심이 없는 삶이었기에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는 평온했었다. 다시 말해 작은 기쁨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소박한 삶이었다. 색채이미지가 무거워 보이는데도 결코 슬프거나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그 안에 담긴 희망의 메지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다름 아닌 세상에 대한 희망이자 삶에 대한 긍정이다.
눈부신 전자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자연 또는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그리워하게 된다. 몸은 현대적인 생활환경에 적응하면서도 마음은 자연으로 향하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적인 순수성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적인 가치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은 이와 같은 현대인의 삶에 던져지는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와 다름없다.
동백꽃을 소재로 하는 최근의 작업에서는 서술적인 이미지를 생략하거나 줄임으로써 함축적인 화면구조를 통해 시적인 긴장감을 불러들인다. 많은 이야기를 간결한 이미지와 단출한 구성으로 압축하여 시각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아름다운 서정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신항섭(미술평론가)//

//장시울//

공명(共鳴), 맞울림.
나의 작품은 ‘공명’에서 시작되었다. 그 고요한 폭풍이 내 영혼을 뒤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이국의 도시, 회색 빌딩 숲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콘크리트 틈바구니가 나의 공간이었다. 일상은 집요하게 반복되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나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영혼은 바스러질 듯 말라갔다. 그때,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숲을 만났다. 그 만남은 가슴 뭉클한 감동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경험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치유했고,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이 경험이 나를 캔버스 앞으로 이끌었다.
고대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os)에 의하면 미적 경험은 영혼과 대상이라는 두 존재자 사이에 공명이 있어야 가능하고, 공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동질성이 있어야 한다. 플로티노스는 그 동질성을 ‘신(神)적인 로고스(logos)’에서 찾았다. 숲과 내가 공유하는 ‘신적인 로고스’는 아마도 ‘생명’일 것이다. 숲의 생명력이 내 안의 생명력을 공명시킨 것이다.
내가 숲과 공명할 수 있었듯,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서로 공명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력을 가진 작품 역시 공명의 힘이 있다. 내가 숲과 공명했듯, 나의 작품이 타인과 공명하기를 바란다.

선(線), 점과 점의 이어짐.
선은 나의 유일한 도구이다. 하지만 선은 나의 명령에 복종하기보다는 자기의 의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선에서 살아 펄떡거리는 생명력을 본다.
선은 점에서 시작한다. 점은 태어남이다. 캔버스 위에 찍힌 하나의 점은 무에서 유로의 전환이고, 우주의 시작이며, 생명 탄생의 은유이다. 선은 점의 삶이다. 점의 태어남과 생애와 죽음이 선 안에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선을 볼 때 하나의 생명을 본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이우환의 선을 보라. 이우환의 선은 그 자체로 생명체다. 캔버스의 귀퉁이에서 점으로 태어난 선은 점점 옅어져 가면서도 기어코 삶의 궤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나는 선에 생명력을 담고 싶지만, 나의 선이 단지 생명을 은유하기 위한 기호로 고정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들을 모두 관계망 위에 놓는다.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점과 점의 관계가 하나의 선이 되듯이, 나의 선들은 다른 선들과 관계를 맺는다. 나는 선들의 관계가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내게 함으로써 하나의 기호로 박제되는 것을 거부한다.

중첩(重疊), 거듭 겹침.
중첩은 내 작품의 기본 형식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존재의 존재형식이기도 하다. 원자는 소립자들의 겹침이며, 분자는 원자의 겹침이다. 생물은 세포들의 중첩이고, 삶은 하루와 하루, 순간과 순간의 중첩이다.
김홍주의 회화는 꽃이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사실은 거대한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필은 하나의 화소이면서 하나의 세포가 되어 거대한 꽃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그래서 김홍주 회화의 실재성은 정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중첩에서 온다.
나의 작품 또한 무수한 세필의 중첩이다. 하지만 수많은 화소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는 실재의 이미지와는 어긋난다. 작품의 이미지는 나무를 닮은 듯하지만, 나무는 아니다. 작품은 나무의 생명력을 모방했기에, 나무의 솟아오르는 의지와 무수히 가지치고 뻗어나가려는 성질을 닮았을 뿐이다.
관계(關係), 서로 다른 존재 사이의 이어짐.
각 작품들은 선과 중첩을 넘어서 다양한 관계의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색과 색의 만남, 이미지와 이미지의 만남, 재료와 재료의 새로운 만남은 관계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여기서 만남은 때로 긴장과 대결로, 때로 소통과 동화로 이어진다.
검은 바탕과 밝게 빛나는 나무 이미지는 팽팽한 대결의 관계를 보여준다. 반면 흰 바탕에 희미한 색조의 나무 이미지는 동화의 관계를 보여준다. 나무 이미지 위의 달 이미지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듯 보이고,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감은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나무와 수평으로 날아가는 종이비행기는 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화면 위에 붙은 순금은 대결과 소통의 관계를 모두 내포한다. 평면과 입체라는 공간적 이질감, 물감과 금속이라는 재료의 이질감은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무 주위를 포근하게 감싼 구성으로 인해 이질적인 것 사이에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유리구슬 연작에서 숲 이미지와 유리를 함께 묶어서 보면 아침이슬처럼 친근하게 보이지만, 화면 속 이미지와 떼어내서 보면 캔버스 위에 쏟아진 물방울처럼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이처럼 다양한 재료와 이미지의 사용은 단순한 변주에 그치지 않고 보다 깊이 있는 관계의 탐구로 이어지고 작품과 세계의 접점을 넓힌다.

물아양망(物我兩忘), 대상과 나를 모두 잊음.
나의 작품에 메시지는 없다. 표현된 대상은 실재하지 않으며, 작품의 이미지는 무언가의 기호나 상징이 아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다. 물론 작품도 아니고, 감상자 역시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창작의 ‘순간’이다. 그것의 결과로 작품이 남을 뿐이며, 작가 역시 창작의 매개일 뿐이다.
중국 문인화에서 ‘물아양망’은 작가로서의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일체된, 주객의 이원구조가 소멸되는 최고의 경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작품은 ‘일체’라는 사건의 부산물일 뿐이다.
나는 나의 작품이 감상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상자가 한 두 걸음 거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유심히 작품을 바라보며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애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여행 중 숲의 생명력과 공명을 일으켰듯이, 창작의 과정에서 작품과 하나가 되었듯이, 나의 작품과 감상자가 하나로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의자> 연작은 이러한 바람에서 기획되었다. 의자는 신체와 맞닿는 가구이다. 우선 작품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작품과 감상자의 물리적인 거리를 없애줄 것이다. 의자에 앉을 때, 의자와 사람은 비로소 한 몸이 되고, ‘쉼’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내 작품을 마주한 사람이 해석의 시도를 내려놓고 그저 ‘쉼’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장시울//

– 장소 : 갤러리 두
– 일시 : 2016. 7. 12 –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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