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재展(아트스페이스)_20171129

이진오(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보는 것이 진실일까?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환영(illusion)인가?

조영재 작가가 그린 숲의 정경은 곧바로 우리를 환영의 세계로 인도한다. 현실의 숲이 아닌, 작가의 감성에 의해 재인식되고 재해석되어 새롭게 분해되고 다르게 구성된 환영의 세계가 화폭 속에서 펼쳐진다. 이 환영의 숲 속에서는 빛의 화려한 잔치가 벌어지고, 온갖 생명의 숨결이 교환되는 비밀의 정원이 연출되고 있는 듯만 하다. 하지만, 여기서 묻는다. 그것이 과연 환영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보는 것일까? 망막의 진실만이 진실의 전부가 아닐진대, 그 나머지 진실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적 얼굴을 한 물질의 본색을 파고 든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경계를 파고들어 빛의 속성을 분할하고 재분류하며, 재영토화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재영토화가 작가의 주관적 재해석이나 임의적 의도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빛이 원래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빛의 재영토화된 지형이 주관이 아니라 지극한 객관이라는 역설이다. 하지만, 작가의 숨결을 느껴보자면 그것은 역설이 아니라 오히려 솔직담백한 직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숨죽인 채 정밀하게 관찰하고 관조하여 포착해 낸 절대 객관의 형상이다. 결코 그것이 인상주의적 주관성이나 하나의 스타일로서 변조하는 의도적 인위성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작가의 이러한 입장을 이해하면 그림은 전혀 다르게 포착된다. 어쩌면 극사실화일 수도 있다. 작가의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해 실제의 숲 속으로 발길을 옮겨 보자. 그리고 자세히, 아주 자세히 한번 살펴보자. 숲속의 빛은 사물과 부딪쳐 튕겨 나오고, 또 공기와의 마찰로 파쇄되면서 무수한 빛의 파편들로 분화된다. 그 빛의 파편들은 상호간의 공명과 동조를 이루면서 다시 재집결하고 영역을 이루고 흐름을 이루면서 서로 간에 경계를 형성하고, 또 한편으로는 서로 간에 간섭하고 침투한다. 여기에 빛의 무더기와 흐름과 떨림이 발생하고, 이 운동들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울림을 형성한다. 마치 오선지에서 각종 음표들이 복잡한 어울림의 선율을 시간의 흐름 위에서 펼쳐나가듯이, 공간을 분할한 색의 영역들이 덩어리지기도 하고 흐르기도 하고 서로 경계를 이루기도 하고 서로 충돌도 하고 스며들기도 하면서 그 진동과 울림이 시간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운동성과 시간성을 어떻게 정지화면으로 번역해 낼 것인가? 작가 조영재는 바로 그 운동성과 시간성을 빛의 재영토화라는 이미지 분할을 통해 구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강렬한 색상의 현란함에서 단색톤의 명암으로 단순화시키는 은근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목소리가 차분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신감의 표시일까? 성숙으로 가는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절제의 미덕인가? 아니면, 어떤 미지의 설렘을 담은 안개 젖은 자기 암시인가?//이진오//

– 장소 : 아트스페이스
– 일시 : 2017. 11. 29. – 12. 1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