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정展(미광화랑)_20160215

현재에 대한 두터운 시선

강선학

남수정의 시간 감각은 현재적이다. 그리고 그 현재는 지나가는 순간이 아니라 두터운 인상으로 남는다. 그 두터움은 그녀가 형상화 하고 있는 꽃들의 미묘한 기운과 움직임, 느낌의 층위에 다르지 않다. 꽃이라는 소재를 단순히 재현한 것과 다른 느낌이다.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가늠하고 전체에서 느낄 수 없는 미세한 진동, 섬세하면서 선명한 움직임을 안겨주는 미시적 접근에서 오는 현재 때문이다.

가는 줄기와 꽃대를 밀어 올리는 새순들이 키를 맞대며 어우러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각기 다른 꽃들이 서로 경쟁하듯 자신을 밀어올리고 잎들은 한껏 제 모양을 벌리고 햇살을 받으려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얽히고설킨 생성의 형용이야말로 그녀가 구축하려는 화면이다. <코너> <나를 좀 봐줘> <우울한 사월> <패닉> <한여름> <답답함> <어디로, 어떻게, 왜>등의 작품 제명이 붙은 것들에서 일견되는 것은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식물들과 그녀의 반응이다. 그러나 유채꽃과 옥수수와 민들레, 선인장과 아이비와 잡풀들까지 다양한 식물군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색상이나 그리기의 방법,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들은 일견 단조롭다. 그리고 그런 단조로움이야말로 그녀가 추구하는 의지의 한편에 중요한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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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화면에 드러난 것들은 그저 식물 혹은 꽃, 그렇게 말하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구체적인 식물이나 꽃 이름을 이끌어 내거나 확인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도리어 다양한 형태적인 미묘함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그를 통해 보아내는 시선의 섬세함을 확인하는 것이 그를 이해하는 데 더 가깝다. 생명성을 보여주는 섬세한 움직임의 포착은 단순한 생태적인 관찰에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그녀의 작품 전제를 이끄는 선들의 집적과 선들의 병치가 가진 무한한 진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의 화면 안에서 유채꽃과 옥수수와 민들레, 선인장을, 아이비와 잡풀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들이 이름을 가진 식물이자 이름을 벗어나는 생명을 가진 하나의 이미지로서 그녀의 두터운 시선을 목격하는 것이 더 다급한 일이다. 그리고 이름의 재현 혹은 구체적인 사물의 복사적인 묘사가 아니라 그곳으로부터 생명의 미묘한 기운을 포착하는 일, 시선을 이끄는 먹선과 담채의 덤덤한 색상이 만드는 표면과 그 표면에 가까이 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

청색이 주를 이루고 있는 화면에서 너무 짙고 강한 붉은 색의 개미 한 마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 대비적인 긴장은 자연에서 흔히 목격되는 생태적 현상이지만 화면 위에서는 어쩐지 어색하다. 그녀가 보이고자 하는 것이 식물과 곤충과의 생태적인 장면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미의 등장은 돌연한 일이고 어색하게 보인다. 그러나 먹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식물은 이미 사실로서 형태와 구체적인 사물로서 이름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시된 식물의 잎맥과 모양은 생태적 묘사를 넘어 탈구상화된 식물의 형상 안에 실핏줄처럼 스며있는 통로들에 초점이 놓여 있다. 그것은 소재 자체와 그 소재를 담은 화면 자체의 네트워크이다. 그 네트워크의 세계에 개미 한 마리가 충돌적 사태를 만든다. 겨우 사실적 묘사를 벗어나려는 식물들이 붉은 색 개미 한 마리에 의해 사실적 형태로 환기되고 화면은 현실의 한 장면으로 전치되고 만다. 그것이 그녀가 개미를 등장시킨 이유이자 화면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다. 그녀의 이 환유의 기법은 작품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회색의 먹 선과 바탕의 색상에서 문득 붉은 꽃술의 배치를 보아내고, 촉수를 뻗어가는 마디식물의 질긴 생태적 운동을 본다. 건조한 선적 묘사와 비슷한 색상의 화면에 기묘한 기운과 움직임을 포획한 것이다. 이런 시선은 느닷없이 개미를 등장시키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잎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밀고 올라오는 노랑 꽃망울의 민들레나 유채꽃 줄기 위에 앉은 호랑나비는 사실의 묘사가 아니라 운동의 드러냄이며 미묘한 기운의 느낌을 포착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다.
선인장은 줄기가 가시처럼 변해서 날카롭게 자신을 감싸고 있다. 자기보호의 필요가 움트는 그곳으로부터 선인장에 대한 묘사가 시작된다. 그녀가 그곳에 난 자국을 생명성으로 보아내고 그 흔적 위에 가시를 형상화한다. 그러나 그녀의 가시 묘사는 사실로서의 선인장을 사라지게 하고 그 흔적들, 흔적의 자리에 다른 가시들을 보아낸다. 가시가 아니라 기묘한 촉수들이 전면에 부상한다. 촉수의 등장은 정지에서 운동으로, 분방함으로, 그리고 미묘한 기운으로서 느낌을 만들어낸다. 날카롭고 딱딱한 가시가 촉수의 분방한 운동으로 드러날 때, 선인장이라는 양감을 가진 식물이 아니라 선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섬세한 움직임을 담는 어떤 것이 거기 있게 된다. 그곳에 붉은 색의 선인장 꽃이 비로소 피어난다. 현실의 부정과 현실의 견고함이 맞닿아 있다. 그것들이 표면을 이룬다. 그 표면은 그녀의 시선이자 작가로서의 스타일이다. 그 스타일은 세계를 보는 그녀의 몸짓이자 언어이다.

선인장의 가시 사이로 기어 다니는 붉은 개미는 그의 화면의 색조와 선묘한 꽃들과 대비되면서 평면성을 돋보이게 한다. 꽃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보이고 있지만 선으로 재구성된 꽃은 꽃이라기보다 양감을 가지지 않은 선의 집적에 가깝고 도식적인 형태를 안겨줄 뿐이다. 그래서 그녀가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꽃 그리기나 그것들의 사실적 묘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입체적 양감을 굳이 구축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작업 여정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사물의 사실성은 때로 실감보다 이름을 확인하거나 통상적 이미지를 재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더구나 익히 아는 꽃이나 식물을 주소재로 다루는 그녀로서는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그녀가 정작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의 묘사나 사실적 표현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지 않은가.
사물을 묘사하고 원근의 거리로 현실감을 구축하지 않음으로 그녀의 선은 자유롭고 선으로 집적함으로 사실적 입체를 거부하고 원근을 무시함으로 현실적 구체성을 거부한다. 실재의 사물은 평면의 도식적 선으로 재구성된다. 그러면 사실적인 사물들은 사라지고 그녀가 근거로 삼고자 하는 어떤 생명의 흔적만 남는다. 그리고 그 선들의 병치로 만들어지는 중첩의 효과를 통해 화면의 네트워크를 생성시킨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는 형태들이 그렇게 서로 병렬된다. 선과 선이 자신들을 중첩시켜가면서 층위를 만들고 체계적 공간이기보다 병치공간으로서 사물의 사실성보다 작가 내면의 느낌을 불러낸다. 현실적 위계가 없는 화면은 정신적인 표현을 하기에 그만큼 자유롭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 있는 지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화면에 강하게 드러나는 평면성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그 평면성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생성하려 한다.
그곳에서 생명과 무관한 형태와 색채 사이에서 꽃을 피우고 개미가 그곳을 헤집고 다니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녀에게서 현재는 그렇게 드러난다. 가시가 자신을 키우는 순이자 숨으로, 그곳에서 뻗어 나오는 선들의 움직임으로 우리 시선을 이끈다.

그녀의 회화는 다름 아니라 하나의 식물이, 하나의 꽃이 드러내는 생명감에 대한 시선의 문제를 제기한다. 생명은 운동에 의해서 확인되고 현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운동은 기묘한 기운이고 움직임이며 섬세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존하는 이름으로나 형상으로는 부족하다. 사실적인 묘사는 통상적 인상을 극복하기 힘들고 작가의 의도는 상투적인 이해나 제시에 그칠 위험이 없지 않다,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은 상투적이거나 통상적인 이해가 아닌 것이어야 하고 기존하는 형태나 이름을 부정하지 않는 선에서 새로움의 잠재력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그것이 그녀가 선을 선택하고 평면성을 표현의 바탕으로 삼은 이유다. 꽃을 선의 집적을 통해 드러나게 함으로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꽃이 아니게 한다. 그것으로 그녀는 대상을 대신하려는 그리기로서 표상에 실패함으로써 표상 너머의 순간을 포작하게 된 것이다. 추상에 빠지지 않고 구상에도 적절하게 거리를 가지면서 자신의 화면을 얻어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시간성으로 선을 선택한 것이며, 그 선들이야말로 그가 감당하려는 생성과 힘, 움직임을 담아내는 체험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현재에 대한 두터운 시선은 그렇게 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식물에 대한 기묘한 힘, 움직임, 느낌으로 드러나는 그 순간 시간의 두터움과 연계된다. 그럴 때 우리는 촉수를 만지듯 현재의 시간을 그녀의 화면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강선학 미술평론//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6. 2. 15 –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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