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여는 글//
우리의 가까이에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예감, 꿈과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형상, 가장 사적인 공간에 감추어진 상처처럼 그것들은 일상의 일부처럼 곁에 머문다. 너무 가까이 있어 익숙해진 것들은 때때로 가장 ‘흔한 적’이 된다.
그러나 흔한 적은 사라진 뒤에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그것을 잊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남겨진 감정과 기억, 상처와 시선 위에서 살아간다.
‘흔(한)적’은 ‘흔한 적’과 ‘흔적’이라는 두 의미에서 출발한다. 강윤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불안과 예감을, 김세림은 꿈과 기억처럼 선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형상과 감각을, 김주은은 사적인 공간에 감추어진 폭력과 상처를 바라본다. 서로 다른 세 작가의 회화는 쉽게 설명되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을 붙잡는다.
‘낭만!처음,전시.’는 자신의 작업세계를 만들어가는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전시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관객과 처음 또는 새롭게 마주하게 하는 낭만시간연구소의 공모 프로그램이다.
이번 ‘흔(한)적’에서는 세 작가의 서로 다른 시선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흔한 적을 가까이에 두고, 그것이 남긴 흔적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지나쳐왔고,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낭만시간연구소 여수현//

//강윤주 작가노트//
나는 늘 경계에 시선을 두고 그림을 그린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공기와 선택을 앞둔 머뭇거림,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과 예감의 감각에 관심을 두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특별한 이유 없이 긴장하거나,
곧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각은 명확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곤 한다.
나는 그러한 순간에 머무르며,
표면 아래 잠겨 있는 기척과 감정들을 화면 위에 붙잡아두고자 한다.
작품 속 장면들은 어딘가 어긋나 있고 긴장감을 품고 있지만,
표현은 오히려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한다.
직접적인 사건이나 극적인 서사보다 그 이전의 상태,
아직 결론 나지 않은 순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는 불길함과 아름다움, 불안과 적막이 동시에 자리하며,
서로 다른 감각들이 하나의 장면 안에서 공존한다.
나에게 회화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오래 바라보기 위한 방식이다.
나는 화면을 통해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순간들을 붙잡아두고
그 안에 머무는 불안과 예감, 그리고 경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김주은 작가노트//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위계적 폭력은 은폐를 동력 삼아 생존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복기하고,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드러날 때 느껴지는 수치심을 회화적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다.
고통의 원인을 향한 사적인 분노나 슬픔보다, 그 고통의 흔적이 외부의 시선과 부딪힐 때 발생하는 수치심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신체에 남은 멍이나 부서진 집 내부의 흔적은 사적 영역에 머물 때보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목격되는 순간 수치심으로 치환된다.
집은 사적 영역에서 일어난 폭력과 사건들을 지켜보고 기억하는 인격화된 목격자로 작용한다. 보이지 않는 시선을 가시화하기 위해 손전등 같은 인공광을 사용하여 빛과 어둠을 소재로 다룬다. 감추고 싶은 사적 영역의 폭력과 고통은 역설적으로 노출되어야만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을 비추고 흔적을 기록하여 회화로 옮기는 모든 행위의 주체는 나이다.
이 공정 속에서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자 방관자가 되는 다층적인 체화를 경험한다. 캔버스 위에서 인공적인 빛으로 상처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행위는 침묵을 유지하던 사적 영역을 발언할 수 있는 공적 장소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개인의 고통을 끌어냄으로써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연대의 장으로 작동하고자 한다.
//김세림 작가노트//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자취를 남긴다.
그 자취는 분명한 모양으로 남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금방 사라지거나
사라진 줄도 모르는 작은 흔적에 가깝다.
세상은 잘 짜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사물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다. 서로 얽히고 맞물리며 살아가지만 퍼즐처럼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맞춰질 듯하면서도 맞지 않는 상태로 각자의 자리를 지나간다. 그 어긋난 틈에는 이상하게 눈길이 머무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물건, 스쳐 지나가는 장면, 체취, 어떤 사람의 행동과 공간의 분위기. 오래 바라본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단 1초였더라도 눈길을 붙잡았다면 하나의 기억으로 남는다. 작업에는 그렇게 끌렸던 감각들을 담았다.
이러한 것들은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없어져도 일상이 크게 달라지
지 않는 장면들이며,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지나치는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눈길을 끌었다면, 쉽게 흘려보내기보다 하나의 방식으로 기억해두고 싶었다. 사소한 것을 특별한 것처럼 과장하거나 억지로 거창한 의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무엇을 보았고, 무엇 앞에서 잠시 멈추었는지를 솔직하게 남기고자 한다. 하나하나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런 것들이 쌓여 한 사람의 시선과 삶의 모양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상을 바라본 흔적이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장소 : 낭만시간연구소
일시 : 2026. 8. 8 – 8. 23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