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Ⅰ. 화가 김대윤과의 조우
2004년 봄이었던 것 같다. 피카소화랑의 이 층 전시장에 못 보던 그림이 있었다. 언뜻 비구상처럼 보였던 그 그림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심어진 한 농장의 묘목들에 설치된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뿌려지는 장면이었다. 화면 전체의 분위기도 그러했거니와 특히 수도 파이프에서 분사되어 떨어지는 물줄기의 나이브한 표현방식은 최근의 부산지역에서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낯설음은 다른 곳에서 보았던 유사한 느낌을 연상되며 곧 사라졌다. 미술사적 큰 줄기를 바꿀 만큼의 이형(異形)이 아니라면 웬만한 표현은 기억나게 마련이다. 어딘가에서 한번 봤던 것 같은 회청색의 수도 파이프와, 거기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와 낙하하는 물의 줄기와 덩어리가 중간쯤 공중에서 멈추듯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그 장면은 곧 땅 위에 떨어질 물줄기가 보는 그 시간에 정지되어 있다가 보는 사람의 목구멍과 가슴으로 흘러내릴 것 같다는 연상작용을 일으켰다. 사실적 회화기법에서는 통용되기 어려운 절제된 투박함을 만화적 기법으로 마무리하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중의 물이 땅에 닿는 모습을 정확히 그려진 회화작품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작가는 아마도 적당히 메마른 누런 땅 위에 펼쳐진 초록의 잎사귀 위로 물 보따리라도 던져주고 싶었던 것일까. 파란 하늘이 지평선으로 화면의 상부를 가르고 아래쪽은 기하학적으로 구분된 짙은 녹색의 작은 식물들은 줄을 지어 서 있다. 투박한 나열과 사물의 단순화가 주는 적막함. 나는 순간적으로 이 낯섦의 정체는 또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추적했다. 그러자 십여 년 전 유학 시절 서부 호주 미술관에서 보았던 거대한 호주 원주민 회화가 떠올랐다. 거대한 황무지에서 굴러다니는 부시(bush: 풀덤불)의 덩어리 들을 점(點)처럼 띄엄띄엄 찍어 놓던지, 혹은 굵거나 짧은 선들로 자연의 절대적 존재를 단순화했던 호주 원주민의 민속화를 연상케 했다. 거기엔 물론 데이비드 호크니식의 붓질과 파아란 색의 하늘 뒷배경 공간도 그 낯선 감정 속에 같이 숨어 있다. 호주 원주민 회화는 사물의 표현을 기호화 내지는 단순화 생략 화하면서 마치 20세기 현대 모더니즘 회화를 보는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다면 이 화가의 그림은 비구상도 구상도 아닐 것이다. 사실 구상, 비구상으로 둘을 이런 식으로 구분 짓는다는 행위도 무의미할 것이지만…. 그래도 이게 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가만히 보니 그 나무들 사이로 사람이 하나 보였다. “구상화는 맞는구먼.”
어딘가에서 본 듯한 느낌은 식상함과 연결될 때도 많지만 반대로 익숙함과 정다움으로 안착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림 속의 사물은 기하학적인 규칙성으로 화면 전체를 배치하고 있지만 세부를 결정짓는 붓 터치는 전혀 딴판이다. 구체적이지만 세밀하지 않았고, 뭉툭하지만 날카로움을 머금고 있다. 생략과 과장이라는 대립한 기법이 하나의 사물을 표현하는 선에 함께 들어 있다. 급기야 서로 대립 되는 감정의 흐름을 스스로 추스르게 하는 감각적 공격을 화면 전면에 폭발시키듯 흐르게 하여 감성과 감정의 무장해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어떻게 이런 정제 되지 못한 몇 번의 붓질로 실제 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느낌의 풍경화를 그려질 수 있는지 나는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그 작가가 적극적으로 궁금해졌다.
김대윤은 대구 사람이며 영남대를 졸업 했고, 다행히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직장과 작업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의 작업장에서 약 200호 크기의 작품을 본 순간 그것은 그의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른바 강렬한 모더니즘 형식의 반(半)추 상적 표현은 당시 부산 작가 중에서는 흔치 않았고 한국미술 전체로 보아도 많지 않았다.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1980년대의 민중미술의 시대에까지 내려가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제 그 시절의 미술을 하나의 영역으로 구분 짓는다는 것이 미학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했던 터이다. 자연히 그의 초기작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의 초기작부터 미술관이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직업적 심리가 솟아올라 억지로 보자고 졸랐다.
이미 제작한 지가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고 보여주길 주저했다. 물론 작품이 크기도 했거니와 여러 중, 대형 캔버스들 제일 뒤에 있어 꺼내기도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 그림은 앞으로 나왔고 그는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화면을 마른 수건으로 쓱쓱 털어내었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그 그림의 첫 번째 인상은 독특한 구도였다.
넓은 중앙은 비어있고 오른쪽 아래 에서 물체들이 연극 무대에 등장하듯 배치되어 있었다. 검거나 어두운 바탕에 사람들과 동물들이 힘차게 놀고 있는 장면은 마치 앙리 루소의 ‘정글들’을 연상케 하며 신비로운 역동성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말했으며 부산시립미술관의 소장품 구입공고가 나오면 신청을 꼭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이 말은 후에 엄청난 비극적 결말로 끝나고 만다. 그해 가을 인가 이듬해 봄이었든가 김대윤의 그 작품이 소장품 구입 심의에 올라왔고 심의 결과는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바로 한 순위 앞에서 떨어져 버렸다. 나는 며칠 후 전화로 섭섭한 심정을 전하였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가는 동안 타지에서의 전시 소식 등 나름의 긍정적인 활동상황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시내의 한 화랑에서 그를 만났다. 인사 끝에 작품 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에 다시 한번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 대답이 시원하지 않아 다시 한번 말을 하자 “인자 몬합니더, 그 그림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자꾸 안 좋아져서 그냥 다 찢어서 버렸습니다.” 내 대답은 “머라꼬요?”였다. 그는 조금 더 설명을 더 붙였으나 거의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작업을 하는 느낌이 들어 자기는 홀가분하고 시원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그는 소장품 구입신청조차 하지 않다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다와 사람’이 부산시립미술관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9년에야 이루어졌다. 찢어버렸다던 그 작품은 사진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시 보고 싶기도 하지만 고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마음이라도 전하는 수밖에.

Ⅱ. 김대윤의 사실주의
김대윤은 꽃이 있는 정물화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인물과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여있거나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군상들을 자주 그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감자를 같이 먹고 해운대나 일광 해변에 와서 놀며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자주 간다. 혼자서 혹은 둘이서 쇼핑을 하거나 데이트를 한다. 그러다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열정적으로 끌어올리고 친구와 술을 한잔 하기도 한다. 이렇듯 평범한 부산의 바닷가 근처에 사는 대도시 소시민의 일상적 모습들이지만 그 모습들은 절대로 범상하지 않다. 그의 인물묘사는 거칠지만 부드럽고, 우악스럽지만 정답고 지저분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 밝고 화려한 색상은 어둡고, 칙칙하며 정리되지 않은 붓질 위에서 높은 명도 차의 명징함으로 빛난다. 특히 그의 ‘꽃’ 그림은 세련된 화려함이 화면 전체로 번져서 폭발하는 에너지로 발산된다. 앞서 밝힌 서로 대립하는 감정으로 읽히는, 혹은 우리의 뇌는 김대윤이 독특하면서도 강한 색상과 형태에 깊고 강한 울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소 외람되긴 하지만 필자에게는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는 느낌과도 같은 높은 수준의 은유와 절제미를 맛보는 즐거움을 준다. 이 아니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친 붓질과 불분명한 윤곽선이 난무하여 놀랄 만큼 화려하지만 숨을 멈추는 곳이 어딘가를 알게 해준다. 색채와 붓질에 놀란 눈길(시 지각)이 길을 잃고 방황하다 머무를 그곳을 발견해내는 것 이다. 그런가 하면, 낮은 채도로 뭉개 버린 사람의 얼굴들은 풍부하며 사실적인 감정으로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다. 참으로 ‘그림 읽기’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그의 인물들은 사람들의 오만 갖가지 사연들을 그림으로 써놓고 있다. 왜냐하면, 그림도 지금 보는 것처럼 읽히니까. 붓질을 따라가며 그림을 보는 극적인 전개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화가에게 창작과정은 해석과정이기도 하지만, 감상자에게는 해석과정이 창작과정이기도 하다.
작가는 거의 감각적 본능으로 색을 섞고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선을 그어 대는 과정일 것이지만, 그 흔적을 보는 사람은 그 결과물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보게 되면 시신경과 뇌 신경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결합을 이루려면 대상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반응에 기초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시 지각은 대상의 전체적인 특징(모양, 질감 등)을 빠르게 훑어서, 이미지의 모든 유용한 기초속성들을 한꺼번에 시각 신호로 바꾼다. 이때 형상과 배경을 구분해주는 색깔·크기, 방향 같은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뒤 이에 관한 정보의 재평가 과정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는 해당 맥락과 무관한 행동이라고 지각된 세부사항은 무시되고, 변하지 않는 특징들을 뽑아내고 과거에 접했던 이미지들을 서로 비교 결합하는 과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들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것만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 그 자체를 하나의 창작과정으로 결론 짓고 있다. 단순한 하나의 사물을 보았을 때도 이러한 과정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데 하물며 시각적 변화가 큰 회화작품들을 볼 때면 이 작용들은 더욱 활발할 것이다. 김대윤의 작품들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작품을 보고 재해석하기가 상당히 쉬운 편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감각적 이해는 반 고흐(V.B.Goch)나 데이빋 호크니(D.Hockney)의 작품처럼 익숙한 사물의 새로운 해석이 크게 낯설지 않은 편안함으로 변형되는 감정의 치환과도 유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너무 추상적이거나 개념성이 강하거나 여러 겹의 은유로 위장된 미술에는 경계가 심하다. 하지만 한두 꺼풀 덮인 은유성을 감지하고 자신의 감정과 공감한다고 느끼는 것은 숨겨진 진실을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알아냈다고 때 느끼는 희열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리고 그 순간 작가와 자신이 통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이 작품 속 숨겨진 내면의 미감을 발견했다는 성취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미술을 일상언어로 잘 사용하지 않는 일반인이 은유와 비유와 상상으로 묶인 장막을 온전히 그의 힘만으로 걷어내는 행위는 예술적 성취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김대윤 회화의 사실성이 대중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결정적 이유다.
김대윤의 그림은 일단 무엇을 그렸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인물의 얼굴색이나 눈과 코의 형태는 비정상적으로 그으진 듯하지만 적당한 범위 안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표정과 색상과 명도 차와 채도 차로 조화된 감정을 가지고 다시 한번 세부의 묘사를 보게 된다. 수많은 자신만의 에피소드와 그림 속의 이야기가 서로 뒤섞여가며 흐른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쯤이면 김대윤의 작품은 이미 보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형태와 색깔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강조하여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힘있게 잡아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세상사의 여러 가지 모습이 참으로 실감 나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것 같지만 이 정도로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을 마무리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 속에 때때로 등장하는 글귀들이 있는데 그 글귀들은 마치 지금 들으라는 듯 자꾸 마음이 쓰인다는 점이다. 2019연작 ‘쇼핑2’ 는 비교적 큰 작품인데 슈퍼마켓의 한쪽 진열대 끝에 한 쌍의 남녀가 겹치듯 서 있다. 여자의 가슴에 안고 있는 책등에 “Who am I”라고 쓰여 있고, 2016연작 ‘레드카펫’에는 “life is gold”가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굴러가고 있다.
Ⅲ. 마지막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런저런 연유로 나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이 2004년부터 11년 정도 이어졌다. 그 10여 년간 그의 작업과 작품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과 변화를 계속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오리지낼러티가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인 2015년 나는 미술관을 사직했다. 미국에 있는 3년 동안은 간간이 간접적 경로와 거의 사용하지 않는 SNS를 통해 소식은 알고 있었다. 작업과 아트페어 개인전시 관련한 소식도 제법 자주 들려왔다. 워싱턴 디씨 스미스 소니언 미술관과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벤 샨(Ben Shan, 1898~1969)과 디에고 리베라(Diego Libera 1886~1957)들의 작품 들을 보며 그를 떠올렸다. 유럽을 여행하며 다시 보게 된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볼 때도 그가 생각났다. 3년 만에 돌아온 2018년 그의 작업실은 대형 작품들과 아트 페어 준비 등으로 인한 빈 캔버스와 물감들로 풍성했다. 못 보던 오디오와 스피커와 몰라보게 늘어난 LP들도 보였다. 미국에서 사서 선물이라고 가지고 간 LP2 장을 든 나의 손을 무색게 했다. 그림이 제법 팔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이 페이스로 몇 년간만 더 지나면 상당히 겐찬겠네요.” 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버티면’이라고 했는지 ‘지나면’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그런데 그가 “버티는 긴지, 지내는 긴지는 지나 봐야 아는 거 아이겠소”라고 했던 것 같다) 2023년 불시에 저질러진 사고로 생전 처음으로 종합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그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어디서 돌아다니던 새가 날아들 듯 내 전화기의 대화창에 찍혀있었다. 그 전 전해에 늦게 전해 들었던 그의 발병 소식을 듣고 겨우 그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겨울이었다. 작업실은 거의 가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집에서라도 그린다며 이젤 위에 아직 덜 마른 듯한 작품이 한 점 있었다. 강렬함은 사라졌지만 따뜻함은 남아 있었다. 풀어진 붓의 터치와 스트로크를 보며 모네의 말년작들이 떠올랐다.
2019년에 출간된 그의 화집 첫 장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린다 –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물론 이 글은 그가 처음으로 조합한 단어들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밝힌 쉼보르스카의 시 한 구절이다. 그런데 왜 하필 사라진다고 써놓은 마지막 구절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화가 김대윤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라치면 나는 자주 그와의 첫 만남과 인연들에 대해 자랑하듯 이야기한다. 그와 알고 지냈던 20년이 이제 그림들로 남아 있다.//이상수//
장소 : 피카소 화랑
일시 : 2025. 8. 1 – 8. 3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