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자展(갤러리 인디프레스)_20161021

김소라

작품을 보고 그 감상을 글로 옮기는 것에 늘 한계를 느낀다. 이정자작가의 작품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단순히 작품이 매우 감성적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감성의 색이 다양하여 그것들을 다 포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한 획, 한 터치가 함축적이라 그것을 건조하고 밀도없는 개념으로 담아내기에 너무 부족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정자작가의 작품 앞에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보다는 작품이 주는 감동에 그저 흠뻑 젖어 있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중국에 유학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들로부터 그간 선보였던 매화그림들, 그리고 이번에 처음 공개하는 인체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전반적인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특히 처음으로 공개되는 인체드로잉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 작가는 지난 2013년부터 인체 드로잉을 꾸준하게 해왔다고 한다.
황토를 개어 바른 3겹한지 위에서 작가의 손은 매우 스스럼없고 흔쾌하게 움직인 듯하다. 일필휘지의 집중과 강단도 있다. 정동이 함께 있다고 할까…
선들은 종이에 발린 황토의 섬세한 흔적에 반응하면서 전체적으로 담백한 모습의 인체를 그려낸다. 절제의 미와 자유로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한 특징은 이정자작가의 매화그림들이 주는 느낌과 닮았다. 마음 한켠을 휘돌아 나가는 서늘하고 슬픈 바람, 혹은 마음의 중심에서 일렁이는 잔잔한 설레임과 생동감.. 이러한 감정들의 기저를 이 드로잉 작업들에서도 본다.//김소라//

//평론//

‘그리는’ 물질에서 ‘치는’ 정신으로

김동화

노염(老炎)이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어느 저녁나절에 어느 화랑 주인 한 명과 함께 달맞이 언덕에 있는 작가의 화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곳 작업실 한 쪽에 놓인 책꽂이와 책상 위로 동양 고전들 여러 권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팔대산인(八大山人)의 화집 한 권과 논어(論語), 장자(莊子)를 필사한 노트 한 권이 책상 중앙에 반듯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이 문기어린 화실의 정경에서 작가가 표현해 내고자 하는 구극(究極)과 내밀한 작가의 속내 한 자락을 흘긋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최근 작업은 ‘그리는’ 물질을 가지고 ‘치는’ 정신의 세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욕망과 맞물려 있는 듯 보였으며, 일견 반듯하고 단정해 보이나, 사이사이로 단사(丹砂)빛 농염한 흥취가 살짝 배인 그녀의 회화는 아래로 또 아래로 차츰차츰 고요히 침잠해 들어가는 향긋한 일기(逸氣)를 그 화심(花心)에 품고 있었다. 또한 서양적 재료로 ‘그리는’ 행위와 동양적 화법의 ‘치는’ 행위 사이에서 서로 엇갈리지만 다시 서로 상관하는, 일종의 변주로서의 회화를 지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는’ 세계는 지지체(캔버스) 위에 매체(물감)를 쌓아올려 매체와 지지체 사이, 매체와 매체 사이를 각각 차폐함으로서 불투성(不透性)을 확보하는 것을 작화의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층층적적(層層積積)하는 반복성의 원리가 그 기저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는 인과적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논리적 작법이기도 하다. 반면 ‘치는’ 세계는 지지체(종이)와 매체(먹)가 스밈과 번짐을 통해 일체가 되는 세계로, 선염을 통해 드러나는 농담과 종이와 먹이라는 두 재료의 합일에서 오는 운치와 그윽함을 작화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패를 불문하고 한 번에 끝내버리는 일회성의 원리가 그 기저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일획의 우연성에 기초한 직관적 작법은 석도(石濤)가 이른, 일획을 긋는 것이 만획의 근본이자 만상의 근원이 된다는, 일획지법(一劃之法)의 화론에 다름 아니다.

매화를 그린 작업들에서 색채로 겹겹이 쌓아올린,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두꺼운 유채의 바닥은 수묵화에서의 종이 바탕에 상응할 것이고, 그 위로 밀어붙이듯 쳐낸 일획의 필세는 수묵화에서의 먹의 궤적과 비백에 상응할 것이다. 과연 여기에서 작가는 운치의 문제, 즉 용필에 의한 비백이나 꺾임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먹의 삐침, 은은하게 흐르는 먹의 번짐을 통해 드러나는 높은 격조와 고아의 경지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재제로서의 화면 속 매화는 청고한 정신의 체현(體現)이므로, 그것은 단순한 소재적 취택이 아닌 주체의 정신이 투사된 대상물이다. 즉, 그것은 대상의 형태를 취했지만 사실은 주체 자신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망설임 없이 한 붓으로 ‘치는’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정자의 회화)의 표면은 주체(이정자)가 세계를 바라보고 ‘그리는’ 풍경처럼 드러난다. 바탕과 대상을 묘사한 색의 다채로움은 외상(外相)이 정신의 프리즘으로 걸러지기 이전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빨주노초파남보 칠색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가시광선이 합해 흰빛이 되기 전의, 바로 그 분광된 칠색 무지개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그녀의 화면 속에 엄존하고 있다. 즉 사물이 정신화하기 이전의 풍경, 정신의 이름을 입고 있으므로 정신의 표상이되, 정신 이전의, 정신으로 추상화하기 이전의 생생한 세계로서의 대상을 열어 보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난만한 욕망이 거기에 내재한다. 바로 그 때문에, 생생함의 희석이나 정신화의 과정을 통해 원래보다 더 선명하게 표출될 수 있었던 (동양적) 운치의 세계가 일부 손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단(仁義禮智)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드러나는 정(情)의 세계보다는 칠정(喜怒哀樂愛惡慾)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드러나는 정의 세계, 이승(理乘)의 세계보다는 기발(氣發)의 세계에 더 근사(近似)하다. 이정자의 회화는 진공(眞空)을 통해 묘유(妙有)를 생하기보다는, 묘유를 통해 진공의 그림자를 보게 하는 그림이다. 거칠고 투박한 매화등걸이라는 유현의 세계에서 놀랍게 피어오르는 새하얀 매화가 드러내는 빛의 세계, 이 그림자와 빛, 어두움과 밝음의 세계를 노자(老子)는 ‘지기백(知其白) 수기흑(守其黑) 위천하식(爲天下式)’이라는 한 구절로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것은 무극(無極)으로 돌아가는, 텅 비어 충만한 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예술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강력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이 진공묘유의 철리 속에서 그림을 보는 관객들은 대영약충(大盈若沖)의 현현(玄玄)한 세계와 얼핏 스치게 되는 것이다.
색채와 바탕의 세계가 같을 수는 없기에, 작가의 화면에서 색이 표상하는 조형 지향성이 바탕이 표상하는 여운의 지향보다 승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 때 조형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달래를 그린 그림과 매화를 그린 그림은 서로 많이 다르다. 진달래를 그린 그림은 바탕을 처리할 때 색채나 마티에르에서 훨씬 더 다양한 변이의 요소들을 가지며, 그 위에 펼쳐진 꽃의 처리 역시 – 위를 향하거나, 아래를 향하거나, 활짝 피거나, 채 만개하지 않았거나, 꽃술의 모양이 조금씩 서로 다르다거나 하는 등의 – 많은 내용적, 형태적 변주를 포함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으며, 유채 안료의 물성에 대한 강조 역시 한층 더 뚜렷하다. 그에 비해 매화의 경우는 바탕의 처리에 있어서도 비교적 모노톤의 느낌에, 형태에 있어서도 비교적 변화가 뚜렷하지 않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매화는 동양적 서정과 정신성을 드러내는데 적합한 소재이기에, 작가가 이를 관심하고 취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양화에서 먹이 주는 번짐과 비백의 효과가 이러한 속성들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측면이 있었던 반면, 서양화의 기름이 가지는 불투과적 특질은 이러한 여운의 오묘함을 드러내기에는 본질적인 제한점을 가진다. 작가는 이를 마르지 않은 바탕 위에서 속필이 내는 효과를 통해 극복해보려 했으나, 바탕과 형태의 평이함과 단조로움이 여백과 대상이 부딪히면서 환기되는 긴장감을 유발시키는데서 일부 난점을 드러낸다. 이는 어찌 보면 물질을 정신화 하는 과정 그 자체의 지난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달래를 그린 그림에서는 여백으로 표현되는 무형의 대기와 존재로 드러나는 유형의 꽃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고 있는데, 작가는 이 비가시적 가동태 – 대기 – 와 가시적 정지태 – 꽃들 – 가 부딪히는 결정적 순간을 무르녹은 한 방의 필세를 통해 흥취의 기분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이에 반해, 매화를 그린 그림에서는 대기감의 탈각이나 꽃들이 가지는 형상 요소들의 단순화 및 축약을 통한 대상의 관념화가 두드러지면서, 인간적, 현상적 정취보다는 규범적, 당위적 지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 보아 진달래는 파토스(pathos)와 피시스(physis)의 세계를, 매화는 로고스(logos)와 노모스(nomos)의 세계를 각각 표상한다. 작가의 눈길은 매화로 예표되는 맑고 높은 고절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으나, 작가의 손길은 진달래로 상징되는 예민하고 섬세한 아취의 언저리를 더듬고 있다.//김동화//

– 장소 : 갤러리 인디프레스(부산)
– 일시 : 2016. 10. 21 –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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