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예술과 사랑展(롯데갤러리 부산본점)_120601

피카소는 너무 유명해서 따로 소개가 필요 없을 것 같다. 이번 영상을 위해 과거 학창시절 피카소와 노트를 찾아봤다. 아래 내용은 당시 노트에 필기 했던 피카소와 브라크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엄하고도 꼼꼼했던 김은진 선생님 덕분에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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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1881-1973)와 브라크(1882-1963)

피카소와 브라크는 정물, 인물 등을 이용하여 분석적, 종합적 큐비즘을 구현하였지만 빛과 색상은 대신 잃게 된다. 그러나 들로네는 피카소와 브라크와는 달리 색상과 광선을 도입하여 풍경 그림을 그렸으며 들로네는 음악의 화음론을 그의 그림에 도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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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스페인의 한 도시 말라가에서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학교 미술 교사였으며 16살에 그는 모든 미술 콩쿠르를 석권할 정도였다.
1900년 19세인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뒷골목 [검은 고양이] 선술집에 첫 전시회를 열었다.
150편의 데생은 시인, 작곡가, 예술가 모습을 스케치한 작품으로 공개적으로 화가임을 선언한 전시회였다. 틀에 박힌 미술 감상법에 분노했던 피카소는 어느새 예술가 모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그는 이미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문이 났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에게 열광했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만큼 그를 격멸(擊滅)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죽마고우 카사게마스와 친했고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허물없는 솔직성과 남들이 도저히 모방할 수 없는 그만의 괴짜 기질이 그의 강력한 매력 중 하나였다.
피카소 나이 19세 되던 1900년, 전세계 천재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몽마르트르로 떠난다.
스페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프랑스어를 못해 파리 생활에 고전했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는 특히 몽마르트르 빈민가의 화가 로트렉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그 당시만 해도 야만적이라고 거들떠보지 않던 페니키아 이집트 예술에 크게 매려 되었고 후에 그의 예술의 고유한 영역인 큐비즘의 밑거름이 되었다.

– 청색 시대 (1901-1904, 20-23세)

피카소의 그림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는 시기에 속하는 때가 바로 ‘청색 시대(1901-1904년)’다. 피카소가 무명이었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림의 표현과 그림의 실제가 너무 닮아 감상하기 쉽다.
이 시대 유명한 작품 <삶>에서 보듯 그 당시의 그림은 차가운 느낌을 주는 청색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으며 온통 비참과 절망의 하나로 이어져 깊고 어두운 뒷골목의 삶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장님의 식사> 그 당시 그의 작품의 또다른 주제는 ’실명(失明)’이었다. 피카소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청색 시대 피카소에게 가장 어려운 시대였지만 어찌 보면 가장 행복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죽마고우 카사게마스를 잃고 괴로워도 했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그를 혈육처럼 돌봐 주었다.
특히 시인 막스 자콥은 그 자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처지에서도 극도의 빈곤에 빠진 피카소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다 잠을 재워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는 피카소 그림에 매료되어 그를 옹호했고 흠모했던 그의 평생 동지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동료 화가보다 시인 친구가 더 많았고 그들에게서 더 많은 예술적 영향을 받은 것은 특이한 점이다.

– 장밋빛 시대 (1904-1906, 23-25세)

1904년 23세 피카소는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 모여 사는 빈민굴 일명 세탁선(Bateau Lavoir)에서 살았다.
이 곳은 예전에 르누아르, 브라크, 막스 자콥, 모딜리아니 등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 집합소였고 동시에 삼류 가수, 목수, 약장수, 건달, 다양한 계층이나 하층 계급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무질서 환경은 오히려 그에게 자유분방(自由奔放)함 속에서 새로운 예술을 꿈꾸며 풍부한 아이디어와 창조력 키우는 토양이 되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고양이를 구해 주다 비속에 스쳐 가는 피카소 동갑내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같이 살게 된다. 그녀는 조각가와 결혼에 실패하고 이곳 세탁선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녀는 피카소를 처음 봤을 때 인상을 “작고 까무잡잡했지만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어요. 무척 불안한 태도였지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피카소의 질병의 호전되고 자신감이 넘치는 ’장밋빛 시대’(1904-1906)를 맞이하게 된다. 올리비에는 피카소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너무 가난해서 외출할 때 신을 구두 없을 정도였다.
그런 때는 그냥 며칠 밤 며칠 낮을 침대 속에 살아야만 했다. 석탄이 없어 발가벗고 나갈 수 없다며 석탄 값 외상을 미룰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꺼이 며칠을 꼼짝 않고 그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그의 친구들이 저녁이 되면 매일 그의 아틀리에를 방문했고 피카소는 밥을 굶어 가면서도 그들과 토론하며 즐겨 매일 서커스 구경을 다녔다. 일명 ’어릿광대 시대’라는 이 장밋빛 시대에 그는 광대나 여성 곡마사들과 무척 친하게 지냈고 그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이 당시 피카소의 그림에는 어릿광대가 많이 등장한다.
피카소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림을 이리저리 팔기 위해 차가운 겨울 거리를 나서야 했다. 그의 친구들은 이 사실을 가슴 아파하며 그를 도왔다. 보잘것없는 그의 거처였지만 피카소의 허물없는 시인 친구들은 이곳에서 신작시을 발표하곤 했다. 그곳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와 실험 정신으로 생동감이 넘쳤다. 피카소는 카페에서의 열기 찬 토론에 우연히 마주치는 예기치 않는 사건(해프닝)이나 괴상한 행위(퍼포먼스)를 즐겼다.때로 카페에서의 이런 취미가 그의 광란적 행위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 이런 정신 착란증은 그의 그림에도 장밋빛, 황토색, 연한 장밋빛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색 시대도 그랬지만 장밋빛 시대에도 역시 주등장 인물은 맹인, 반신불수, 난쟁이, 정신 박약아, 거지, 피에로, 창녀, 줄 타는 무희, 곡예사, 점쟁이, 유랑 악사, 마술사 등이다.
단지 청색 시대는 그런 인물은 어둡게, 장밋빛 시대는 그런 인물은 밝게 보았다는 차이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소외된 사람 아니면 밑바닥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이런 그림들이 그 당시 부유층에게 많이 팔려 나갔다 한다. 이것은 부유층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망각하는 위안의 세계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리라.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이런 버림받은 사람들의 소재가 한 사회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개인의 운명 탓으로 돌림으로써 오히려 신비한 기운이 감돌게 했다.
그는 서서히 유명해 졌고 러시아, 독일, 미국 화상들이 그의 그림을 사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는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입체주의라는 명칭은 1908년 브라크의 풍경화에서 유래한다. 브라크의 풍경화를 본 마티스가 조그만 큐브(입방체)의 축적 같다고 말했고, 한 평론가가 브라크는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식, 입방체로 환원시키고 있다고 평 한데서 입체주의라는 명칭이 태어났다. 하지만 구체적인 형태로 등장하기는 1907년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더불어서이다.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 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 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파블로 피카소와 프랑스 태생인 죠오지 브라크는 서로 전혀 딴판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협력하여 입체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죠오지 브라크는 마티스와 연관된 작가그룹에 속해 있었고 과감하고 절제된 그의 작품은 1906~7년 세인들의 눈을 끌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브라크보다 경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1901년 파리에 정착하여 격렬하고 자유분방한 재질을 발휘하여 세인들의 관심을 사게 되고 추종자들이 생기게 된다. 브라크를 피카소의 작업장에 데려갔던 사람은 Apollinaire이다. 이 운명적인 만남이 입체주의가 발전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1910년에서 1912년까지 피카소와 브라크는 최고의 열정을 쏟아 부으며 작업했다. 매일 서로의 작업실을 찾아다니며 서로의 작업을 확인하였다. 많은 도구와 함께 쉽게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피카소, 신중을 기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끈기 있게 수정작업을 하는 브라크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이렇듯 그들의 작업 방법과 작품의 수가 엄청난 차이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자의 일을 성실히 해 냈고 특히 브라크의 공헌은 결정적이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격렬한 표현, 철저한 부조화로 인해 브라크에게 영향을 미쳤고 당시 화가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하여 브라크는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고 <Large Nude>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방대한 스케일과 모호한 공간 분할등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두 사람이 협력하여 작품 활동을 하게 된 예비 단계의 역할을 했다.
잠시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아프리카 마스크의 영향을 받았는데(즉 원시미술의 영향) 아프리카 마스크는 피카소에게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과 감정의 세계를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새로운 개념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었다. 이 아프리카 마스크가 입체주의 발전의 밑바탕이 된 것이다.입체주의의 형성 초기 아프리카 마스크와 같은 부족 예술의 다양한 표현방법은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체의 각 부분을 추상화하거나 단순화하는 특유한 표현 방식은 그의 작품관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고 대상을 변형하고 종합시켜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그의 놀랄만한 재능을 충분히 보여주게 된다. 서양회화에서 과일은 성적인 욕망을 뜻한다.
1908년 여름, 브라크와 피카소는 서로 떨어져서 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병행되는 작품의 길을 모색하였다. 피카소의 풍경화인 <Cottage & Tree>와 브라크의 <Houses at L’Estaque>를 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즉 땅과 숲의 색조와 기하학적 형체가 양쪽에 모두 나타나 있는 것이다.(그림이 없어 답답하신 분은 화집을 보면서 읽어 보시길) 이점을 볼 때, 아마도 브라크는 일찍이 세잔느에게서 연유된 바 있는 입체주의를 어느 정도 구체화 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사실 세잔느야 말로 입체주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입체파 작가들은 세잔과 아주 다른 작품 경향을 드러내긴 해도 그 기저 역할을 담당한 세잔의 공헌을 무시할 순 없다. 브라크는 개인적으로 명상적인 세잔을 닮으려고 했고 또한 그의 작품의 고전적인 안정감과 구조를 찬양하였다.
브라크가 풍경화와 정물화에 몰두하고 있을 때 피카소는 주로 인물을 다루었다. 그 중에서도 입체주의의 특징을 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친구들의 초상화이다. 이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촘촘한 그물과 같은 조각난 선과, 각, 그리고 평면들이다. 이처럼 추상적 기법을 통해서도 피카소는 인물의 특징을 그려낼 수 있었다. 오히려 실물을 그대로 표현했을 때에는 표현하기 힘든 특징을 그는 그려낸 것이다. 이렇듯 브라크와 피카소와의 친근한 교류는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모티브를 가지고 작업에 임하게 했으며 이런 식의 교류는 1911년 여름까지 지속되었고 함께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스튜디오와 카페는 이 두 작가들에게 입체주의의 기본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의 현상의 세계, 즉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 안에서의 즉각적인 체험 등을 자주 표현했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을 대하는 태도는 단순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다수의 입체파 작품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일반 사람들로서는 난해하고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잡다단하고 애매모호한 추상성과 실물이 그대로 드러난 사이의 균형에서 입체주의 특유의 묘미가 있다. 훗날 피카소는 입체주의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당신이 손으로 움켜 쥘 수 있는 것이 실물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향수와도 같아서 사방에서 그 향은 맡을 수 있지만 그 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피카소와 브라크는 실물에 거의 흡사하게 또는 실물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활자체와 숫자 또는 기호 등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작품들이 1911년경에 선을 보인다. 이러한 수법이 더욱 보강되자 신문지나 다른 물질을 삽입시킴으로써 꼴라쥬 기법이나 빠삐에꼴레(종이를 붙이는 수법)를 사용한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반부르죠아의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공학적인 장비를 갖추기도 하고 한때는 그들의 작품에 서명하기를 거절하면서 익명의 작가로서 작품 활동도 시도 했었다. 그들이 그 시대의 철학이나 수학, 또는 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비행에 대한 관심이 상당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피카소는 가끔 브라크를 빌브룩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처음 하늘은 날았던 라이트 형제처럼 선구자적이고 모험적인 작품 활동을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작가 사이의 밀접한 교류는 단지 경쟁자의 맞수로의 위치에만 잇는 것은 결코 아님을 우리는 그 두사람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신비한 교류를 했던 것이다. 그들 각자의 천성이 신비하듯 말이다. 그들의 교류는 여러 분야에서 지속되었다. 브라크는 젊었을 때 칠장이로 뛰어난 기술을 익힌 바 있다. 따라서 눈속임의 기술 즉 사람들의 눈에 실물처럼 보이도록 그림으로 장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나무등걸을 진짜처럼 그려내기도 했고 이 기술을 피카소에게 가르쳐 주었다. 피카소는 이 수법을 사용하였지만 브라크가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했던데 반해 피카소는 작품에서 효과를 점증시키기 위해 사용했다.
1912년 여름 두 사람이 함께 남부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브라크는 상점 유리창에서 모조 참나무가 인쇄된 종이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피카소가 파리를 떠난 후에 그 종이를 샀다. 그 다음 그것을 자른 뒤 인쇄된 종이 위에 붙여 <과일 접시와 유리컵>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빠삐에꼴레를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후 피카소도 이 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빠삐에꼴레의 대부분은 언어의 나열이 잇게 되는데 그것은 가끔 정치적이기도 한데, 유머와 재치를 감지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년간 빠삐에꼴레와 꼴라쥬라는 용어가 서로간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피카소와 브라크 두 사람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용어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긴 해도 사실은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두 사진들을 서로 붙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불어에서 caller가 뜻하는 바는 ’붙이는 행위나 풀’이다. 그러나 빠삐에꼴레는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다소 일관성이 있고 고전적인 디자인과 더불어 재료의 통일성이 요구된다. 물론 모두 종이여야 한다. 반면에 꼴라쥬는 재료가 다양해도 되고 형태나 꾸밈새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창조적이었던 두 사람의 교류는 전쟁이 발발하자 갑자기 중단되고 말았다. 브라크는 군입대를 위해 떠나야 했고 그러한 친구를 피카소는 아비뇽 기차역에서 전송했다. 1916년 브라크가 귀향했을 때 그는 머리에 입은 심한 상처로 인해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피카소 또한 그 동안 변해버렸기 때문에 두 사람의 교류는 전처럼 재개될 수가 없었다. 브라크는 작품 활동을 계속 했는데 피카소가 무서운 속도로 새로운 방법을 바꿔갔던 반면에 그는 여전히 입체파 형식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가 창조력이 넘쳐흐르던 협동 작업 시절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그 이후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식적인 전시 행사를 거의 갖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닦아온 입체주의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그리고 많은 수의 유럽과 미국의 화가들이 브라크와 피카소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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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롯데갤러리 전시는 피카소를 찍은 사진작가 앙드레 빌레로에 대한 소개와 그가 찍은 피카소 사진도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잠시 추억을 되돌아보게 만든 전시회였다.

– 장소 : 롯데갤러리 부산본점(서면)
– 일시 : 2012. 6. 1 – 6. 2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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