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원展(금련산역 갤러리)_20181120

쇠의 시간을 가로질러

조관용(미술과 담론 편집장)

그의 작업은 장정렬(경남도립 학예사)이 이전의 전시 서문에서 “독일 공업 지역의 회색 빛 하늘과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차가운 공기가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번 전시에도 철을 주된 재료로 한 조형물들이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큐빅으로 만든 사각형이나, 또는 철판 의자위에 물을 담은 지난 작업들과는 달리 철판 위에 씨앗을 올려놓아 싹을 틔워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또는 커다란 판위에 잔디를 올려놓은 조형물들, 또는 가느다란 철로 드로잉을 한 것처럼 보이는 사각형의 조형물들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에서 특이한 지점은 철판 위에 씨앗을 올려놓아 싹을 틔워 식물을 자라게 하는 조형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의 조각가들이 쇠를 갈아 쇳가루를 통해 조형의 형태를 만들거나, 또는 쇠에 녹을 내어 형태를 그려내는 작업들은 종종 볼 수 있지만, 그의 작업과 같이 철판 위에 씨앗을 올려놓고 싹을 틔워 식물을 자라게 하는 조형 작업은 흔히 볼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지난 전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도 그가 주된 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철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철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갈아 놓은 쇳가루들이나 또는 물이 아니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철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재료들은 잔디와 살아있는 식물들이다. 그리고 지난 전시에서 큐빅의 형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느다란 철로 만든 사각형의 조형물이다.
철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하는 모던 조각에 있어서 철이 지니고 있는 단단한 성질로 인해 조형 정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재료중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에 있어서 철을 갈아 쇳가루를 낸다거나, 또는 녹이 슨 쇳조각으로 조형을 표현한다는 것은 모던 조각이 지니고 있는 조형적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일련의 행위이다.

철을 갈아 쇳가루를 낸다는 것은 철이 지니고 있는 단단함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지며, 녹슨 철을 조각의 재료로 이용한다는 것은 물질과 정신과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가 갈아 놓은 쇳가루와 철판과 음향 장치를 통해 조형적 형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행위를 통해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작가와 감상자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철판에 씨앗을 올려놓고 싹을 틔우거나, 또는 사각형의 대형의 탁자 위에 잔디를 올려놓음으로써 지난 전시에 대한 사유를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를 그의 작업 노트에서 “사각의 형식을 선으로 그리듯이 입체화하고, 그 안에 흙이나 물, 생물을 가두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사고의 한계와 지켜야할 주변의 환경을 놓지 못하는 일상의 이야기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의 작업들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작업은 그가 작업 노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일상의 풍경은 아니다.

철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철제 프레임의 입체화한 사각형은 전시 주제에서 보듯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집을 의미한다. 집이란 것은 무엇일까. 집은 그에게 있어서 철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철제 프레임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통해 외부로 향해 열릴 수밖에 없는 취약한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은 그의 작업의 일련의 긴 과정 속에서 보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비춰지는 공간은 아니다. 집은 이전 전시에서 보듯이 정신과 물질의 경계가 희미해져 있거나, 시간의 흐름을 통해 점차적으로 그 경계가 사라져가고 있는 그의 시선에서 보면 TV 광고에서 보는 것과 같은 풍경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집은 그의 시선에서 보면 깔끔하고 단단한 사물들에 보호받는 공간이 아니라 그가 작업 노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흙, 물, 생물을 가두는 행위”이며, 죽어있는 공간에 울타리를 두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들이 가득한 공간에 철제 프레임의 철선과 같이 선을 긋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익숙하게 사용하는 침대는 그의 시선에서 보면 사각의 대형의 탁자 위에 잔디를 깔아 놓은 작업과도 같으며, 강인하고 단단하게 보이는 철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식물이 자라나는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집을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의 시선에 의하면 우리가 일상의 공간에 단단한 사물들로 틀을 짜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들이 가득한 공간에 선을 긋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집을 그리다’는 그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집에 대한 사유이며, 사색이다. 하지만 집을 짓고 산다는 것에 대한 그의 시선은 우리의 일상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시선에 위치해 있다. 집은 일상적으로 죽은 사물과 같은 대지위에 견고한 사물들로 우리를 보호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수없이 많은 시간을 쇠와 마주하였던 그의 시선에서 보면 집은 생명들이 가득해 있는 공간에 선을 긋고 살아가는 곳, 자신을 그곳에 한정시키는 곳, 자유와 속박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자신이 내적으로 풀어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집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조관용//

//작가 노트//
이번 전시 ‘집을 그리다’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정리하며 또 다른 새로움의 출발을 이야기 하고자한다. 항상 관심을 두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바로 나의 주변의 일상이기도 하다. 작업 속에서 보이는 선으로 그리는 공간속 사각의 의미는 나의 일상에서의 깊은 연관성을 나타낸다. 또한 선은 공간을 구획하고 사각의 방을 만들면서 전체 공간속에서 강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렇게 구획되어진 나의 공간속에 변화를 갈구하며 시간 속에서의 미미한 움직임들을 가진 특별한 오브제인 생물들을 채워나가는 작업이다. 철의 얇은 분말인 철가루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녹으로 표현되어지고, 사각의 틀 안에서 채워진 물은 제한된 환경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가지며 점차 증발되어 흔적들을 남긴다. 집을 구성하는 개별적 가구들은 각각의 공간인 사각의 프레임 속에서 오브제들(물과 철, 식물)간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작은 그들만의 움직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공간속에 세워진 덩어리들은 사각이라는 철선으로 시작하여 사각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속에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듯 가구들을 사각으로 조형화하였다. 사각이라는 형이 우리에게 주는 안전함과 바깥세상으로부터의 단절됨을 의미하듯 나 자신을 작은 공간에서부터 큰 방에 이르기까지 사각이라는 선들로 가두어 두는 듯한 느낌의 극적인 상황을 형상화 시켰다. 선으로 구성 되어진 작업이라 속 이 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함을 느낄 수 있으며 삶의 터전 대부분이 사각으로 이루어져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이지만 그 사각에 수동적인 부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구를 방에 배치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배치되어진 가구에 우리스스로가 또다시 길들여진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 하리라 본다. 마치 사회구조가 그러하듯 말이다. 인위적으로 생명이라는 요소로 나의 방 속에 자리 잡고 그 속에 나의 존재와 함께 하기를 꿈꾼다. 나무, 바닥에 깔려진 잔디는 갇혀진 공간을 희망과 여유를 갈구하는 어쩌면 자연으로의 동경을 의미한다. 거꾸로 된 집은 집에 대한 목적성과 가치관의 변질을 의미하는데 본래 집이 가진 안식처라는 본질을 이탈해 삶의 질적 수준을 상징하고자 하는 의도적이고 과시적 삶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했다. 공간 속에 가구와 오브제들을 통하여 비움과 채움의 반복적 행위는 시간과 함께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질 것이다. 또 다른 방은 사각의 큐빅으로 집을 그린다. 단순히 사각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애정인 것 같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내가 만들어 놓은 공간속에 시간을 담고 싶어서일 수 있으며, 역설적 의미에서는 내가 만든 공간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 일수도 있다. 작업 과정에서의 오브제인 물, 식물, 철의 분말들은 철은 녹으로 변해가고 물은 시간과 함께 증발하여 흔적을 나타내고 식물들은 주어진 공간에서 소멸되거나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표현되어진다. 나는 이러한 과정 안에 나의 이야기들을 상징적인 단어로 작업을 완성해간다. 너무 과하지도 않은 조형적 언어와 인위적 행위 자체를 극도로 자제하며 작업을 진행해 나갈 것이다. 공간을 비우고 다시 채워가는 반복적 과정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바로 나의 일상과 동일한 행위가 아닐까 생각된다.//작가 노트//

– 장소 : 금련산역 갤러리
– 일시 : 2018. 11. 20. –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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