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展(복합문화공간 거리이음)_20240511

//평 론//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우주 토끼’
김영준(전시기획, 미술비평)

고전소설 별주부전(鼈主簿傳)에서 토끼는 임기응변의 기지로 용왕계를 속인다. 이 이야기는 이미 삼국시대에 여러 다른 이름으로도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별주부전과 관련된 유사한 이야기들이 유행했던 구전(口傳) 시대를 포함하면 상당한 역사적 기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것이 판소리나 소설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이렇게 토끼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습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2지신상의 하나로 지금까지 그 존재의 의미는 옛 설화적 가치를 뛰어넘는다. 토끼는 예로부터 달과 여성(음(陰))에 밀접한 관계로 이야기가 구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토끼의 설화는 꾀가 많고 민첩하지만, 여성적이고 연약한 존재로 해석해 왔다. 이미 달 토끼의 방아 찧는 이야기와 이미지는 매우 풍부한 비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은유를 모두 미룬다 해도 이미 우리보다 훨씬 빨리 우주여행을 하고 달에서 떡방아를 찧었다는 것으로 토끼와 우주의 연계는 오래된 관념으로 남아있다.

아폴로 11호가 1969년 7월 20일 처음으로 달 표면에 인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 우주를 향해 출발한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 태양계의 구조를 그린 금속판을 타임캡슐에 실어 보냈다. 그 그림은 묘한 감성에 사로잡히게 한다. 문명계 인간의 눈으로 보면 그다지 감동할 만한 그림은 아니지만, 그 그림을 보는 대상을 불특정 외계의 어떤 존재라 전제했다는 면에서 그렇다. 어떤 외계의 생명체가 그 타임캡슐을 개봉해 지구의 여성과 남성의 간략한 선묘 이미지를 본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미지의 어떤 존재가 그 이미지를 볼 수나 있을까? 달 토끼라도 그 타임캡슐을 발견하고 소식을 보내 온다면………..

김남진의 ‘우주 토끼(Rabbit in the Cosmos)’ 그림에서 어떤 위안을 받는다. 휴식과 같은 그런 이미지이다. 특이하게도 이전 ‘사회적 풍경’이나 ‘모델, 사피엔스, 문명’ 시리즈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 이전의 그림들이 위트와 경쾌함보다는 범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우주 토끼’는 그저 감성적, 시각적 즐거움이 가장 먼저 느껴지며, 직관적 정서에 감상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해석’과 ‘읽기’보다는 ‘감성적 보기’가 강조되었다는 차이로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우주 토끼 시리즈는 말 그대로 토끼가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사실적 묘사를 중심에 놓은 은유의 서사적 이미지와는 분명 차이를 볼 수 있다.

그의 토끼는 간략한 기호이다. 귀엽고 예쁜 캐릭터의 토끼는 표정도 동세도 특별함 없이 그저 하나의 기호로만 등장한다는 것도 일명 ‘우주 토끼’의 특징이다. 무중력 우주공간에 부유하듯 떠 있는 주인공 토끼는 그림의 강한 주제로 등장하며 배경은 그저 색으로 채워진 은유된 우주공간이다. 토끼 주변에 멀리 보이는 작은 별이 점처럼 배치된다든가 뭔가 알 수 없는 형태들과 어우러진다.

필자가 이전 ‘사회적 풍경’이나 ‘모델, 사피엔스, 문명’ 시리즈에서 이런 기호들과 주제의 관련성에 대해 ‘중얼거림’으로 표현한 바 있다. 여기 광활한 우주에 부유하는 유영체로의 토끼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만나 어떤 그들만의 관계,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른바 우주 토끼는 네 개의 다리 두 개의 귀가 뭉툭한 막대 모양으로 특별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세 쌍의 페어(pair)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그 ‘중얼거림’처럼 무엇인가 기호 작용이 객관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하지만 이 이미지를 과거 ‘사회적 풍경’, ‘모델, 사피엔스, 문명’을 제작한 작가의 후속작으로 나왔다는 것은 예측하기 힘든 변주다. 하지만 사실 이 토끼의 기원은 사회적 풍경이나 문명보다 앞선다. 2006년쯤부터 ‘사회적 풍경’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발표되면서 작가 김남진을 본격적으로 알릴 수 있었다. 그가 미술계라는 범주에 아티스트로서 분명한 지위와 직책이 부여된 시점이다. 하지만 이 우주 토끼는 1996년 네, 다섯 점 정도가 습작처럼 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남진은 이 토끼 캐릭터에 어떤 서사체를 어떻게 부여할지 몰랐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이 존재는 묵혀 둘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그간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던 작가는 근간에 묵혀 둔 토끼를 우주에 방생(?)했다. 그런데 이 토끼 이미지가 해묵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캐릭터를 부상시킬 새로운 시대와 공간을 만나게 되었다. 우주공간에 토끼는 ‘방아 찧는 달 토끼’처럼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성질의 결합이다. 달과 토끼처럼 우주공간과 토끼는 어떤 인과성이나 인접성을 띠지 않는다. 이러한 결합은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낯선 것으로부터 진행되는 이야기들은 매우 풍요로운 은유와 비현실적인 서사로 도약한다. 뿐만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매체이지만 여전히 낯선, 나무판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상처를 내며 이미지를 판각한다는 것, 사각의 화면을 넘어선 원형, 곡면의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도자(陶磁)의 오브제가 부조처럼 캔버스에 부착된다는 것 등의 기술적, 기법적 변화들이 부각 된다. 물론 화면의 변형은 ‘모델, 사피엔스, 문명’ 시리즈에서도 선 뵌 적이 있지만, 우주 토끼에서 이러한 변주는 리듬감이 더해져 토끼가 유영하는 우주공간의 멜로디나 운율처럼 작동한다.

김남진의 작품 표면은 기법적 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전형적인 회화적 그리기로 설명될 수 없다. 거친 화면은 날카로운 드릴 날이 거침없이 지나간 흔적과 구멍, 때때로 모래, 금속 조각 들이 곁들여진 조화를 강조해 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렬한 색채대비가 가져다주는 명시성과 경쾌함은 생명력이나 활기를 직감해 낼 특징이었다. 이러한 물리적 형식들이 ‘우주 토끼’와 만났다. 거친 표면의 우주공간은 또 새로운 상상을 더 해주는 곳이다. 이 공간은 유클리드(Euclid)적인 해석도 허락하지 않으며, 원근과 명암이라는 물리적 효과를 기대해서도 안된다.

그가 현대 사회의 폭력성과 문명 질서의 파괴성을 드러내고 고발했다는 과거의 표현에 견주어 볼 때, ‘우주 토끼’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토끼의 기호는 마치 상형문자처럼 나무 패널에 새겨졌다. 우리가 쉽게 해독해 낼 수 없는 기호들의 조합과 결합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체도 그렇다. 이것은 마치 어떤 별에서 지구에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간결하고 확연하고 이미지 중심의 감성과 질문을 던져야 하는 해석의 문제는 우리가 파이오니어 10호, 11호에 담겨 우주를 향해 던졌던, 간결한 우리의 모습에 대해 불특정 누군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김영준//

장소 : 복합문화공간 거리이음
일시 : 2024. 05. 11 –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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