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윤展(피카소화랑)_20170622

구성적 바이탈리티와 색채적 바이탈리티의 조화,
그리고 골계미와 우아미의 어우러짐에 관하여

김동화(金東華)

필자는 금년(2014)에 일광해수욕장 바로 옆에 위치한 화가의 작업실을 두 차례(5.31, 6.22)에 걸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그의 그림이 지닌 해양적 풍토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늦봄과 초여름의 바다 풍경이 작업실 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기에, 그 기억의 편린이 아련한 잔상처럼 아직껏도 나의 뇌리에는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화가와의 첫 번 대면은 해운대의 어느 작은 화랑에서였다. 나는 전혀 예기치 않게 거기서 화가가 다른 작가의 그림을 사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 자신 그림을 그리는 화가임에도, 그는 가끔 다른 작가들의 좋은 그림이 보이면 그것을 흔쾌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수집가적 기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나는 그러한 화가의 모습에서, 그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읽어 볼 수 있었고,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깊은 마음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구수하면서도 텁텁한 화가의 체질과 넉넉한 편안함이 찰나의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주 직감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일광 작업실에는 상당히 많은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생활의 현장과 그 무대를 마음껏 주름잡고 있는 인간들이 어우러진 세계상(世界相)을 담고 있는 그의 화면은 마치 한 인간, 한 인간을 개별 블록으로 하는 다양한 표정의 커다란 퍼즐과도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가장 도드라진 요소를 짚어본다면, 그것은 해양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체적 분위기로서의 해학과 골계의 미감이었다. 화면 전체의 절반 이상을 꽉 채워버린, 마치 와락- 하고 캔버스 밖으로 쫘-악 밀려서 쏟아져 버릴 것만 같은 왁자지껄한 물고기 떼들과 그 배경으로서의 광막한 바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이 서로 엉기면서 강렬한 생동감을 발산하는 화면을 구성해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뜨거운 열기 같은 파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각각의 개별 요소들과 개체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건강하고 싱싱한 생기로서의 세계야말로 쉽게 표현해 내기 어려운, 화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도 놀라운 장점이었다.

마치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다시 면이 모여 입체가 되는 그런 양상이라고나 할까? 개개의 사람이나 바다 풍경이나 물고기만으로는 표현되기 어려운, 군집감에 의해 묘하게 발휘되는 감성의 에너지 덩어리가 화면 속에서 떠들썩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수한 인간적 면모에서 흘러나오는 해학적 감흥이나 세상을 향해 휙- 하고 던져보는 익살스런 호기심의 시선은 그것이 인간의 표정이 되었든, 물고기의 표정이 되었든, 여타 동물의 표정이 되었든, 어디에서건 충만하게 그 촉수를 화면 위로 뻗쳐 내고 있었다. 어느 면에서도 천진하고 약간은 과장된 듯한 화면 속의 나이브한 양상들은 과감한 느낌을 통해 시각적 임팩트를 강력하게 발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화면 속에서 회화로서의 구성적 바이탈리티(vitality)를 극적으로 성취해내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중대한 요소가 남아 있었다. 필자의 생각에, 그것은 바로 색채적 바이탈리티의 문제였다.

그는 생생한 원색에서 명도와 채도를 다운(down)시킨 조색(調色, mixing colors)을 주로 구사하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사실 이렇게 색조를 다루어내는 수완이야말로 회화적으로 일리가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는 퇴색한 듯, 바랜 듯 보이도록 만드는 슬라이트(slight)한 페이드아웃(fade out)의 느낌이 회화적 고급함을 만들어 내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내의 요소들을 다루는 경우와는 달리, 광선에 노출된 야외의 풍광들을 다루어 내는 경우, 특히 부산의 바다와 같은 해양성의 대기를 다룰 때에는, 과연 어떠한 조색이 바이탈리티를 증폭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즉, 필자로서는 색채의 바이탈리티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재 화가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회화적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싱싱한 색채를 통해 투명한 대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이 그의 화면에서 지금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점을 필자는 새삼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또 다른 하나의 미학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화가는 현재 골계미(滑稽美)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있음에도, 이 한 가지 차원만을 가지고서는 전체적인 모습으로서의 예술적 성취와 완결성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항상 좋은 예술은 한 가지 차원이 아닌, 모순된 두 가지 요소들의 기묘한 결합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해결해 나가야 할 나머지 한 가지의 차원은 바로 우아미(優雅美)의 문제이다. 예컨대, 좋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해 내어야만 한다. 그 중 한 가지는 태토의 질과 유약의 발색이다. 이것은 내질(內質)의 문제와 연관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청화나 진사 등의 발색으로 문양(文樣)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의 작업에서의 골계미는 내질의 문제에 더 가깝고, 우아미는 문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에는 ‘공자 가라사대, 질(質, 내면적 바탕)이 문(文, 외표적 교양)보다 승하면 조야[野]해지고 문이 질보다 승하면 겉만 화려[史]해진다. 문과 질이 고루 어울린 연후라야 비로소 군자인 것이다(子曰 質勝文則野요 文勝質則史니 文質彬彬然後君子)’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내용은 사(史)와 야(野)가 균형 있게 조화된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상태, 즉 외양의 세련(洗練)됨과 바탕의 질소(質素)함이 고루 조화된 멋이 드러나야 비로소 그것이 완성된 인간이며 완벽한 예술이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이 입론(立論)을 그의 작업에 다시 대입해 본다면, 화가는 내질적 질박[質, 野]의 문제를 구성적 바이탈리티를 통해 해결해 내고 있으나, 외현적 세련[文, 史]의 문제를 색채적 바이탈리티로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그것은 인간 내면의 수수함과 골계를 다룸은 물론, 인간 외양의 차롬함과 우아를 함께 생각해 내어야 한다는 뜻이며, 이 두 가지를 동시적으로 성취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색채를 처리할 때, 주로 저명도(低明度)와 저채도(低彩度)를 구사하게 된 이유가 아주 짚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화가는, 골계의 차원이, 일급 레스토랑의 테이블 위에 잘 세팅되어 차려진 스테이크의 고급한 맛이나 향긋한 와인의 풍미보다는 논바닥에 퍼질러 앉아 새참으로 먹는 김치깍뚜기의 아삭한 식감이나 탁배기의 껄쭉한 목넘김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와 내용을 높은 명도와 채도로 해결하는 것은 훨씬 더 고난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런 언밸런스 속에서 오히려 예술적 감흥이 더 강렬해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하늘과 바다를 이루는 청색조의 색감은 화가의 그림에서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형태의 왜곡이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화적 혹은 만화적 요소들을 약간 줄이면서 살짝 더 리얼리티에 접근해 가는 방식이 어떤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이것이 해학성(諧謔性)의 발휘라는 측면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겠으나, 우미감(優美感)을 증진시키는 데는 일정 부분 기여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로서는, 이 미묘한 센스를 그가 어떻게 핸들링 해내는가에 따라, 향후 김대윤의 회화가 나아가는 방향이 미묘한 갈림길에 서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을 가져보게 된다. 또한 펄떡거리는 물고기들의 싱싱함을 표현하는 데에 거칠고 힘 있는 단붓질의 효과가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그의 화실에서 느낀 바 있었기에, 향후 선조의 힘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의 진행이 그의 회화 발전에서 핵심적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필자는 예상한다.

그의 화면이 가진 명랑함, 쾌활함, 풍요로움이나 부산적, 남도적 풍토성은 다른 지역의 관객들이 작품들을 대하면서 받을 수 있는 의외성과 기이함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한 열정적인 감흥은 마치 브라질의 삼바적 분위기나 스페인의 플라맹고가 주는 느낌과도 일면 방불하다. 그의 화면 속에서 소재가 가지는 에너지의 힘이 명징하고 강렬한 색채와 함께 어우러질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환기시키는 화가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깊은 위안과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데, 이러한 화면의 구성은 화가에게는 거의 체질화된 측면이다. 이러한 내용적 흥겨움을 살리면서 동시에 형식적 강렬함을 색과 선의 생기와 동세를 통해 굳세게 밀어붙여 나간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회화적 감흥을 새롭게 이루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장소 : 피카소화랑
– 일시 : 2017. 6. 22. –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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