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이展(미광화랑)_20171026

사라지면서도 영원한 것들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재현이란 묘사, 상징, 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현이란 단어에는 ‘다시 나타나다 혹은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다. 재현은 표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인식이 다름 아닌 ‘표상’이다. 그러니까 재현이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고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연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해준다. 즉 재현이라는 말에는 현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현상 뒤의 어떤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 등이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은 항상 부재를 환기하는 안타까운 상실감의 정서를 간직하면서 진행된다.

흔히 재현적 회화는 보이는 외계의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으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대상의 모방으로만 귀결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림으로 보여 지는 것은 화면 밖의 사물과 유사한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출발하여 더 멀리 가는 일이다. 조형적 재현이 유사를 내포할 수 있지만 그러나 닮았다는 것이 전적으로 재현으로만 귀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재현에 의해 전적으로 흡수되거나 점령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림의 세계이지 않을까? 서구의 전통회화는 눈에 보이는 외부세계를 강박적으로 재현하려했고 이후 현대미술은 그러한 전통을 해체한 결과 즉물적인 사물로 귀결되어 종내 미술이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초래했다. 반면 우리 전통회화에서 재현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존재의 닮음 꼴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림은 가시적 세계에서 비가시적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이는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실 모든 그림은 가시적 세계에서 출발해 그 너머에 자리한, 이면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부단히 가시화하려는 욕망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이진이의 근작은 컵과 고양이를 그린 재현 회화다. 매우 사실적인 그림이지만 그렇다고 이 그림이 특정 대상을 재현, 묘사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지는 않다. 재현이면서도 어딘지 재현으로부터 부단히 탈주해나가는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재현주의 어법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통해 또 다른 것을 지시하거나 건드리려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아주 평범한, 그냥 흘러가버려 의식되지도 않는 일상의 한 순간을 고전적 회화의 방식으로 견고하게 성립시켜 보고 싶었다” 고 말한다. 그것은 과연 가능할까?

적막한 공간에 단독으로 컵, 고양이가 화면 정중앙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로지 그것만이 내 앞에 실존하고 있다는 느낌, 이른바 현상학적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따라서 컵이라는 일상의 용기와 한 생명체인 고양이는 흔한 존재이면서도 단독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고 감정을 누수 시키고 묘한 낯설음을 자극하는 이상한 존재로 파고든다. 그림은 정교하면서도 현실감이 부재한 듯한 분위기, 이상한 공허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납작한 캔버스의 평면성을 강조하며 균질하게 바른 붓질, 현실적이면서도 어딘지 비현실감이 감도는 색채, 무척 사실적이면서도 디자인적인 구성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 한정된 몇 가지 색의 구사와 붓 터치와 물감의 물성이 억제된 화면 처리는 오로지 화면 안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 형상에만 주목하도록 시선을 유인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가능한 회화적 기교를 억제하고 있고 관습적 그림의 자취를 가능한 지우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통해 보는 이의 시선이 단지 외형의 묘사에 천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형상에 집중하게 하고 그에 따라 그 너머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그 무엇에 몰입하게 해주는 편이다.

컵은 마치 인격적인 존재나 몸을 지닌 인간의 몸처럼 직립해있다. 흔하게 접하는 일회용 컵이 공간에 홀로 놓여있거나 방치되어 있다. 화면의 3분의 1을 가로지르는 직선으로 바닥이 설정되고 그 선은 캔버스의 밑변과 일치하고 있다. 그 위에 컵이 단독으로 서 있으면서 그림자를 동반한다. 그 그림자는 컵의 실존성, 고독감 등을 자극한다. 컵의 구연부에는 커피의 얼룩(입술이 닿아 만든 불가피한 흔적)이 묻어 있는데 그것들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매번 다른 상황성을 안긴다. 당연히 그 얼룩이 개입해서 이룬 여러 정황적인 자취 역시 다채롭다. 번지고 퍼진 얼룩은 커피를 흡입한 인간의 불가피한 결과로 남겨졌는데 그것이 모종의 상황, 감정, 사연을 연상시키는 매개이자 커피와 함께 한 짧은 시간, 생의 이력 또한 불현 듯 암시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그러니 작가는 단지 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컵을 빌어 일상의 여러 상황, 인간의 내밀한 동작과 그와 결부된 미묘한 감정 등을 전달한다. 또한 그것은 컵의 표면에 그려진 일련의 그림으로 인해 한층 부풀려진다. 통상 종이컵의 표면에는 다양한 로고나 이미지가 기입되는데 반해 작가는 자신이 임의로 특정 장면, 상황을 설정해 놓았다. 알 수 없는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풍경의 한 자락이 느닷없이 잘려진 체 그려져 있다. 컵의 피부에 그려진 그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군가 커피를 마신, 마시고 난 후의 추이를 상상하게 해주는 단서로 작동한다. 정작 사람은 망실되었고 화면 바깥으로 추방되었지만 남겨진 커피와 구연부에 묻은 얼룩, 그리고 용기 표에 그려진 그림이 역설적으로 다양한 사연을 발설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행하는 일, 그러니까 지극히 일상적인 기호품이 되어버린 커피를 일회용 컵에 담아 마시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인간의 내밀한 감정, 심리 등을 투사하고자 한다. 의인화 된 컵이자 사후적 결과물로서의 컵의 존재를 통한 고독하고 내밀한 심리의 지도를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고양이 그림이 등장한다.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 고양이와 길에서 접한 고양이들이 컵과 동일한 구성 및 그것들과 연관된 공간 속에서의 배치 등을 염두에 두고 그려져 있다. 풍부한 표정과 그만큼 헤아릴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을 거느린 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고양이다. 단순하고 적조하게 처리된 배경을 뒤로 하고 얼굴 부위만 과감하게 클로즈업 된 이 고양이는 흡사 인간처럼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동물의 초상을 빌어 자신과 관계 맺고 있는 특정 고양이를 재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고양이를 통해 그 대상 너머에 자리한 내면을 그리고자 하고 그리고 이것이 보다 확대되어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과 심리 등으로 전이되고 있다. 결국 작가가 그린 컵과 고양이는 인간을 대신하는 일련의 상징적인 도상이고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일회용 컵이고 유한한 생명체다. 둘 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공통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그림은 어딘지 공허하고 텅 빈 느낌, 적막하며 쓸쓸한 분위기, 지극히 건조한 분위기를 은연중 풍긴다. 그것은 바니타스로서의 정물화에서 만나는 분위기에 유사하다. 그러나 작가가 그린 컵과 고양이는 그 유한성, 일회성이란 숙명 안에서도 한 개체로서의 실존성, 존엄성을 내세우며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역설이 자리한다. 차분한 응시와 담담한 마음의 경지가 빚어낸 풍경이다.//박영택//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7. 10. 26. –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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