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행숙展(아리랑 아트스페이스)_20190314

일필일획의 행위가 이뤄낸 최행숙의 회화 공간

박은주(전, 경남도립미술관장)

예술작품의 핵심은 오랜 시간에 걸쳐 상식이 된 사람들의 인식구조에 공백을 만들어 그 틈을 새로 채워주는 메시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①독창성을 지닌 ②핵심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해주는 간결한 구성 즉 단순한 형식으로 ③감동을 낳아 ④구체적이고도 ⑤진실한 메시지를 ⑥주고받을 이야기를 만들어낼 작품이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다시 말해서 일품(逸品)은 6가지 특성을 지닌다. 독창성, 단순성, 감성, 구체성, 진실성, 대화성은 예술로서의 존립을 위한 관건이다.

그 중의 으뜸은 새로운 역사를 이룰 고유성을 지닌 독창성이다. 독창성을 지녀야 새로운 메시지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그 관심을 유지시켜 평범하거나 일반적인 기대나 예상을 깨뜨리는 돌발성 내지는 의외성을 낳는다. 최행숙의 어떤 작품들에서는 이러한 특성들이 한꺼번에 감지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럴 때면 언제나 생 텍쥐베리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고 한 구절이 자주 떠올려지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작품이 완전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작품이 지닌 간결한 구성으로부터 던져져오는 강렬한 기운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 기운의 강렬함으로부터 최행숙의 독자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에서 강렬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독특한 붓질 때문이다. 그녀의 회화는 그 필체가 대단한 생동감을 갖는 현대회화이지만 전통적인 무언가를 연상케 한다. 이 전통과의 연계성이 오히려 그녀의 작품을 참신하면서도 신선한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근원을 밝히고자 한다.

형사(形似)도 형의(形儀)도 없는 최행숙의 비구상회화는, 하얀 바탕 화면에 붓질의 흔적만이 남겨져 있어, 종종 일본 모노하[物派]의 평면작업과의 유사성으로 그 독창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회화는 결코 시공간의 물질 문제에 집중하는 모노하의 ‘답습’이나 ‘모방’이 아니다. ‘모노하’는 회화적 개념이 아니다. 모노하는 사람이 만들지 않은 미지의 것이나 외부의 것에 의미를 둔다. 반면에 최행숙의 회화는 오히려 모노하에서 최소화하려한 작가의 의도성과 행위성을 분명히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강한 생동감을 지닌다. 붓질 행위를 가장 중시하는 최행숙의 비구상 회화는 사물과의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의 것이며 오히려 사물성보다 행위를 더 중요시한다. 그 붓질의 행위가 이룬 선의 묘미는 최행숙 회화의 본질에 더 가까이 이끈다.

그녀의 붓질은 메시지 자체인 동시에 그 행위성으로 생동감 있는 기운을 일으킨다. 선적 붓질의 단순함이 이뤄낸 그 강렬한 기운은 순간적인 단 한 번의 붓질 즉 일필(一筆)이 이뤄낸 성과이다. 일필의 단순형식은 직관적 메시지의 전달로 쉽게 감동을 낳아 순식간에 감성의 공백을 충족시킨다. 이러한 메시지의 감성적 충만이 일필행위를 통해 그녀가 전하려는 심오한 의미를 담을 때에는, 그 깊이만큼 감성의 만족이 지속될 것이며,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인식시킴으로써 신뢰성까지 낳을 것이다.

커다란 붓에 몸을 실어가며 같은 굵기를 유지해가며 재빨리 붓질해내는 근원은 고도의 집중력과 강한 의지이다. 이 집중력과 의지가 작용한 일필회화(一筆繪畵)이기에 강력한 운동성의 기운을 지닌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캔버스와 붓의 만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캔버스 위에 자신의 원초적 행위를 하나의 이미지로 드러내는 그 정신력에 핵심적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녀의 일필회화에는 인간의 정신력을 표상하려는 심적 표상주의가 잠재해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회화가 만들어내는 주체의 한계는 작품의 무명성을 드러낸다. 신체의 존재성을 확인하려는 붓질 행위와 그 역할이 여전히 표상주의적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회화는 심적 생동주의를 지니기에 70년대 한국회화를 주도했던 서정적 단색화와도 다르다.

최행숙의 생동적 일획은 세계와 인상에 대한 완전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의 우연성을 허용한다. 그 우연성은 행위로서의 붓질이 가져다준 자연발생적 형상이다. 이 행위의 우연적 형상은 그녀의 회화를 추상표현주의와도 연계 지운다. 그녀의 작품 재료나 붓이 서구적이고 그 형식이 실험적인 비구상화를 추구한 결과라는 점에서는, 미국의 행동주의 회화와도 연계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국미술의 전통적 지평에서 바라본다면, 그녀의 회화는 오히려 문인화적 전통에 더 가까이 하고 있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한 순간에 거침없이 큰 붓을 휘둘러 그어낸 일필과 여백공간으로부터 문인화적 정체성 내지는 작품 세계의 독자성이 읽혀진다. 여기서 그녀의 일필 회화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무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붓질의 강한 행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그녀의 일필일획 회화는 붓질 행위의 흔적 이외의 어떠한 구체적 인상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의 회화가 어떠한 형식이나 체계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붓질 행위의 결과로서만 형상을 이룸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석도의 일획론이 주창한 회화철학의 기본정신을 오히려 더 잘 드러낸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본능과 감각에 충실히 몰입하는 최행숙의 순간적 붓질 행위는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남종선(南宗禪)의 선무의식(禪舞儀式)의 한 순간과도 유사하다. 절대적 고요함 속에서 강력한 기운을 순간적으로 분출하지만 요동치지 않는 극도의 단순함을 지닌다. 이러한 여백의 고요함 가운데 붓질이 생동하는 것에서 쉽고도 단순하게 인생의 참뜻과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명나라 말기의 문인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談)》의 간결한 구절들처럼, 그녀의 일필일획은 매우 소박 단순하지만 함축적이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품어낸다.

최행숙의 문인화적 정체성은 붓질 행위자체만이 아니라 붓질에서 남겨진 화포의 바탕면 즉 여백공간(餘白空間)에서 찾아진다. 최행숙의 행위적 일필일획 회화에서 동양적 정서의 상징인 ‘여백’은 여전히 중요하다. 붓질의 흔적으로 만든 선적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인 여백이 행위와 어우러져 있다. 원래적 대지(大地)인 하얀 바탕 화면과 순간적으로 그어져 응축된 세계를 드러내는 붓질이 충돌하여 긴장감을 일으킨다. 이 긴장감은 균형 잡힌 화합과 통일의 시적 울림을 던져준다. 이때 던져오는 충만된 순간의 희열적 붓질이 ‘돌발흔적’과 여백이 대비를 이뤄 강렬한 생명력을 낳음으로써 그녀의 회화를 차별화시킨다.

고요한 여백과 희열적 붓질의 생동력이 어우러진 그녀의 일필일획은 시적 언어화로 향한다. 붓질의 완전성에 대한 추구와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자유로운 의지가 여백과의 조화로운 합일이 되는 순간 감성적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한다. 이 극적 긴장감으로 전통적 여백미가 현대적 비구상화의 의미로 탐색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여백의 장식적 현란함과 기교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여백 공간이 있음으로 해서 붓질은 더욱 강렬한 기운을 뿜게 된다.

이러한 발산 효과는 그 대비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강해지기에, 큰 붓과 그에 걸맞은 여백을 위해서 큰 화폭이 필요해진다. 화폭의 크기에 비례해서 작가의식도 훨씬 자유로워지고 그 자율성이 보장되는 만큼 작품성도 그만큼 더 확장되기에, 큰 화폭이 가져다주는 여백은 붓질만큼이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큰 화폭에서 일필일획을 그을 때 숨쉬기마저 멈추고 오로지 붓질에만 혼신을 쏟으며 여백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그녀는, 멈췄던 숨을 내쉬는 순간 여백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확인하는 동시에 화면에서 우러나는 강렬한 기운의 극대화를 통한 희열을 즐길 것이다. 붓을 놓는 순간의 희열감이 클수록 큰 붓질에 의한 자유의지력의 확장에 대한 욕구도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러한 희열감이 작업의 결과물을 바라다보는 감상자들에게 신선한 감동으로 전치되는 것이다.//박은주//

장소 : 아리랑 아트스페이스(밀양)
일시 : 2019. 3. 14. –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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