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수展(갤러리 GL)_20181102

화가 최영수가 그림으로 바라다본 ‘시선’

김채석

언젠가 경남의 비밀스러운 양지 밀양의 오지 중에 오지라 할 수 있는 단장면 감물리라는 마을에 간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필름 카메라의 시절 시골의 서정어린 풍경을 담기 위해서였다. 하여 삼랑진의 안태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당신이 가꾼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시선과, 이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할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나도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 순수한 시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근간 내가 아는 화가 최영수의 다섯 번째 개인전이 열렸는데 타이틀이 ‘시선’이었다. 시선은 명사로 사전에 간단명료하게 눈이 가는 방향이라고 일렀다. 그럼 눈빛은 어떤 뜻인가에 서 같은 명사로 눈에 나타나는 기색이라 이른다. 그러니까 똑같은 한 눈이지만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서 그윽할 수도 있고 섬뜩할 수도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과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과의 관계에서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행동양식에서 비롯되듯 시선과 눈빛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 모두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공통점으로 얼굴의 각도보다는 눈동자의 방향성에 따라 어떤 진지함 또는 멍한, 그윽한 이미지로 모든 대상이 여성인 점과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이라는 점이 달랐다. 왜 서양인이어야만 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그 이유에 대해 최영수 화가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뿐 어떠한 정답은 없을 거라는 추론인 까닭으로 동양인에 비해 깊은 눈의 서양인이 응시하는 시선이 무언가를 전달하는 의미가 더 있어서일까. 하는 생각만 일었다.

아무튼 나 자신의 시선은 어떨까에 앞서 내가 내 시선을 볼 수는 없지만 책을 읽을 때, 정지선에서 신호등을 바라다볼 때, 티브이를 통해 당리당략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행태를 볼 때, 지나는 여인네의 요란한 치장을 볼 때, 허기진 상태에서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쳐다볼 때, 숨어서 야한 동영상을 볼 때 등은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어 시선이라기보다는 눈빛에 가깝겠지만,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 길가나 풀숲에 피어난 꽃을 바라볼 때, 폭포에 떨어지는 장엄한 물줄기를 볼 때, 비 온 후 일곱 색깔 무지개를 바라다볼 때 등은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마음의 무장을 해제한 바라보기. 즉, 흔히들 말하는 선한 시선이 아닐까.

한때 푸른 기와지붕의 집에 민정수석이라는 자가 검찰청사에서 질문하는 여기자를 향해 쏘아보는 것을 레이저 눈빛이라 했던가. 얼마나 표독스럽게 쏘아보거나 째려보았으면 레이저 눈빛이라 했겠는가. 달리 복사 광선의 유도에서 나온 증폭된 빛의 레이저를 광선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광선은 에너지의 세기가 태양광보다 100만 배 이상이다. 그러니 그자가 여기자를 향해 레이저를 발사할 정도의 눈빛이라면 눈을 크게 부라리며 쳐다만 봐도 폭력에 준하는데 이는 어디에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람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눈빛보다 더 표독하고 잔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왕 짐승이라는 말이 나와서 생각건대 길거리에서 먹이를 노리는 묘(猫) 선생을 보면 섬뜩할 정도로 포악함의 극치에 가까운 야성의 표본처럼 보인다. 반면에 견(犬) 선생의 처지는 좀 다른 것 같다. 그것은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배신을 당한 유기 견의 눈빛을 보면 지금이야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대들지언정 쫓겨나지는 않지만, 지난날에 눈칫밥 먹다 쫓겨난 며느리의 신세처럼 서글프기 그지없어 보인다. 반면에 주인으로부터 기본권을 인정받고 반려 견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는 애완견의 눈빛은 그야말로 룰루랄라가 따로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람의 눈빛이나 시선도 자신의 마음가짐이나 환경에 따라 많이 다르겠구나 싶다.

그만큼 환경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성격도 눈빛과 연관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과 ‘풀’의 김수영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사진을 통해서 보았을 때 김수영의 눈빛은 그의 시에서와 같이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느껴지고, 반면에 박인환의 경우 서구적인 분위기가 말해주듯 모던한 댄디보이 스타일로 시는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표현했듯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낙천적인 성격 탓인지 그윽한 시선이 담겨있다.

사실이지 동안의 삶을 살면서 눈을 뜨면 눈에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안 보이는 정도로 생각했지 어떤 시선이라는 점에서 생각할 겨를 자체도 없었음을 고백하며, 내가 본 최영수의 시선은 본인이 여성이기에 이성으로 남성의 시선을 그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건 나의 오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오판은 우리 주변에서 함께하는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림마다에서 풍겨오는 뉘앙스가 남다르다. 사과를 베어 물고 전방을 즉시 하는 여인은 쿠바의 아바나 뒷골목의 여인처럼 느껴지고, 장미를 배경을 벤치에 앉은 금발의 여인은 뉴요커, 테이블에 엎드려 어딘가를 주시하는 여인은 파리지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림을 보면서 생각은 자유인 것 같다. 기실은 어딘가를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응시하는 여인들이 영국의 런던이면 어떻고, 이탈리아의 밀라노면 어떻고, 러시아의 상트페레부르크면 어떻겠는가. 그런 점에서 화가 최영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림으로서 만의 시선이 아닌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인류가 살아가면서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이나 따뜻한 마음,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다보는 시선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시선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림을 보는 눈이 청맹과니와 다르지 않은 나는 최영수가 전시하고 있는 그림의 주제 ‘시선’을 그렇게 이해했다.//김채석//

– 장소 : 갤러리 GL
– 일시 : 2018. 11. 2. –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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