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서문//
잠깐의 집, 잠깐의 감각 : 정은율의 회화 속 임시 거처들
정은율의 회화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대신 그곳에는 ‘감각’이 머문다. 디지털 드로잉과 유화라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기억, 머물렀다고 착각한 공간, 혹은 아예 가볼 수 없는 장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논알콜 파라다이스’와 ‘커밍타운’의 집들은 유리벽과 회전목마, 롤러코스터와 수영장 같은 장식적 환상을 품고 있지만, 그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것은 기능 없는 장식이자 욕망의 은유이며, 우리가 소비하는 ‘환상의 주소’에 가깝다.
‘그린뮤지엄’은 더욱 침잠하는 감각으로 나아간다. 식물의 형상을 극도로 단순화하거나 해체하고, 화면 일부에 버밀리온과 같은 인공적 색면을 삽입함으로써 ‘진짜 자연’이 아닌 ‘자연을 박제한 감정’을 회화화한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위로를 소비하는 구조 자체를 감각하게 만든다.
정은율의 화면은 결국 ‘잠깐 머무는 감각’의 장소들이다. 도시는 기억 속으로만 존재하고, 집은 허구이며, 풀숲은 감정의 흔적으로만 남는다. 작가는 우리가 잠시 기대었다 가는 임시 거처, 일상의 공간이 아닌 감각의 공간을 쾌활하고 밝게 터치한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는 진지하다.

//작가 노트//
Temporary Residence – 잠깐의 집’
나는 현실 너머의 장면들에 관심이 있다. 합리나 기능보다는 감정이나 욕망의 흐름이 먼저 지배하는 장소들, 사람들이 마음속에 그리는 ‘잠깐의 집’들이 그렇다.
‘논알콜 파라다이스’는 그런 마음의 공간들을 도면처럼 그린 시리즈다. 실현 가능성이나 실용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각자의 취향대로 짓는 상상의 집들이다. ‘커밍타운’에서는 더욱 과장된 환상들이 나온다. 움직이지 않는 놀이기구와 정지된 유희, 곧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 이 모든 환상은 그 자체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품고 있다.
‘그린뮤지엄’은 회화로 구현된 ‘감정의 식물원’이다. 식물의 형상을 일부 남긴 채 추상화하고, 버밀리온으로 인공의 흔적을 남긴다. 풀과 콘크리트, 휴식과 불안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이 작업은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감각만을 충족하고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이번 전시는 나의 여러 시리즈를 하나의 감각적 주제로 엮는다. 도시는 인상만 남긴채 사라지고, 집은 환상으로만 존재하며, 숲은 감정의 흔적으로만 남는다. 이 전시는 내가 그려온,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임시 거처를 보여준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 흐림, 상상 공간의 무한 확장이 삶을 응시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비평//
감각으로 지어진 집들 — 정은율의 ‘템포러리 레지던스’ _ Min K. Park
정은율은 늘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그린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그의 화면 속 장면들은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마치 우리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었던’ 공간처럼 느껴진다. 실제보다 감각적인, 실재보다 더 정서적인 풍경들인 까닭이다. “감정의 거처”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색해온 주제다. ‘템포러리 레지던스, 잠깐의 집은 바로 그 감정의 집, 감각의 정류장을 가리킨다.
정은율의 드로잉과 회화는 도시의 표정을 재구성하거나, 이상적인 집의 이미지를 과장해 배치하거나, 식물의 형태를 추상적으로 해체하는 방식이다. 디지털이든 유화든 그의 작업은 하나같이 사실의 모사가 아닌 감각의 구성에 집중한다. 그가 묘사하는 공간들은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우리의 내면에 박힌다.
도시를 걷다가 느꼈던 공기의 결, 무리한 색조로 재조합된 풍경들(화이부동), 수영장이 거실 앞에 있고 롤러코스터가 주방을 통과하는 이상한 구조의 집들(논알콜 파라다이스, 커밍타운), 초록의 밀도와 물성만으로 자연을 소환하는 숲의 추상(그린뮤지엄)까지, 정은율의 작업은 우리가 ‘머무르고 싶지만 머물 수 없는 곳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물리적 주소가 아닌 감정의 좌표에 존재하는 집이다.
이러한 비현실적 풍경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거기엔 자본주의 도시화, 주거의 이상과 현실, 자연의 이미지화 같은 복합적인 질문이 깔려 있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 실재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의 세계다. 정은율의 집들은 더 이상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도록 디자인된 환상’ 그 자체다. 그것은 현실의 복제물이 아니라 현실을 숨기는 감각의 모델이다.
또한 그린뮤지엄 시리즈에서 우리는 자연의 묘사가 아닌 ‘자연에 대한 감각’을 마주한다. 선명한 녹색과 덩어리진 필치, 화면을 가득 채운 수직적 리듬은 식물의 형태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풀과 이파리의 기운, 숲의 밀도, 여름의 습기를 감각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감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내면의 풍경을 외화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물리적인 자연을 그리는 대신 그에 대한 우리의 상상과 욕망을 붙잡는다. 이 감각의 세계는 겉으로는 유희적이고 아름다우며 힐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더 복잡하다. 관객이 마치 숲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실은 자연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방식을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뭇잎 대신 회화가 걸려 있는 풍경, 초록의 생명력 대신 붓의 흔적만 남은 캔버스. 작가는 우리가 점점 더 진짜 자연이 아닌, 자연을 흉내 낸 이미지들 속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는 점을 조용히 지적한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정은율의 작업 방식이다. 디지털 드로잉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마우스를 이용해 선을 그리고 색을 채우는,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유화 역시 캔버스 위에 몸의 리듬을 새겨가며 색을 쌓아 올리는 회화적 노동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손의 시간’으로 이루어진 그의 그림들은 비현실적인 풍경을 가장 진실한 감각으로 전달한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는 현실은 정말 현실인가? 혹은 지나치게 잘 꾸며진 감각의 허상은 아닐까? 템포러리 레지던스는 그 질문의 공간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답이다. 우리는 그가 그린 집들 속에 잠시 머물고, 감각의 여운 속에서 다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Min K. Park//
장소 : 갤러리 재희
일시 : 2025. 8. 2 – 8.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