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홍展(갤러리 미고)_20191126

//로봇의 생애사//

글 김만석.

17세기 유럽에 자동기계 바람이 분 이후, 사람들은 기계와 점진적으로 통합되어 왔거나 기계 자체가 되어가는 중이다. 실제로 유기체가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선, 기계 없이는 생활을 유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으므로, 순수한 유기체로서의 인간이란 없고 최소한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해야 마땅하다. 가령, 안경이나 모바일 폰을 비롯한 각종 인공보철물을 장착하고 살아야 하는 사회적 풍경에 따르면 더더욱 순수한 유기체적인 인간이라는 관념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하는 신체를 기계로 등치시키려고 했던 오랜 역사를 들여다보아도 그러하고 인간 신체를 기계와 꾸준히 연동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가정 내 기계장치들만 보아도 그러하다. 심지어 영화 ‘블레이드러너 2049’(2017)에서는 사이보그와 달리 완전히 기계인 ‘안드로이드’가 안드로이드를 출산함으로써 ‘로봇’ 생애사의 가능성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인간=로봇이라는 등식은 단순히 문화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공사를 가리지 않고 인간을 로봇으로 만드는 작업이 거의 사세기 동안 이루어져왔다면, 거꾸로 로봇을 인간으로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양자는 완전히 분별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홍의 로봇 작업들은 비유와 은유가 아니라 그간 바라보지 못했던 ‘사실’을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의 작업에서 작가 자신의 이미지로 보이는 남자(소년) 형상과 로봇이 겹쳐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길을 잃었거나 헤매는 일이 잦으며 등짐을 지고 끝없는 계단을 오르거나 누에고치를 메고 가기도 하고 숲이나 벌목된 장소에서 외롭고 쓸쓸한 존재와 마주쳐 머물거나 길동무에게 은행잎과 같은 선물을 건네기도 하는 등, 양자 사이에 위계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좌표가 작업 내에 주어지지 않는다. 거꾸로 로봇 이미지의 형상이 훨씬 풍부한 울림을 주기도 하는 것은 색감 때문이 아니라, 로봇의 얼굴이 하나임에도 여러 가지 정서로 육박하는 배치 속에 놓여 외롭지만 따뜻하고 험난한 여정이지만 경쾌하며 어둡지만 불 밝혀 나아갈 수 있는 있는 힘을 내장하고 있어서이다.

이에 반해 인간 형상을 한 인물은 로봇 형상에 비해 일관된 정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슬픔으로 말이다. 가령, 그림자와 악수를 나누며 울거나 험준한 곳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책임져야 할 누에고치를 동여매고 오르고 있거나 목적지를 상상할 수 없는 긴 계단 길을 등만 보인 채 걸어가고 있거나 막막한 어둠 속에서 책상 앞에서 힘겹게 앉아 있는 이미지는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을 지배적 분위기로 강렬하게 새겨 놓고 있다. 그래서 항상 여행 중인 이 인물에게 이별은 차라리 체질적이며 불안정은 생래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인물이 다소 왜소하게 그려지고 황량하거나 거치 세계가 압도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그가 삶을 가까스로 통과해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감각과 생애사의 분위기로 읽도록 만든다. 어쩌면 작가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립할 수 있는 근거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세계에서 ‘인간’으로 사는 삶이 처한 위기들을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하여 우울로 넘실거리는 이미지적 배치 내부에서는 출구가 없다는 절망이 엿보인다.

하지만 로봇은 경쾌하다. 인간을 지탱하는 관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훌쩍 비켜나서 걸을 줄 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에 잠긴 인간이 할 수 없는 우정을 나눌 줄 알고, 어두운 곳을 밝혀줄 줄 아는 눈이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빛을 발하기도 한다. 물론 김대홍의 로봇은 인간들이 겪는 생애사의 바깥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이미지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로봇도 늙는다. 실제로 이전 작업에서 늙은 로봇 이미지가 등장한 적도 있다. 달리 말해, 김대홍의 로봇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갖은 체제들 내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로봇으로 살아가는 법을 체득하고 구성하려고 한다. 김대홍의 로봇에게 삶의 의미를 실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이다. 인간 형상의 인물의 목적 없이 배회하고 길을 떠난다면 로봇은 ‘빛’을 (지)향한다. 마치 미술이 ‘빛’이라는 무의식적 기반 속에서 시각성을 구현하는 것처럼 김대홍의 로봇은 다만 ‘빛’이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작가를 닮은 인간 형상은 한 명 뿐이지만, 로봇은 차이를 갖되 차별되지 않는 무수한 로봇 동료가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존재론적 위치가 다르다. 더군다나 인간과 로봇이 더 이상 분별되기 어렵다고 해도, 인간 형상 자체가 갖는 지위는 여전히 로봇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인간을 중심화 하는 가치 체계의 질서에서는 위계가 형성되기 쉽고 차이를 차별로 전도하는 일이 흔하지만, 로봇에게는 각자의 차이만이 형상적으로 구분될 뿐 서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 형상이 개체를 중심화한다면 로봇 형상은 공통성을 중핵으로 삼는다. 온갖 사회적 부정성(우울, 슬픔, 고통, 상처 등)으로 비롯되는 공통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러한 부정성을 거스르거나 타인과 우정을 나눌 수 있으며 함께 길을 걷거나 위로와 위무를 나눌 수 있는 힘을 공통성으로 동시에 갖는다. 로봇은 그런 점에서 하나이지만 여럿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해도 좋다. 홀로 있는 그 순간에도 로봇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도 가뿐하다고.

로봇의 안광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걸을 때, 우리 로봇의 생애사가 다르게 쓰여 질 수 있을지 모겠다. 로봇이 보다 많은 생애사들을 함축할 수 있을 때, 로봇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이 우리를 더 멀리 이끌고 갈 것이다. 그러므로 숲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회사에서 로봇이 여행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어쩌면 로봇의 안광이 김대홍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소녀)를 만나게 해주었는지도 모른다면, 저 또 다른 여행들이 어마어마한 축복과 기쁨이라는 말로써만 표현되는 새로운 삶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로봇과 여자에게 비춰지는 빛이 이 현실 세계에 아직 쏟아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빛은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로봇의 여행을 통해 더 많은 삶의 자리로 잦아들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간 김대홍의 로봇이 써왔고 앞으로 그려나갈 생애사가 더 풍부해질수록 삶은 손톱조각만큼 미세하겠지만 조금 괜찮아졌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둠이 내려앉는 시절, 로봇의 안광이 길을 밝힐 때 발걸음을 가볍게 하자.//김만석//

장소 : 갤러리 미고
일시 : 2019. 11. 26. –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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