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희展(피카소화랑)_20190828

//작가노트//

나비에 관한 내 생각의 여정(旅程)

인간은 태어나 한 生을 간다. 그 길을 가면서 만나는 많은 장면들 속을 徘徊하고 꿈꾼다. 나비의 날갯짓은 그 장면들 속에서 배회하고 꿈꾸는 나의 모습이다. 젖은 날개로 풍랑의 바다를 건너면서도 멈추지 않는 것은 나를 거듭 태어나게 하는 꿈이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3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당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 마이다네크(Maidanek)의 수용소 벽 가득히 새겨진 나비그림을 보고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것은 죽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하듯 다시 태어나는 還生의 의미, 어떤 형태로든 다음 생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꿈, 삶에 대한 의지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 글을 읽고 나는 내가 맞닥뜨린 이 세상의 벽과도 같은 막막함을 견디어낼 수 있는 어떤 큰 힘 같은 것을 떠올렸다.

나비에 관한 내 생각의 여정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그 후 이 작고 연약한 곤충에 관한 내 생각들은 다양하게 변용되고 발전 되었다. 나의 나비는 그 작고 미세한 날개의 떨림으로 죽음의 골짜기에서 스스로 날아오르고자 하는 구원의 표징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젖은 날개로 폭풍의 바다를 하염없이 건너가는 희망의 손짓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미세한 어떤 것의 힘, 그 가장 작으면서도 근원적인 힘이 가지는 무한함을 나의 나비는 이야기한다. 인간은 스쳐지나가는 무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순간 낚아채듯이 건져 올리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카메라 너머를 끊임없이 응시하다가 한 순간에 셔터를 눌러 피사체의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듯이 그림 또한 전광(電光)처럼 스치는 의미 있는 어느 순간을 잡아서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봄날에 부는 바람은 겨울을 견디어 낸 뭇 생명들이 스스로를 일으키려고 요동치는 몸짓이다. 그 에너지의 최극점에서 꽃은 피어난다. 알에서 애벌레로 그리고 번데기를 거쳐 탈각(脫却)을 하고 마침내 날개를 펴는 나비의 우화(羽化)는 억겁을 견딘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그 간절한 시간의 길을 나는 그림으로 나타내려 한다.

어느 배우가 쓴 책에서 읽은, ‘시간을 쌓아가는’이라는 말에 마음이 꽂힌다. 그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 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것뿐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배우의 연기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다. 그에게 연기는 한 때의 인기, 스타로서의 반짝임,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에 거쳐 자연스럽게 그의 내면에서 녹아 체화(體化)된 숙성된 시간이다. 나에게 그림은 그런 의미이다.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기도와 함께, 그림은 그 모든 고단함 속에서 내가 견디어 올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힘이다.

그림은, 그것을 통하여 내 영혼의 성장을 조금씩 쌓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어떤 생각과 느낌을 떠올리고 평면 위에 그 생각과 느낌을 조금 씩 조금 씩 구현해 본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저 너머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아 놓으려 애쓴다. 그리고 평면에 한 획으로 슬쩍 던져 놓고 그 한 획을 화두(話頭)삼아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선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공(空)의 간(間)을 더듬어 가며 나의 길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 공간에서 어렴풋이 나만의 어떤 느낌을 찾아 칠하고 뭉개며 가다 보면 의도한 것이 아니지만, 새로운 길을 또 찾아들고는 한다.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며 나를 찾아가는 길, 그것이 나의 그림이다.//작가노트//

장소 : 피카소화랑
일시 : 2019. 8. 28. –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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