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
“엄마의 선물이죠, 그림은”
2019년 10월, 오십 대 후반에야 처음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은 후 7년째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남인목 작가를 만나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하는 작은 공원을 들어서며 까르르까르르 웃는 작가는 오래된 식당 마당에 핀 채송화에 마음을 주기도 하고, 자동차 번호판 하나에 시선을 주기도 했다. ‘웃는 나무’ 작가의 작품 앞에 서지 않아도 웃는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있는 듯했다.
Q. 작가님에게 그림은 엄마의 선물이라 하셨는데, 자세한 사연이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인형 그리기, 뜨개질 등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좋아했어요.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언니가 성악을 전공하는 걸 못마땅해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선뜻 말씀을 드리지 못했죠. 예술을 사랑하지만 무척 엄하고 보수적인 분이 저희 아버지셨어요. 제가 지레짐작으로 미대 얘긴 꺼내지도 못한 거죠.
글 쓰는 것도 좋아하다 보니 국문과에 가게 되었는데, 늘 마음속에는 ‘나이가 들면 그림을 그려야지’ 했던 것 같아요. 결혼 후 남편 직장 때문에 타지에 살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고, 제가 직업을 갖기도 했어요. 일도 참 열정적으로 하고 성과도 좋았어요.
그러다 2015년 친정엄마를 모시게 되면서 서서히 일을 놓아버렸죠. 엄마가 연로하시니까 집에 있는 걸 좋아하시고, 저도 덩달아 엄마 곁을 지키느라 사회생활을 접게 된 거예요. 마지막 2년은 병원에 계셨어요. 매일 도시락을 싸서 엄마를 보러 갔었죠. 밥 드시게 하고 양치시켜 드리고, 몸 닦아 드리고 했어요.
2019년 7월 엄마가 돌아가시고 마음이 엄청 힘들 때, 수십 년째 받아보던 일간신문 사이에서 부산문화회관 아카데미 안내문을 발견했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림 수업에 가게 됐죠.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그렸는데 형체가 만들어지고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어요.
엄마는 책을 좋아하는 신여성이셨어요. 항상 저를 지지해 주시면서 “너는 할 수 있다”, “잘한다”, “여자도 진취적으로 생활을 해야 된다”, “니 하고 싶은 걸 해라”, “니 뜻을 펼쳐라”라는 말씀을 평생 하셨어요. 나이가 들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제 꿈이 엄마의 부재를 통해 이루어진 셈이에요. 꼭 엄마가 주신 선물 같아서 더 꾸준히 그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네요.
‘드로잉, 그로잉’, 어머니를 여읜 남인목 작가가 부산문화회관 아카데미에서 운명처럼 만난 첫 그림 수업이다. 가르치는 분이 연필 드로잉으로 유명한 김은주 작가님이라는 것도 모른 채 손도 그리고 잎사귀도 그리고 있는데, “제트기 한 분이 오셨네요.”라며 쓱 지나가시더란다. 그렇게 7년째 김은주 작가님과는 스승과 제자로 따뜻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Q. 그림을 그리기 전과 후의 작가님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지셨나요?
그림을 그리기 전의 제가 ‘밖’이라면, 지금의 저는 ‘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예전의 저는 밖을 위해서 살았던 것 같아요. 가족, 주변 사람들, 그리고…… 제가 좀 오지랖이 넓다 보니 저 자신보다는 주변을 더 많이 챙기고 살았어요.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제 안을 바라보는 시간, 저를 위한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게 제일 큰 변화인 셈이에요.
Q. 작가님의 ‘안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하셨는데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면이 있으신가요?
어릴 때부터 공부로는 밤을 새우지 못해도 뜨개질이나 손으로 뭘 만드는 걸 할 때면 밤을 새운 적이 많았어요. 좋아하는 일에 대한 끈기가 좀 있는 편이었죠. 요즘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걸 느껴요. 끈기 플러스 집요함, 그런 게 생긴 거예요. ‘집요’란 말이 좀 무섭잖아요. 호불호가 갈리는 말이라 해야 하나.
어떤 날은 추상 작업을 하면서 세밀한 꼭짓점 끝까지, 작은 점 하나밖에 안 되는 부분까지 채워 나가는 저를 보면서 제 스스로가 섬뜩섬뜩해요. “내가 이 정도까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혼잣말을 할 때도 있어요.
‘몹시 고집스럽고 끈질기다’가 ‘집요하다’의 사전적 의미다. 남인목 작가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집요함이 반갑고도 부러웠다. 작가의 고백처럼 어느 밤을 지새우며 캔버스 한구석을 채우고 있을 작가의 모습이 궁금했다.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이에게 섬뜩할 정도의 집요함이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머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늘 새로운 걸 하고 싶다는 중년의 작가는 이제 네 번째 개인전을 준비한다.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사와 오랫동안 마당에서 길렀던 토끼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첫 개인전 ‘손잡고 마실 갈래’는 토끼 그림들로 채웠다. 두 번째 개인전 ‘즉흥’은 밑그림 없이 즉흥적으로 그리는 작가의 성향을 그대로 닮았다. 지금껏 그림을 그려도 작가는 한 장의 그림도 버려 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다시 방향을 바꿔 그리면 그림이 살아나더란다. 세 번째 개인전 ‘고양이 99’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 개인전 ‘웃는 나무’다.
Q. 제가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싶은 거죠. 그냥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살아왔어요. 어차피 그림은 나로 들어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못했던, 묵힌 거, 쌓였던 거는 다 해보고 싶어요.
처음 오일파스텔로 그림을 그리면서 초록색 머리, 보라색 머리를 그리는데 희열감이 작열하는 거예요. 너무 재미있고 좋은 거예요. 노란 머리든 빨간 머리든 무엇을 칠하든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냥 ‘발산’인 것 같아요. 또 모르죠.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는 예측 불가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도 몰라요.
Q. 작가님의 작품 세계를 2~3개의 키워드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너지, 공감, 위로예요. 제 그림에는 꾸미지 않은 에너지가 있다는 말씀을 많이들 하세요. 잘 그리려고 애쓰지 않는 데서 오는 에너지라고요. 평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제게서 좋은 기운, 좋은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을 많이 들었어요. 이젠 제 그림에 그런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 같아요. 좋은 에너지를 전하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겠죠.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선사업가가 되어야겠다고, 고아원을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항상 제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는데 저한테 고민을 얘기하고 저에게 의지하곤 했죠. 제가 보호 본능 같은 게 있어서 어려운 사람을 그냥 못 지나치고 그랬어요. 고아원을 하고 싶던 제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제 그림을 보고 누군가 “기분 좋다”, “힘이 난다” 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나는 평생 남의 말을 들어 주며 살아야 되는 사람이구나. 내 말은 언제 하지?” 이런 생각. 남의 고민을 들어 주다 보니 제 얘기를 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그랬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제가 위로를 받아요. 제가 위로를 받고, 저의 위로가 담긴 그림이 다른 사람한테 공감을 주고, 제 에너지를 나누고…… 제가 비록 자선사업가로 살진 못했지만 그림으로 그걸 나누고 있잖아요. 그게 저는 너무 좋아요.
‘고양이 99’를 그리면서 생각이 많았다 한다. 여러 마리 도둑고양이들이 마당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걸 보고 무서웠던 어린 날의 기억 때문에 새끼고양이에게조차 마음을 주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기질은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고양이를 그리게 되었단다. 작가는 ‘이걸 갈무리 한다’고 표현했다. 고양이를 외면했던 마음을 씻는다는 생각으로 작년에 150마리 고양이를 그렸다고. 이젠 길고양이들이 작가 주변에 자주 머물다 간단다. 그때는 아껴 주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위로를, 작가는 그렇게 건네고 있었다.
Q. ‘웃는 나무’ 시리즈는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이번 전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나무를 좋아해요. 특히 큰 나무를 보면 편안한 위안을 받아요. 그냥 모든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나무에 묻힌 세월이 엄청난데,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잖아요. 그래서 나무를 한번 그려 봐야지 하다가, 재작년에 나무 기둥만 그려 놓고 작년에는 거기에 웃는 모습, 스마일을 그려 완성을 했어요. 2년에 걸쳐 첫 그림을 그린 게 씨간장처럼 돼서 ‘웃는 나무’ 시리즈가 나온 거예요.
이번에 새로 5점을 더 그렸는데, 그중에서 포스터에 실린 이 작품이 제일 애착이 가네요. 올해 저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작년의 과로 탓인지 입원할 정도로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위층의 누수로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해야 하는 일도 생겼고요. 예정된 전시 날짜는 다가오고 참 힘들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은 시간이 가면 해결되잖아요. 우리를 에워싼 환경들이 모래, 진흙으로 가득 찬 거친 환경일 수 있지만 그걸 밝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차피 저는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이런 환경도 다 좋게 해석을 하는 거죠. 나무도 제일 밝아요. 다른 나무보다 더 밝고, 또 웃는 색깔들도 다 이렇게 밝게 했어요.
Q. 계속 새로운 소재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신데, 다음에 꼭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 있으신가요?
제가 먹그림을 참 좋아해요. 작년에 고양이를 그릴 때나 요즘도 먹으로 드로잉을 많이 하고는 있어요. 이제 먹드로잉으로 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체력이 닿는다면 라이브 드로잉 같은 거 있잖아요. 먹을 보면 거친 느낌이 좋아요. 붓으로 획을 그을 때 붓이 갈라지면서 나오는 그 선들이 막 너무 좋아요.
남인목 작가를 직접 만나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작품만 보고서는 젊은 작가인 줄 알았다고. 사실 작가의 나이를 알고 있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나이와는 달리, 아니 나이와는 상관없이 너무 젊은 그림 때문에 매번 놀란다.
“제 속에 애가 있는 거 같아요.”라며 스스럼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남인목 작가는 기분 좋은 사람이고,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남인목 작가의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까르르까르르 웃게 되는 이유다.//이민영 그림놀이터 기자//
장소 : 18-1 갤러리
일시 : 2026. 10. 24 – 10. 3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