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응 회고展(미광화랑)_20160318

격조 있는 대기감 구현과 꾸밈없는 질박 지향의 회화

김 동 화 (金 東 華)

물과 수성 안료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수채화라는 장르 – 특히 풍경에 있어서 – 를 다룸에 있어, 흘려버리기 쉽지만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회화 요소로서 우리들은 어떤 것을 한 번 꼽아 볼 수 있을까요?

수채화가 도달하려고 하는 회화적 여로의 종착지는 작품 속 공기(空氣) 즉 대기감(大氣感)입니다. 이것은 회화의 내용들을 화면에 담는 그릇이자 배경이며 회화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섬세한 뉘앙스와도 같은 것입니다. 대상물이 회화의 육체라면 대기감은 회화의 정신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대기감은 작가 정신성의 뼈대이며 결국은 회화의 격조와도 직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멋지게 이루어져야 화가는 비로소 그 고단한 작화(作畵)의 여정을 갈무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어떤 회화의 제요소들 – 형태, 색상, 질감 등 – 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단지 그 대기감의 확립과 표출을 위해서만 봉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다면 너무나 지나친 언술(言述)일까요? 그렇지만 심지어는 그 정감(情感)의 문제, 눈에 보이지 않는 – 보이는 사물들의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 그 위대한 감흥조차도 대기감을 통해서만은 결단코 그 참된 면모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실로 회화는 어쩌면 사물 너머에서, 그 사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기 – 대기감 – 에 의해 비로소 구현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공기란 단순히 질소와 산소의 합체로서의 기체 – 물질의 한 존재 양태 –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덮고 땅은 싣는다(天覆地載)’라고 할 때, 그 덮음(覆)과 실음(載)은 궁륭(穹窿)과 대지 사이, 즉 천지간의 공기 – 기운 – 를 매질(媒質)로 하여 실현될 수 있습니다. 천지간에 편만한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성과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영기(靈氣)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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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에서의 공기는 실상 원형적이고 보편한 것이지만 이 하나의 공기에 각개 지역의 풍토적 혹은 문화적 착색이 덧붙여지면 대기감은 여럿으로 나뉘어 분화되면서 개별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대기감은 각각의 지역과 풍토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서로 다른 문화는 마치 서로 다른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때처럼 같은 공기를 서로 다르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결국 어떤 세계를 그린다는 것은 이들 각 세계 간 문화의 차이를 감지하고 그 공기의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단지 보이는 세계만을 그리는 것은 부분을 다루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공기까지 그리는 것은 전체를 다루는 것입니다. 만일 보이는 대상들을 전부 다 화면에 옮긴다 할지라도 이 공기가 빠진다면 총체적 회화 구조로서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는 사물이며 사유이자 구상이고, 공기는 이름이며 느낌이자 추상인 것입니다. 공기를 그리는 것은 세계를 추상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름(油彩)이 바로 이 드러냄을 고착시켜 굳건하게 응결시킨다면, 물(水彩)은 드러냄을 녹여서 부드러이 풀어지게 합니다. 수채로 드러낸 화면은 외부 풍경과 내면 시점의 용융점에서 서로가 조우하고 서로를 녹여내며 마침내 서로서로 섞이는 과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절편(切片)입니다. 우리가 서정(抒情, lyricism)이라고 말하는 그 느낌 역시도 이 대기감이 화면 속으로 녹아들어 사물이나 풍경과 접합된 양상을 표현하는 언어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화면 속 인물과 공기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인물 역시 사물이나 사물이 담긴 풍경과 마찬가지로 그 공기와 만나고 부딪히는 과정에서 질적 변이라 할 만한 일련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풍경의 일부로서의 인물 역시도 말할 바 없이 그러합니다. 동양의 옛 그림에 등장하는, 화면의 거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산수경(山水景) 속 극미한 점경(點景)으로만 묘사된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도, 스며든 대기감이 산수의 그것과 여일(如一)함을 그 옛 그림들을 감상할 때마다 마땅히 확인하는 바입니다.

다음으로 언급해야 할 문제는 대상 표현에 대한 질박성의 문제입니다. 공교한 필치의 매끄러운 그림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을 물리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감동을 유지시키는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대개 천연(天然)한 것은 투박하고 꾸밈이 없습니다. 회화의 표현에서도 이러한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고전 – 예컨대 ‘성경’이나 ‘논어’와 같은 – 에 해당하는 글들은 별로 다듬어 쓰려고 한 흔적이 없습니다. 당대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가장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가장 평이한 문체를 사용해, 하나님의 뜻이나 인간의 도리를 꾸밈없고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출애굽기 20장 25절)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다니엘 2장 34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을 만들 때 반드시 사람이 정으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뜨인 돌이 나와서 우상을 부순다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즉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 신성(神性)과 신위(神爲)에 대한 상징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한 것, 즉 인위(人爲)는 생명력이 없고 거룩하지 않으며 부정(不淨)하다는 것입니다. 인위를 배제하라는 도가적 무위자연관(無爲自然觀) 역시 이와 일면(一面) 상통하는 관점입니다. 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위성이 제거되어 그 양상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처럼 자연스럽고 천진해야 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지속적인 감동과 예술적 생명력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기운이 생동하는 것입니다. 투박하고 꾸밈없는 그림, 기술적으로 꾸며내어 그리지 않은 그림이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은 모두 이런 원리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제 황규응의 회화를 회고할 때,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격조 높은 대기감과 필치의 꾸밈없는 질박함을 새삼 돌이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황규응이 물(水彩)로 그린 이 지역 풍경과 그 풍경 속 인물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 즉 대기감을 규명하는 일이야말로, 그의 회화가 지닌 핵심으로 진입하는 가장 확실한 첩경입니다.
그가 즐겨 그린 전체 풍경들 – 하단과 신평과 을숙도, 자갈치와 남포동과 금정산, 영도와 송도와 태종대, 광안리와 해운대와 기장 등 – 은 결국 풍경을 통해 이 지역의 풍토와 이 곳 사람들의 마음과 느낌을 드러내는 것이고, 종내 그것은 그 화면 속 공기의 감각을 통해, 그리고 그 장식을 결(缺)한 소연(素然)한 필치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산 밑 돌담에 둘러싸인 초가집과 녹음으로 우거진 동구 밖의 큰 나무, 그 아래 앉아 있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과 어우러진, 손으로 다듬지 않은 돌이나 쪼개지 않은 통나무(樸) 덩어리 같은 인간의 본연을 보게 됩니다. 그 공기와 풍경과 사람의 조합에는 1980년대 중반까지 남아 있던 부산 근교 일원의 표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섬세한 하늘빛과 녹음의 향기를 드러내는 꾸밈없고 순후(淳厚)한 노랫가락과도 같은 그의 필치가 이루고 있는 조화의 경지를 감심(感心)합니다. 기교가 느껴지지 않아 눈을 물리게 하지 않는 진실한 마음이 그 공기와 더불어 흔연히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이 곧 공기이고 이 공기가 곧 마음입니다.
소와 더불어 녹음이 덮인, 막 꺾이려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세련과는 거리가 먼 붓의 더듬거림과 농담의 얼룩거림 위로 펼쳐지는 순연(純然)한 사람과 동물의 마음 그리고 그들 사이의 교감이 화면 위로 은근하게 스며듭니다. 마음의 드러남은 얼굴을 보여주는 전면보다 등을 보이는 배면에서 더욱 선연(鮮然)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다 보여주지 않아 여운으로 흐르는, 보여주지 않아 더욱 잘 보이는 ‘마음(心)’의 역설입니다. 육안으로는 흐리지만 심안으로야 선명한 것이지요. 이 공기와 필치를 통한 마음의 투영이야말로 황규응 회화를 관통하는 따스한 햇살 같은, 흐르는 구름 같은, 그저 그런 자재(自在)한 심경(心境)입니다.
남해 바다와 만나는 낙동강, 그 강의 끝자락인 하단(下端)에서 보이는 어둑한 혹은 노을이 진 낙조의 아스라한 풍경 앞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을 면면히 이어온 가야인(伽倻人)의 마음을 가만히 느껴봅니다. 하늘과 물이 만나는 곳, 그 보랏빛 공기의 서정적 시심(詩心)을 이처럼 무심하게 드러낸 화가가 또 있었는지를 아직 나는 잘 모릅니다.
강변에 외로이 놓인 나룻배 한 척은 인생 황혼의 쓸쓸한 심회(心懷)와 객수(客愁)를 반추하게 하는 절묘한 모티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목선을 타고 조용히 강을 건너가는 일군(一群)의 남녀노유(男女老幼)들이나 홀로 앉아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한물 지나간 이전 세대의 한 순간, 한 장면을 살짝 흔들리는 흑백의 영상으로 펼쳐놓은 듯, 사무치게 고즈넉하고 유연(悠然)합니다.

바닷가 마을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의 격렬한 포말에선 해촌(海村) 특유의 일렁이는 대기의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흐릿한 하늘빛과 맞닿아 일렁이는 바다의 으르렁대는 포효는 부산 일대 해양성의 한 전형을 묘파해내고 있습니다.
자갈치 일대의 흥성한 분위기와 어우러진 청량한 공기의 맛은 또 어떠한가요? 옛 적산가옥과 정박한 배들이 만들어내는 이 항구의 정취는 부산의 가장 깊숙한 속살이자 상징입니다. 일찍이 많은 부산의 근대기 화가들이 묘사했던 이곳의 풍경 속에서 유감없이 드러나는 화가만의 독특한 장기(長技)는 수채가 만들어내는 유려함과 뭉툭함의 조화입니다. 대상을 묘사하는 필치는 어눌하나 그 공기에 대한 묘파는 예민합니다. 이 둘 사이의 엇박자로 인해 회화 속 조형과 감흥이 가장 적절한 균형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황규응 회화의 표정이 정말 잘 드러나는, 소위 트레이드마크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업은 ‘우중(雨中) 풍경’ 연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단이나 을숙도, 남포동이나 자갈치 일대를 그린 쓸쓸한 엘레지(elegy) 풍의 그의 작품들에서는 부산이 가진 싱싱한 현장과 정취로서의 자연과 그곳의 인간이 가장 짙은 낭만과 페이소스로 엉기어져 분출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바람에 흩뿌리는 우적(雨滴)과 자욱하게 깔린 해무(海霧) 속에 펼쳐진 풍경이 흐릿한 영상으로 어른거리면서, 그 속에서 거리를 걷는 지역민들의 일상이 하나의 공기로 아련히 담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바다와 함께 그려진 우중의 풍경화에서는 긁어내기와 닦아내기의 기법을 활용해 비바람 치는 탁조(濁調)의 대기감을 촉각적으로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흔들림의 감각을 엷고 섬세한 녹색조의 대비를 통해 풍경 속 공기의 습윤성에 접근하도록 기막히게 묘출해내고 있습니다. 그의 초기작 ‘우중의 원예고(1957)’에 대해 과거 ‘어린 사람이 비오는 풍경을 아주 기분이 나게 묘사했다’고 한 서성찬(徐成贊)의 칭찬도 바로 이러한 일면을 반영하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는 양달석(梁達錫), 김윤민(金潤珉) 등으로 대표되는 부산, 경남의 초창기 근대화단에서 이룩한 지역의 향토적 근대성의 화맥을 이어나간 거의 마지막 지점의 작가이며, 특히 수채화가로서는 앞으로 더 이상은 출현할 수 없는, 이 지역 최후의 근대기 화가입니다. 그가 생전(1990년대 이전)에 그린 해운대와 동백섬의 풍경 속에는 아직 마린시티의 빌딩 숲들도, 장려(壯麗)한 광안대교 – 물론 2000년대 이후의 그림에서는 나타나지요 – 도 보이지 않습니다. 낭만적 정감과 사실적 현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그의 회화 속에서 우리는 부산이 가진 전통적 해양의 정취와 생활의 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데, 마치 단원(檀園)의 풍속화가 조선 후기의 현실과 생활상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핍진하게 전달해 주었듯이, 그의 수채화 역시도 앞으로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 항도 부산의 20세기 하반(下半)의 면모들을 이곳 후인(後人)들에게 생생하게 펼쳐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황규응 수채의 미적 핵심은 맑음과 담백함에 녹아있다기보다는 걸쭉함과 구수함을 따라갔다는 데에 있습니다. 깔끔한 술집에서 잔으로 마시는 정종 맛보다는 농사철 새참으로 사발에 들이키는 막걸리 맛 같다고나 할까요? 앞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계집의 곰살스런 애교가 아닌, 돌아서서 쓸쓸히 눈물을 닦는 사나이의 무뚝뚝한 속정 같은 미감이지요. 불국사 탑파들이나 석굴암 조각상 그리고 사군자에서 볼 수 있는 귀족적, 선비적 미감보다는 운주사 천불천탑 – 민불 – 이나 고려 철불 그리고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족적, 서민적 미감에 가깝습니다. 세련(洗練)의 미감이 아닌 조야(粗野)의 미감, 관(官)의 미감이 아닌 민(民)의 미감을 계승하고 있는 그의 수채화는 일견 엉성해 보이는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에 기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마추어리즘은 번쩍이는 기교를 뽐내듯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담담한 순정을 다소곳이 안으로 감추는 모양새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대상을 바라보는 본연한 시선과 대상을 향하는 간절한 사랑에 더욱 긴밀하게 맞닿아 있기에, 오히려 고도로 치밀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의 경지가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에 미광화랑 김기봉 사장님께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면서 글을 맺으려 합니다.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과 마지막 승부차기를 할 때, 황 선생님은 스페인의 마지막 키커 호아킨이 찬 볼을 이운재가 막아낸 다음의 장면을 이야기하시더랍니다. 그는 멋지게 킥을 선방해 놓고도 기쁨에 겨워 환호하거나 앞으로 뛰어나가지 않고, 그냥 두 손을 모아 몇 번 흔들더니 고개를 돌리면서 ‘씨익~’ 하고 한 번 웃더랍니다. 그걸 보더니 ‘바로 저거야, 저게 좋은 거야’ 그러시더랍니다. 이겼다고, 좋다고, 그 기분을 째지게 만끽하면서 확 터뜨리기보다는, 그걸 한 번 죽이고는 돌아서서 슬쩍 웃고 마는 모습,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황규응이 추구해 마지않았던 ‘좋은’ 예술의 경지였던 것 같습니다.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6. 3. 18 –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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