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숙展(갤러리 시선)_20151228

순환성으로서 융화(融和, harmony)의 여백(餘白, margin)

글. 황 의 필 (Hwang, Eui-Pil. 미술평론가)

인간의 기억에서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무의식에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는 마력이 숨 쉰다. 그러한 상징을 유년에서 찾으려는 손명숙은 원(圓, circle)과 원, 원과 직선, 그리고 면과 면의 중첩과 교차를 ‘종이 드로잉(paper drawing)’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펼치는 예술 창작의 행위처럼 제각각 잘라진 종이의 겹침이나 얽힘은 마치 인간의 원형을 이해하려는 듯, ‘형상-기억’이라는 상징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러한 ‘원’의 상징은 우주의 주기 섭리를 형상화로 이끈다. 이미 연금술사들이 인간의 전체상을 정신과 육체로서의 ‘원적법(圓積法, squaring the circle)’에 관심을 두면서 ‘원’의 정방형화는 우주의 섭리를 추구하는데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손명숙의 표현 방식에는 흰색으로 길게 늘어진 종이들이 수없이 얽히고설키면서 회전을 반복하고 있다. 자고로 지속으로 회전하는 ‘원’의 순환 상징은 마치 진리를 터득하려는 선종의 ‘원’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탄트리즘(Tantrism) 혹은 금강승(Vajrayana)으로 이해되는, 즉 본질을 소유하는 ‘만다라(曼茶羅, 曼陀羅, Mandala)’와 서로 연결된다. 일명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할 수 있는데, 낱낱의 바퀴살(輻)이 축(轂)에 모인 수레바퀴(圓輪)와도 같이 유동하는 자태를 담는다. 즉, 실타래를 연상하는 이러한 윤원의 형식은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와 크게 다름없다. 마치 직물(texture)에 연접하는 모습과 유사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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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에는 마음의 방향성을 결정 지으려는 의지가 짙게 깔리게 마련이다. 이는 브라마(梵天, Brahma) 혹은 석가모니의 공간정위(空間定位)의 형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브라마와 석가의 공간정위는 마음의 방향성으로서 인간의 특성을 상징한다.
달리 말하면 수레바퀴로 이해되는 ‘슈리얀트라(śrῑyantra)’라고 불리는 ‘얀트라(yantra)’는 아홉 개의 삼각형이 상호작용으로서 우주의 운행을 드러내는 형국이다. 곧 자아(自我, ego)와 비자아(非自我, non-ego)의 상호성으로서 융합을 의미하는 합일이기도 하다. 이른바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이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논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한층 더 나아가서 이러한 현상은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저자란 무엇인가(Qu’est-ce qu’un auteur?)(1969)에서, ‘담론(discours)’의 구조가 사물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상과도 어느 정도 상관된다.(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in Dits et écrits, tome I, Paris, Gallimard, 1994(1969))
그도 그럴 것이 손명숙은, “작품 속의 수많은 ‘원(circle)’, 즉 원형들의 이름을 (아직은 또렷이 정의되지 않은) ‘만다라(mandala)’”라고 부르면서, “무한한 뒤엉킴의 생성과 반복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원형의 질서와 서로 에워싸는 조화로움을 만나며, 내면의 상처와 대면하고 정체성과 안정감을 다시 되찾는다”고 말한다.
이로써, ‘원’의 상징을 두고 끝없는 수레바퀴의 회전 원리로 상징화할 수 있게 된다. 즉, ‘지속의 흐름(continuous flow)’으로서 윤회(輪廻)의 순리가 함유된 ‘삼사라(Samsāra)’와 관련 지을만하다. 달리 말하면 유전(流轉)하는 생멸(生滅)로서, 무궁무진한 순간들(moments)의 지속 순환을 의미하는 ‘윤회전생(輪廻轉生)’과 닮아 있다.

한편 손명숙은 간간히 드러나는 도시와 자연의 공생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여건을 적절하게 구사한 백색면과 색상면의 교차와 겹침에서 얽힘 작용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 백색면의 중첩 사이로 간간히 떠도는 색상면은 존재로서의 경험을 내포하며, 따라서 느낌의 작용으로 감응을 품어내려는 도모이다. 그런 이유로 완결된 경험의 조직체로서 내가 참여하는 상황에서만이 존재가 펼쳐지는데, 이럴 경우 개입의 입장에서 분별의 가능성을 열리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험에는 느낌의 존재 작용이 중첩의 ‘교차(le chiasme)’로 융화되는 상호 응대의 이치를 담는다. 이처럼 존재는 ‘사이세계(l´intermonde)’로서 이중성의 원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결국 우주만물의 근원이나 본질을 존재 현상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도 밝혔듯이 관계항으로서 운행에 순응하는 시간성의 함유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명료한 관계성(concrete relatedness)”에 바탕을 두고 있다.(Alfred North Whitehead, Adventures of Ideas, New York: The Macmillan Co., 1967, p. 157.) 곧 공재성(togetherness)으로서 절충과 접속의 관계항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한층 더 나아가서 손명숙이 표현하려는 이미지(image, 心象)에 때때로 나타나듯이, 종이띠가 실타래처럼 엮이면서 뒤엉킨 형국을 순환성으로 받아들이면 좋을듯하다. 예로부터 순환성은 곧 무상을 의미한다. 그러니 무상의 개념에는 우주의 순리가 점철하는 탓에 인간의 존재를 탐색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여기에는 흔히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범어: znuttara-samyak-sabodhi)”의 논법이 내재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우주의 실상과 관련되며, 따라서 무상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과도 같은 이치를 품는다.

우주의 운행 원리와 관련해서는 융화로서 ‘범부(凡夫, Bala-Prthag-janah)’의 헤어남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에 홀로 태어나 제각기 살아가는 사람을 ‘범부’라고 이른다. 만약 이러한 형세로만 남는다면 주・객이라는 존재감의 능소(能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사가 된다. 마땅히 이를 해소하려면 온갖 대상됨의 분별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며, 더욱이 스스로 무엇을 끊어버리려는 의지에서 자유로운 ‘무단(無斷)’이어야 옳다. 그럼으로써, 나(我)의 집착은 스스로 사라지는 ‘무아(無我)’를 이룬다. 일명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adhisesa-nirvana)’이라고 의미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에 경계나 구분을 짓지 않는 깨달음의 마음이 형성된다.
이에 걸맞게 그가 표현하는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면과 면이 겹치고 또 다시 그 면을 덮으면서 끝없이 중첩되는 이러한 반복 현상은 인과의 법칙을 드러내려는 시도이다. 또한 백색 종이띠의 원형과 색상이 물든 직선의 종이띠는 마치 명경(明鏡)처럼 조응으로서 얽히고설킨 상황을 연출한다. 그의 말대로, “수많은 생명이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며 생성과 소멸로의 끝없는 반복을 이어서 인류의 역사와 우주를 완성한다. 본인 작품 속의 만다라는 자연과 인간의 일생을 상징하며 삶의 이완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반영한다”고 표현한다.

운행으로서의 변화와 지속에는 쉼 없고 머무르지 않는 ‘연(緣, 地水)’의 섭리를 품고 있다. 즉, ‘연’에는 찰나(刹那)만이 용인되므로 공용(功用)이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하다. 말하자면 인(因)과 과(果) 역시도 경계(心境)로서 나눌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남이 없이 드러나는 ‘허공계(虛空界)’와도 같아서 법(法)의 경계가 ‘무분(無分)’의 이치를 담게 된다.
오로지 경계가 ‘상인분별상(相因分別相)’이니, 이로써 심체(心體)의 망념을 잃어버리려고 한다. 더 나아가서 명경처럼 비친 상에도 영원히 얽히고설킨 인연이 반연(絆緣)된 탓에 이를 끊으려는 심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따라서 번뇌(煩惱)의 습기(習氣)이므로 의미(대상)에 응대해서 의언(意言)을 일으킬 따름이다. 이 모두에는 찰나만이 용인되므로 마땅히 머무르는 법이 없게 된다. 따라서 그가 구사하고 있는 반복으로 중첩된 선과 선, 그리고 면과 면들의 조합은 머무르지 않는 상태를 상호 관계로 포용하여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런 까닭에, 찰나로서 이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의지의 충만은 소중한 근원이기도 하다.
이처럼 현상으로서의 찰나는 생성을 동반한다. 이른바 현실 존재(actual entity)에 입각한 연속성(continuity)으로서의 생성(becoming)을 두고, 화이트 헤드는 ‘현실 계기(the actual occasions)’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생성하는 피조물(creatures)로서 연장 세계를 구성하는 ‘느낌(Feelings)’이라할 수 있다.(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New York: The Macmillan Co., The Free Press, 1969, p. 41.)
이러한 철학은 합리성으로서의 주관성(ational subjectivity)이 강조되는 데카르트의 논리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기 때문에 대상(objects)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비-표상(non-representational)’으로서 접근이 가능하다. 이리하여 데카르트의 ‘주관주의(cartesian subjectivism)’는 후설이 실체(entity)로 표방하는 의식의 대상(noema)과 서로 맞닿아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결국 손명숙의 창작 세계에 드러난 존재로서 ‘원’의 상징은 욕망의 여백(餘白, margin)을 유유자적하게 드러내려는 근거이기도하다. 그러니 여백이 호흡하는 존재로서 타자(other)에 포효하는 요청을 끌어안게 된다. 이러한 여백을 한층 더 나아가서 표출하면, ‘해탈(解脫, 범어: vimoksa)’의 순리와도 일정 부분 연관된다. 즉, ‘사마디(samadhi, 三昧)’의 섭리처럼 ‘연(緣)’의 경계로부터 오직 마음을 한곳으로 끌어 모으는 집중을 해탈로서 얻어내려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로써, 그에게서는 ‘만다라(mandala)’의 깨달음을 상징화로 이끌어내려는 행로가 엿보인다. 그런 즉, 그의 예술창작 의지가 얽매임 없는 무궁함으로 나아가려면 변화와 무상함을 동시에 품어내는 고안의 연속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장소 : 갤러리 시선
– 일시 : 2015. 12. 28 – 2016.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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