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展(갤러리화인)_20150918

자기 지시적 현현(顯現)-‘수묵스토리’의 경계들

미술비평 김영준

하기야 요즘 우리의 눈은 너무나 호강한다. 워낙 볼거리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듯 소위 ‘더 강한 것’을 찾아다니는 새로운 시각 유목민이 넘쳐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각대상에 따라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시각적 편차가 커졌다. 누구에게는 훌륭한 볼거리라면 또 다른 누구에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이 요즘의 볼거리 매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만족할 만한 훌륭한 시각적 볼거리로 딱 잡아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옛날에는 볼거리가 특화되어 있었다. 장터에 장돌뱅이도 볼거리였고 저잣거리 이름 없는 소릿꾼들도 볼거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비들의 수묵은 많은 평인들이 볼 수 있었던 물건은 아니었다하더라도 단연 최고의 볼거리였다. 서양에서도 화가들의 그림은 볼거리의 으뜸이었다. 결국 그림이라는 것, 좀더 구체화하면 재현된 이미지라는 것이 대단한 심적 자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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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가 대단한 볼거리라고? 지금 누군가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그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수묵이라 하면 벌써 고리타분한 옛날냄새 풍긴다거나, 소극적 내지는 수동적인 인상이라 요즘과 같이 비트가 빠르고 강한 시대의 말초시신경을 자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매체라는 것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방기할 생각도 없다.
이제 보수적이고 수구적 이미지 때문에 ‘수묵’이라는 매체에의 관심마저 외면당하는 세태를 보면 안타깝다. 물론 수묵행위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볼거리이면에 훨씬 숭고한 원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선비들의 수묵행위는 사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기보다 도를 닦는다든지 수행이나 훈육, 성찰에 가까웠다. 언제부턴가 그러한 원기능은 자취를 감추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 소위 미술이 되 버린 것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수묵이 미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원목적에 이율배반이라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요즘과 같은 수묵의 인기 절하가 가치 절하와 동의어가 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이미 미술이 되어버린 이미지로서의 ‘수묵’은 어때야 하는가? 과거의 자기성찰의 원기능 환영을 반영해야하는가? 아니면 미술에 충실한 ‘이미지’이면 되는가? 아마도 한국화 화가들이 이런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해왔으리라 짐작한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김현철의 수묵이다. 좀더 확장해서 말하면 수묵이 모티브이자 기법자체인 그림을 보고 있다.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김현철의 그림은 수묵이 주제이자 소재, 형식이자 내용이다. 궁극적으로 김현철이 생산한 그림은 미술적 이미지라서 성찰이나 훈육적 도구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묵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먹은 벼루와 마찰하는 과정을 통해 먹물을 생산한다. 거기에는 시간의 여정과 정성, 반복 행위를 통한 과정으로써 결과에 대한 짙은 기대감을 함유한 기다림도 내포되어있다. 그리고 붓에 먹물을 묻히고 화지에 얹는다. 그냥 먹물을 묻히는 것이 아니라 스미고 드러나는 효과를 만들기 위해 화지에 먹물을 접합시키는 것이다. 농담은 먹의 검정기운을 중화시켜 짙은 곳에서 옅은 곳으로 스민다. 그리고 먹이 묻지 않은 여백과의 관계를 만든다. 그 장소에서는 의미와 과정이 중첩된다. 어쩌면 먹을 가는 인고가 화지에 오버 랩 되는 것. 엄밀히 말하면 이것이 바로 수묵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미술이 되는 순간 수묵이 가졌던 필연적 과정들이 ‘그림 그리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시 김현철의 수묵을 보자. 그는 산수나 풍물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붓을 화지에 찍어만 댄다. 마치 먹의 벼루와의 마찰운동 왕복운동을 보듯이 그는 찍어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작은 점단위의 먹 흔적을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그는 패널로 고정된 화지에 다시 그것을 반복해서 붙인다. 그저 추상의 이미지만 남을 뿐이다. 또 어떤 것은 붙였던 조각을 떼어내기도 한다든가, 심지어는 빼곡히 붙여나갔던 수묵 점들의 조각지를 모조리 다 떼놓는다. 그리고 패널 화지에 스며든 얼룩에 주목한다. 사실 김현철의 그림에는 어디에도 ‘수묵’이 없다. 어찌 보면 철저하게 아방가르드적이라든가 모더니즘적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수묵의 잔상이 남아있다. 먹의 농담이나 얼룩, 또 그것들과 흰 화지간의 의미와 여백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수묵의 그것이라 해도 비합리적이지 않다.

그가 수묵을 말하면서 조형이나 필법을 얘기하지 않고 기법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것이 더욱 그의 그림이 개념의 경계를 사유토록 하게한다. 자신이 개발한 찹쌀 풀로 수묵의 조각지를 고정시킨다든지, 조각지를 접어 표면으로부터 돌출된 새로운 면을 만든다든가 또 먹물을 머금은 조각지를 붙였다 떼 내어 얼룩을 만드는 과정은 소위 정통 한국화나 동양화론에서 얘기하는 필력이나 기운(氣運)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먹이 물을 머금고 화지에 닿아 스미고 번지는 효과의 많은 부분이 우발적인 것에 기대는 것처럼 물감을 머금은 조각지를 붙였다 떼 내어 밑 종이에 얼룩을 만들어내는 것도 상당히 우발적이다. 종이의 구김이나 접힌 면이 표면장력의 역발적인 방향으로 배치하는 것은 일종의 오브제의 접합이나 다를 것 없다. 조명은 분명 그 입체적 마티엘에 짙은 그림자를 남길 것이다. 김현철의 작업에서 과정만 떼어놓고 본다면 그 기술적 수법이나 이미지를 처리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적 시도거나 모더니즘적 이미지 생산 도구에 들어맞는다. 그럼에도 김현철 작품의 명제는 ‘수묵 스토리’이다. 수묵이 수묵을 지시하는 이른바 자기 지시적 작법은 그의 수묵이 옛날 냄새가 나서 고리타분하다거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라 재미없을 것이라는 일견의 판단을 재고하게 한다.

김현철의 ‘수묵 스토리’ 시리즈는 수묵이 나아가야할 또 한 방향을 제시한다. 진정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수묵이 아니면서 자기성찰이나 훈육을 강요하지 않는다. 물론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스펙터클로 유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수묵’의 잔상을 수묵으로 채워가는 탈맥락적 접점은 ‘수묵’이라는 개념의 경계 위를 걷게 한다.//미술평론 김영준//

– 장소 : 갤러리화인
– 일시 : 2015. 9. 18 –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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