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주섭展(아트플랫폼 지엘)_20180101

글 강선학

때론 경외감으로, 때론 시큰둥하고 참담하게 여겨진다. 지난 30여 년 동안 송주섭의 작품에 대한 짧은 소회다.

1978년에서 1980년 초입에서부터 2012년 오늘까지 그의 작품은 조형적 측면에서 때론 경외감으로 때론 시큰둥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생산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을 생각하면 때로 참담했다. 1980년대의 미술운동이 한 시대의 운동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 나만의 오해이거나 오판일까. 아니면 과도한 기대일까. 급진적 선택을 통해 한 시대를 가늠해온 사람들의 태도나 입장이 한 시대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미술사의 새로운 동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현실적인 것을 규정하는 바에 의해서 예술은 기존 현실의 독점에 도전하는데 그 도전은 역시 현실 그 자체보다 더 현실적인 가공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나는 항상 실망하고 때로 거북한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호명하고 그에 답하기를 바랬다. 이제는 소용없는 짓이 되었다. 상업화랑의 팔리는 작품으로,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이나 기획전으로 둔갑하면서 초심도 분심도 이제는 기성세력이 되었거나 체제화 되고 말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송주섭의 작품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도 놓이지 않는다. 그는 그제나 이제나 그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고, 극악한 세속의 평가에서 물러나 자신의 세계를 물리려 하지 않을 뿐이다. 술자리의 안하무인도, 도를 넘는 쌍소리도, 언제나 세상을 바라보는 슬픈 눈빛도 조금도 물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은 여러 가지로 읽힌다. 여러 가지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로 읽히지 않고 어느 한 곳에도 쓰일 곳이 없다. 그래서 30여년을 한 길로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단 한 곳, 삶의 곡절을 보이는 흙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연민을 일깨워주는데 전념해 왔다. 그곳에 쓰일 것이다.

1778~1980년 대 초입의 작품들은 양적으로 많지 않지만 모두 흙을 그렸다. 흙이 아니라 절개지의 떨어져 나간 허방에 붙은 물기 없는 흙들의 푸석푸석한 표정을 잡았다. 그 사이에 한 때 푸르게 비집고 섰던 풀잎이나 나뭇가지를 지탱했을 잔뿌리들을 속절없이 드러나 모양으로 그렷다. 극사실적 묘사가 한창 유행했고,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이해와 오해가 얽힌 그림들이 나돌던 시절이었다. 씨줄과 날줄로 측정된 하늘을 절개지와 한 화면에 병치한 것도 그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극사실 혹은 사진적 사실이 등장하게 된 미국식 시대상의 이해는 없고 이 세 개의 용어로 지칭되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경향으로 수용되었다. 하나의 기법과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송주섭의 이 시기 작품에서 민중이나 정치, 경제, 시골이나 도시 따위의 사회적인 예각을 띤 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저 한 곳, 절개지로 무너진 흙의 초상들이 있을 뿐이다. 뿌리가 말라 드러나 땅 속을 헤집어보는 듯 한 그의 그림은 징후적이었고 예언적이었다. 그는 1980년대의 ‘상황’을 마중물로 그렇게 맞이했던 것이다.

절개지의 실뿌리를 그린 작품들은 흙이라는 소재, 실뿌리의 부드럽고 강건한 선들에 대한 인식, 깊이 파고든 뿌리들의 함성, 시대의 격랑에 스며들고 드러내는 근원으로서 흙에 대한 태도를 확인시켜 준다. 그의 작품의 바탕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그 근원과 근거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면서 그 근원지를 끝까지 떠나지 못하는 고단한 행보를 징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에게서 1980년대 초의 극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상황’은 흙과 민중, 풀뿌리로 드러나는 우리 터에 대한 시선으로 줄 곳 그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을 바라보고 강박한 시대를 읽어내는 기제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징후적이라고 명명해 본 것이다. 그러나 극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한 작업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묘사의 곡절보다 분기를 참지 못하게 하는 시대상황은 그에게 조형적 담금질보다 내뱉는 소리들을 다급하게 요청했다.

시대는 화급한 방책을 요구하는 정부와 이에 맞서는 민중들이 각을 세워야 했고, 이를 바라보는 일군의 지식인과 작가들은 외면할 수 없는 참여로 고통스러워했다. 연일 다치고 감금되고 사라지는 사람들과 사건들은 한 작가로서 송주섭의 태도를 변하게 한 것이다. 터에 대한 자신의 그리기는 이제 너무 진중해서 다급함을 이끌거나 사라진 사람들을 호명하는데 너무나 느린 호각소리였다. 그는 급하게 돌아가는 시대와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 덧없이 사라지는 구호들 사이에서 자신의 터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풍경이 아니라 인물이었다.

1982년~1990년대 그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 한 시대의 초상으로서 얼굴 그리기는 주요하고 적절한 것이었다. 상황도 사건도 연출도 필요하지 않는 유효한 소재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 역할을 했다. 얼굴 위주의 접근에 선조로 드로잉 된 인물들은 생성과 해체라는 이중적 형상으로 드러났다. 찢어질 듯한 삶의 강박함을 얼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없었을 것이고, 지우기와 흐리기, 흔적으로 뭉개진 얼굴들은 온갖 상황을 읽어내게 하는 데 어떤 소재보다 적절했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혐오와 경외감으로 엉켜 다가왔다.

정교한 묘사나 인물의 개별성을 읽거나 구축하기보다 성급할지라도 다급한 목소리로 이웃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황토 바탕에 선긋기와 말라터진 흔적들처럼 그려진 얼굴은 정교한 구축감을 피하면서 그 곡절과 다급함, 급박하고 힘든 상황을 드러나게 한다. 개인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지만 이미 개인은 사라지고 익명의 얼굴, 아니 우리의 얼굴로 한 시대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진리란 가상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가상 없는 구원이 솟아오르리라는 망상과 분리도리 수 없다.”고 하지 않은가. 이런 접근은 반대급부의 접근까지 허용하면서 드로잉이라는 방법적 개안으로 이엉진다. 사실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한 땅의 묘사가 무위적 흔적과 순식간에 드러내는 시간 속의 인간들을 드로잉으로 잡아내면서 다급한 시대상을 담고 조형과 의미를 새롭게 얻어낸 것이다.

흰 도료와 거친 붓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접근은 도료라는 물질로 덥힌 얼굴을 만들어내고, 인체의 단조로운 이해와 표현은 면 사이로 스며드는 혹은 스쳐가는 듯한 선조의 울림을 기조로 흙탕 같은 ‘얼굴’을 제시한다. 엥포르멜의 재연을 보는 듯한 접근이자 시대를 이해하는 송주섭의 인식정도이다. 문드러진 얼굴, 땅처럼 갈라진 얼굴은 한 시대의 병으로 얼굴을 잃고 피부병(?)으로 자신을 해체하는 인물을 얻어낸다. ‘얼굴’은 1978년~1980년대의 흙을 1980년대의 갈라진 땅으로, 1990년~2000년대의 ‘새대’로 이어지면서 사회적 간극으로, 갈등과 불신으로 견고해지는 시대에 대한 혐오와 저항으로 드러난다.

황토바탕에 부레풀을 써서 몇 번이고 덧입힌 바탕에 못으로 선을 긋는다. 날카로운 선들이 바닥을 파고들며 군상을 만든다. 춤사위가 있고 아귀다툼이 보이고 줄을 타는 어름사니도 보인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묘사된 것이 아닌데 선이 지나는 곳에는 금속성의 자국과 흔적들이 모여 삶을 이루는 ‘세대’가 형상화된다. 실체로서 몸을 가지지 않은 선들의 모임이다. 기호에 가깝지만 형상은 분명하다. 인물에 대한 익명성과 정황에 대한 시선을 여전하지만 각인된 형상과 유희성이라는 이중성이 두드러진다. 현실에 대한 이해와 저항의 심급에 생긴 변화에 다르지 않다.

때로는 못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쓱쓱 그려나간 흔적들이 새로운 군상이 되어 나타난다. 2000년대 그의 그림은 사뭇 자유롭고 그곳에는 시니컬하거나 해학적인 인물들이 사회현상과 무관하게 등장한다. 한바탕 흔적으로 한 ‘세대’의 세태를 일구어낸 것이다.

못으로 그려진 그림, 못이나 손가락으로 그은 선들은 묘사가 아니라 각인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각인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따라 가거나 인물의 개별성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접근이다. 그는 인물을 묘사하거나 정황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이라는 표현이 주는 자유스러움과 구성력 그리고 그들끼리 만드는 긴장과 반발력만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생성해 낸 것이다.

2010년대를 지나 계속되는 ‘세대’는 이제 앞 시기와 다르다. 좀 더 유희적이고 원초적인 표현충동과 현실체가 아닌 기호화된 인간을 그린다. 화면을 가득 메운 날카로운 선들은 대상의 묘사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진 구조로 전환되어 있다. 손가락으로 그은 선들은 인물을 좀 더 기호화하고 추상화된 선들이 유희에 집중하도록 한다. 손이나 못이라는 매체가 주는 선조는 화면이라는 공간에서 그 자체가 대상이 된다. 그곳에서 민중이나 사회적 정황을 읽는 것은 과민함일 뿐이다. 나 역시 그런 과민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유희성은 난화기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자유를 얻어낸다. 그 자유야말로 그가 정작 말하고자 한 바 아닌가.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그 자체의 생성력으로 살아나는 이미지인 것이다. 1980년대의 절개의 ‘상황’을 그린 땅이 회복된 셈이다. 땅을 비집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풀의 이미지와 생명력을 보아낸 것이다. 가꾸지 않지만 무성해지는 풀의 힘이야말로 분방한 유희성에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이른 것 아닌가. 그의 작업이 회고전에 가까운 전시에서 다시 얽혀지는 이유이다.

“자율성 때문에 예술은 기존 관계들에 대항하고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못으로 그려진 그림은 선택이 아니라 부름이며 자신의 출발지를 언제나 되돌아보게 만드는 언어이다. 30여년의 작업이 주는 의미는 대항만이 아니라 대항을 넘어서는 현실일탈의 추월이 유희의 자유를 얻고 그 유희의 자율성이야말로 기존 관계에 대항하는 예술이 되고 있지 않은가.//강선학//

– 장소 : 아트플랫폼 지엘
– 일시 : 2018. 1.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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