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향展(몽고트 갤러리 청담)_20260418

//전시 소개//
이미향 작가에게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유와 감각이 태어나는 근원적 장소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이 지닌 모든 소재는 작가에게 연필이자 스케치북이 되었고, 그 경험은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오늘의 회화 세계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자연을 향한 이 원초적 감응은 현재 전시 중인 ‘산색’ 연작에서 더욱 깊고 밀도 있게 드러난다.

‘산색’은 산의 형상을 재현하는 작업이기보다, 산이 품은 시간과 기운,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내면에 남긴 정서를 색채와 물성으로 환원해내는 작업이다. 작품에 나타나는 풍부한 텍스처와 감각적인 컬러는 자연의 표면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고, 풍경을 매개로 한 내면의 울림을 시각화한다. 그 결과 화면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깊은 에너지를 품는다.

그러나 그 고요는 연약한 침묵이 아니라, 오래 응축된 감정과 사유에서 비롯된 단단한 울림이다. 그래서 그녀의 회화는 조용히 다가오지만 깊게 남고, 보는 이에게 마치 한 조각의 고요를 선물하듯 마음의 결을 어루만진다.이미향의 ‘산색’은 자연을 바라보는 회화이자, 자연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회화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풍경을 소비하는 시선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어 색의 호흡과 결의 떨림을 따라가게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산을 보는 동시에, 스스로의 고요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평론//
19세기 후반 파리,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영사기를 돌렸을 때 관객들은 스크린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고 전해진다. 움직이는 이미지 앞에서 인간이 처음 경험한 원초적 공포와 경이로움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파노라마 영화의 힘은 속도가 아니라 ‘기억의 재구성’에 있다. 영화는 낱낱의 프레임이 모여 이야기가 되듯, 한 장 한 장의 필름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삶이 펼쳐진다. 이미향 작가의 화폭 앞에 서면 나는 그 오래된 영사기 앞에 다시 선 느낌을 받는다.

멀리서 바라보면 이미향의 작품은 단색화의 정제된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화면은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 보인다. 무수한 겔미디엄의 투명한 사각형 블록들, 그 아래로 아크릴 물감이 층층이 쌓여 만들어낸 울퉁불퉁한 지형—이것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하나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다. 작가는 물감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퇴적시킨다.

작가가 아크릴 물감의 강렬한 발색 위에 투명한 겔미디엄 조각을 하나하나 올리는 행위는, 인간의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물질적 언어로 정확하게 구현한다. 겔미디엄은 투명하지만 두께를 가진다. 그것은 내용물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보호하고, 왜곡 없이 전달하되 그 자체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이는 기억이란 것이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정으로 굴절되어 재현된다는 사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이 물성의 특성이 각 작품마다 전혀 다른 감정적 온도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붉고 노랗고 파란 원색들이 격렬하게 춤추는 작품은 어린 시절 마당에서 맨발로 흙을 밟던 그 생생한 감각처럼, 기억의 원형질을 뜨겁게 분출한다. 반면 차갑고 투명한 겔미디엄 블록들이 흰 눈처럼 쌓인 작품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 바라보는 추억의 서늘한 아름다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감정이 조용히 번진다. 그리고 파란 계열이 지배하는 대형 횡렬 작품과 청록빛 정방형 작품들에서는 마치 바다 위에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듯한 원경의 고요함과 깊이가 동시에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나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기억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베르그송은 그의 저작 『물질과 기억(Matière et mémoire)』(1896)에서 인간의 기억을 두 층위로 구분했다. 하나는 반복된 행동이 몸에 각인된 자동화된 ‘습관 기억(mémoire-habitude)’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특정 순간이 이미지로서 의식 속에 보존된 ‘순수 기억(souvenir pur)’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의 현재는 늘 과거의 기억들이 밀려들어오는 ‘지속(durée)’의 흐름이며,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풍경을 바라볼 때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지각과 겹쳐지며 공명한다고 보았다.

이미향의 화면이 바로 그렇다. 겔미디엄 블록 하나하나는 순수 기억의 단편들이다. 어느 날의 햇살, 어느 저녁의 노을, 기쁨의 한 순간, 이별의 한 순간… 그것들은 각자의 투명한 용기 안에 봉인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넘어 서로 스며들고 연결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수백, 수천 개의 블록은 결국 인간이 평생에 걸쳐 축적하는 ‘기억의 총체적 지형도’로 해석된다. 우리가 그 앞에서 멍하니 서게 되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기억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전시를 기획한 장은미 아트디렉터는 이 작업을 두고 “감각의 기억이 화면 위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그리고 그 리듬이 관람자 각자의 기억과 어떻게 공명하는지”에 주목해달라고 전한다. 이미향의 화면에서 리듬은 음악처럼 작동한다. 반복되는 사각형의 패턴은 마치 4/4박자의 심장 박동처럼 일정한 템포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색의 강약과 겔미디엄의 두께와 투명도의 변주로 즉흥적 불규칙성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재즈의 구조와 닮았다. 기본 코드 진행은 지키되, 그 위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즉흥 연주처럼 말이다.//이상민 미술인문 작가, 한국작가후원연대 이사장//

장소 : 몽고트 갤러리 청담
일시 : 202. 4. 18 –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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