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한展(에스플러스갤러리)_140603

관계로서 신화 <꽃과 바다>
조광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조형예술학 박사)

정영한의 작품에는 바다와 꽃이 등장하고 있다. 잔잔한 바다 위에 약간 비뚤어진 시선으로 꽃이 하늘에 떠있다. 그리스 조각과 함께 있거나 신문지 조각 단면과 꽃송이가 그려져 있기도 한다. 여러 가지 소품이 그림 안에 들어가 있지만 바다와 꽃은 ‘우리시대 신화’에서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가상의 상황이고 비현실적이다. 바다가 등장하는 비현실적 구성은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를 연상하게하며 초현실주의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작업하던 시대에 비교하면 빠르게 변하는 21세기에 정영한의 작품은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보게 한다.
그림 안에서 한 송이의 장미꽃은 실제 하는 꽃을 연상하는 이미지이다. 그려진 꽃은 더 이상 실재의 꽃이 아니라 표현된 현실이다. 그 꽃은 우리시대에 특정한 소비의 방식으로 장식되고, 개조된 꽃이다. 시각적 자기만족, 비유 이미지, 다시 말해 순수한 물질에 덧붙여진 사회적 관용의 방식으로 장식된 꽃이다. 그 꽃은 바다와 대비되면서 신화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간다. 바다와 꽃의 상황은 자연적, 물리적 위치를 빗겨가면서 전설적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시각은 사회적인 것을 언술하는 미술사 계보에 진입하고 있다.
정영한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가상이라는 말은 영어의 형용사 ‘virtual’을 번역한 것이다. 흔히 인터넷 상의 공간을 말하고 우리들의 상상속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virtual’의 또 다른 해석으로 ‘실질상’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음을 대부분은 간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가상성은 비현실적이거나 상상에 의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회화가 시대성과 결부한 표현 방법론의 특질, 그리고 감각으로 조직되어 생성된 회화적 공간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을 가시화 한 것”이라고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작품 속의 바다와 꽃의 배열은 시각적으로 가상공간을 구성하여 실재와 연관된 진실을 바라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유통되고 있는 고도의 테크놀로지 시대에 재구성된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공중에 떠있는 꽃송이가 현실로부터 거리를 지니는 것은 공간의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이다. 자연적인 것이 사라지고 인위적인 것들이 활성화된 문화에 잠재하고 있는 현대인의 이데올로기, 담론적인 것으로 대치된 사물들의 신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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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떠있는 꽃송이는 실제와 다른, 불가능의 상황과 공존하는 허구의 세계이다. 바다는 중력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지만 하늘에 떠있는 꽃송이는 육체를 잃은 채 바람에 날려가는 듯하다. 줄기와 잎이 사라진 꽃송이는 몸이 제거된 현대인의 머리 같은 모습이다. 과학적 객관성과 작가의 주관 사이에 심리적 분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거기에서 바다와 꽃의 재현은 단순한 사물의 복제가 아닌 기호적인 생산으로 나간다. 모음과 자음의 결합체계를 지닌 언어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의미의 언어체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다시 구성된 재현을 통해 단순히 경험된 것을 넘어서 관념적인 것이 된다.
바다는 정영한이 어릴 때 살아온 고향, 부산의 이미지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이다. 광활한 수평선과 파도의 거친 모습은 꽃송이와 마주하면서 감미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대치되는 바다는 남성 중심적, 권위를 지닌 중력의 질서가 지배하는 것 같지만 작품 안에 바다는 순화된 잔잔한 파도일 뿐이다.
바다는 어머니, 모성, 탄생의 상징으로 서구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바다의 본질인 ‘물’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어머니 뱃속의 양수로 회귀하고 싶은 본성이다. 신화에서 본다면 고대 사람에게 바다는 신비한 것이면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없이 전개되는 수평선과 알 수 없는 깊이,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불어오는 풍랑, 거기에 희생이 따르면서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게 하였다. 그 두려움은 여러 민족에게 바다에 얽힌 많은 신화나 전설을 낳게 하였다. 과일이나 꽃, 책과 같이 정물화의 주제이었던 사물들은 한동안 신화적 이야기의 먹이가 되지만, 그 사물의 이야기는 곧 사라지고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 신화의 지위를 획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바다가 암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신화이다.
여기에서 정영한이 말하는 ‘신화’의 의미를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우리시대 신화’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Mythologies)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의 ‘신화’는 현대사회 매스미디어에 나타나는 이미지 기호의 불연속성과 유사하다. 바르트의 ‘신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뀌면 새롭게 생성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앞의 것을 덮쳐버린 현대인의 담론이다. 현대의 일상적 삶에 놓여있는 사소한 사물들과 현상들에서 신화처럼 이데올로기가 감춰진 의도를 읽고 있다.
그러한 현대인의 신화는 기호적 관계망에서 형성된 소통의 체계이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화’를 대상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인식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신화’는 현대사회에서 의미작용을 만드는 한 양식이며 일종의 언어의 형식과 구조의 범주인 것이다. “신화적 대상들 사이의 실질적인 구별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신화는 하나의 빠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담론의 관할에 속하는 신화가 될 수 있다. 신화는 그 메시지의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화가 그 메시지를 말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바르트, 현대의 신화)” 옛날 이야기 대신에 일상에 유통되는 이미지를 모아 ‘신화’로 이름 붙인 바르트의 논의에 따르면 ‘신화’는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사건들이 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을 만드는 일상적 ‘언어’, 곧 우리 주변에 떠도는 ‘스피치’인 셈이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내용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부연하고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한때 추상 작가들은 작품의 제목을 붙이기를 거부한 때가 있었다. 제목이 지닌 언어적 무게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영한은 ‘우리시대 신화’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미지의 구성을 보면서 간편하게 초현실주의로 미술사적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는 언술이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작품과 제목의 관계를 기호학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텍스트처럼 주석이 개입된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에 제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기술적 현존성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순환적 사고가 나타난다. 회화, 데생, 조각과 같은 고도의 재능이 반영되는 모방 예술에서 그러한 작업 기술이 그대로 이미지의 현존성이 된다.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과정과 병치되어 있는 제목의 내면화는 기술적 현존과 다른 것이다. 미디어 환경 안에 사진들처럼, 서술적 장면을 묘사하는 작품에 부여되어 있는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다양하게 해석하게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신화는 가상적 가치가 유통되고 있는 사회에서 선택된 질서이며, 신화는 사회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이념적 가치와 욕망을 반영하는 문화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시대 신화’는 자연적인 것들을 사회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자연적인 것에서 문화, 역사적인 것, 이데올로기로 뒤집어놓은 상황이다. 거대하게 확대된 꽃은 본래의 감정 전달의 수단이나 아름다움의 표현 수단으로 환희의 지위를 벗어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신화에 떠오르는 꽃은 물신화 되면서 본성이 분해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이미 존재했던 꽃의 상징은 바다 위의 하늘에 놓이면서 우리 시대의 기호와 결합하고 새로운 신화의 지위를 만든다.
‘우리시대 신화’는 이전에 존재했던 기호학으로부터 시작해 구성된 특수체계, 곧 이차적 서열의 기호학적 체계이다. 우리는 신화적 소재인 ‘언어’ 그 자체, 종교의식, 조각, 회화, 사진, 포스터, 상품, 인터넷 등등을 여기에 다시 불러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각기 다르지만, 그 소재들은 ‘신화’에 의해 포획되는 순간 본래의 의미는 변형 왜곡된다. 현대의 신화는 우리들을 이야기 안에 잡아 가두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신화는 역사적 관용으로부터 유래하고, 인간적 운명으로부터 배어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화는 그것을 만들고 있는 주체, ‘우리’에게 귀착된다. 주변에 흩어진 신화는 ‘우리’를 향하여 명령하고, 우리는 그 무의식적인 힘에 정복된다. 우리 시대는 대중 매체에 의해 대량 생산되어진 신화에 의해 확장되어가는 애매성을 수용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한다.

관계로서 신화 <꽃과 바다> 
조광석(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조형예술학 박사)

 

– 장소 : 에스플러스갤러리(부산)
– 일시 : 2014. 6. 3 –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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