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진展(리빈갤러리)_20170228

강선학(미술평론가)

스케치하듯 거침없이 선묘해 들어가는 그의 인물은 현실감을 쫓는,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을 뒷받침해 줄 배경이 배제된 채 공간 속에 던져져 있다. 그것에서 이철진의 인물이 묘사에 목적이 있기보다 내적 의미의 표출이나 심상의 또 다른 표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속의 인물이 같은 모델을 쓴 듯 거의 같은 얼굴로 나타나거나 탈을 씀으로 인물의 개별적 구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데서도 그런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탈춤의 태용도 현당성 보다는 얼굴을 가리거나 익명의 얼굴로 개별성을 부화시키는 그의 전형적 인물상일 분이다. 같은 얼굴이나 탈을 쓴 얼굴이란 자아를 감추고 자신을 대체하는 이중적 감춤은 분명 인물의 실재성이 아니라 관념성의 표현이다. 인물이라는 개인적 인격에의 관심이 아니라 인간자체에 대한 이해의 추구이다. 그것은 곧 인물의 사건을 통한 현실적 묘사가 아니라 화면에서의 구성적 긴장을 통해 인물을 재체험하는 것이다.

화면의 구성적 요인으로 인간을 만남으로 화면 내의 요인으로서 인간을 만나는 새로움의 추구이다. 구성적 요인에 의해서 생기는 인체의 기묘한 긴장과 차이성에 주목하고 인간을 구성적 요인으로 해체해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격체로서, 개인의 삶이나 세계에 대한 반응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물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라는 추상성, 인간이 한 공간 속에 처해 있을 때만 드러내는 내적긴장, 드라마가 아니라 본질적인 인간의 공간성 따위에의 관심이다. 그의 인물이 대부분 눈을 감고 있거나 실눈을 뜨고 있는 것도 표정의 구체성을 제거함으로 현실의 인간으로 읽기보다 인간, 혹은 인물이라는 그 자체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한다.

그럴 경우 인물의 개별성보다 인물의 전형이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인물은 인격체로서 인물이기보다 기호에 가까운 개념어이다. 삶의 애증을 인물을 통해 읽거나 생활의 구체적 체험을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물의 전형에서, 탈을 쓴 표정에서, 눈을 감고 바깥으로의 시선을 차단함으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화면의 구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물의 순수조형성의 체험, 즉 본질적인 것에의 시선이 아닐까. 스케치하듯 인물이 선묘되고 그 선의 흔적을 채색이 먹어 들어가고 그 위에 다시 약화된 인물이 분방한 선과 채색으로 문질러 놓은 듯 화면을 차지하는 과정은 본질적인 것에의 시선의 응축이 아닐까.

인체를 싸고 있는 선의 독특한 울림을 통해 본질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완의 선과 채색, 구성적 배려로 등장하는 약간의 소도구들은 그의 작업이 특별한 상황의 묘사가 아니라는 점을 두드러지게 한다. 현실의 인물이 아님을 강조한다. 탈로 가린 얼굴, 잠들었거나 눈을 감고 있는 표정, 똑같이 연지를 찍은 얼굴들은 분명 현실적 시간과 공간의 대상이 아니라 내적 응시의 기호일 뿐이다.

배경없이 드러나는 인물의 무시간성은 직관에 의존한 것으로 사건보다 본질에 가깝다. 실내의 인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정물을 보듯 인물을 보고 정물이 놓이듯 화면 속에 인물을 배치해 봄으로 캔버스라는 공간 안에서 새롭게 읽혀지는 인간에 대한 체험이 된다. 한 공간 안에서 구조를 해체된 인물로 인간이 제시될 때 우리가 만나는 것은 인간이라는 본질적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 사건과 개별성이 괄호로 묶여 버린 상태의 인간인 것이다.

자기응시의 의지로 가득한 이철진의 작업은 분명 삶을 묻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표현의 마당으로서 유념해야할 부분도 없지 않다.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본질에의 관심이 절실한 것이긴 해도 꼭 같은 얼굴이 갖는 도덕성은 스스로의 감성의 풍부함을 묶어 버릴 수 있고, 생각의 깊이나 폭을 얼굴처럼 좁혀 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건이나 드라마를 통해 인물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조를 통해, 인물을 구조적 요인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조명할 때 그 자신의 삶의 체험이나 이념이 삶의 깊이와 역사를 얻지 못할 때 가벼운 형식성에 빠질 위험이 언제나 있다는 것이다. 치열함이 퇴색될 때 급격히 관념의 유희로 그의 작업이 비칠 수 있다는 점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는 얼마든지 있고, 미술이란 그 다양함을 속성으로 함을 작가가 모를리 없기 때문이다.//강선학//

– 장소 : 리빈갤러리
– 일시 : 2017. 2. 28. –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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