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래展(이젤 갤러리)_20191202

글 강선학

유희의 이중성에 대해

퍼즐놀이 같은 박봉래의 구성은 단조로운 도형에도 불구하고 치열함과 정교함, 그리고 작업과정의 인내를 목격하게 한다. 입체를 평면에 옮기려는 다중시선이 아니라 평면 공간을 다중시선으로 분산함으로 공간과 도형들을 새로운 논리로 이끌어 간다.

정방형의 조각(piece)들이 모이고 흩어지면서 형태가 된다. 조각들은 가장자리에 음영이 있어 입체감을 준다. 그 조각들이 병치, 집산을 이루면서 태양, 나무, 집, 나비, 코끼리, 기린 등 동물과 식물의 형상이 된다. 화병이 보이고 화병에는 꽃이 가득 들어찼다. 꽃들에는 방형이 아니라 둥근 형태나 곡선을 가진 조각들을 구성에 원용하고 있다. 방형의 조각들에 한정된 경우보다 훨씬 다양하고 유연한 공간 표현을 만나게 한다. 이 조각 역시 단순한 형태조합으로 평면의 문양, 도안, 도식화된 형태를 지지한다.

이번 전시에는 정물과 풍경이라는 두 개의 틀을 보인다. 인형 같지만 사람이 등장하고 풍경이 등장하면서 정물적인 평면성에서 입체나 원근 등을 연상하게 하는 공간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조각의 형태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고 그 경계가 너무 뚜렷해서 마치 조각보를 이은 듯하다. 킬트의 바느질 자국이나 자수를 놓을 밑그림 같은 인상도 그런 것이다. 서양 자수의 하나인 십자수 같다는 인상도 이런 맥락에 연유한다. 그러나 부드럽고 친근한 맛은 흠이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의 의미를 추적하기 힘들게 한다.

이런 태도는 화면의 형상들이 대상을 전제한 묘사이거나 어떤 것의 대치로서 기호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서의 기호를 재구성해서 대상이 없는 표상으로 자기구성의 충족으로 기능하는 세계를 보인다.

현상과 가상을 오고가는 파타피지컬은 “우리가 자기 자신 이상의 것이 될 자유, 다시 말하면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유희할 자유, 또는 자신의 의식을 반성할 자유, 우리의 존재와 비존재에 관해 성찰할 자유, 존재의 비존재를 가지고 유희할 자유에 대한 거의 유희적 이해입니다. 저는 그것을 파타피지컬 공간 또는 파타피지컬 체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그것을 일종의 유희적 장소로 느끼니까요,”(진중권 엮음, 『미디어 아트-에술의 최전선』, 휴머니스트, 2009, p.185)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중권은 “저는 그 말을 현실이면서 동시에 은유인 세계로 해석했습니다.”(진중권 엮음, 『미디어 아트-에술의 최전선』, 휴머니스트, 2009, p.186)(고 한다. 물론 이 말은 미디어 아트에 대한 특정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박봉래의 작업을 보면서 이런 지적을 연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유희이지만 존재와 비존재를 오가는 성찰을 보는 이는 간과하기 쉽다.

그의 화면은 우선 소재의 단조로움을 금방 드러낸다. 그러나 소재를 제한함으로 무한히 증식 가능한 구조를 견제하고, 대상에의 관심을 내부도 외부도 아니고 중성화시켜준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 허구로서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반복의 규칙,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개념화되기 직전의 어떤 집중을 보인다.

화면에 드러나는 형상이나 구성은 의미나 형태의 고리가 아니라 조각의 증식이 스스로 형태로 전이되거나 자가 형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형태는 조각의 조합이 주는 유연함이자 효과이다. 그리고 음영에 의한 작은 요철 효과는 시각적이기 보다 촉감적인, 달콤하지만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맞추기(구성)의 정교함, 집중을 보여준다. 이는 의미에서 벗어나기로서 유희이자 쾌락으로 세계와 연계된다.

파타피지컬(patapysical)의 세계란 현상과 가상을 오가며 사는 존재, 현대인간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말이다. 그 이해란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물음에 다르지 않다. 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사물의 묘사는 평면으로서 새로운 해석일 뿐 현실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가상이다. 가상으로 의사전달을 한다, 실재가 아니라 가상으로서 문자와 그림으로 표현하고 의사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은 현대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속성으로 이해된다.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존재로서 우리의 특징은 쾌락과 관계한다. 물론 이 말은 디오게네스의 ‘내일이면 죽을테니 먹고 마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평온하고 훨씬 안정적이며, 훨씬 더 빛나는 것”(장 살렘, 『고대원자론』, 양창렬 옮김, 난장, 2009, p.14)으로서 쾌락을 말한다. 그런 이해가 아니라면, 그런 즐거움, 유희가 아니라면 그의 작품은 팬시에 가까운 키치적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의미도 형상도 없이 그저 게임처럼 퍼져가는, 스스로 증식하는 이 작업들은 어떤 이념보다 자체의 반복이라는 논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 외 다른 메시지가 없다. 그런 때문에 반복 자체가 감각적인 기표, 아무 의미도 없지만 부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강도 높은 기표인 이름(형상)만 남기기 마련이다. 기호가 물질성을 띠게 되는 순간이며, 그 자체 하나의 사물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현상과 가상 사이에 매개로서 기호, 기호는 매개로서 소통과 전달의 기능을 한다. 그것은 유희를 만든다. 기호는 현실을 비현실화 시키고 환상을 현실의미로 불러들인다. “우리의 습관의 우울한 반복들로부터 기억의 심층적 반복들로 나아갈 수 있고, 게다가 우리의 자유가 노리는 죽음의 궁극적 반복들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박봉래의 작업은 유희라기보다 이 시대 상황, 오늘의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그것의 표면만을 이야기 하는 방법이다. 때로 표면은 심층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읽기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기호는 현실도 관념도 아닌, 현실을 지칭하면서도 현실의 미세함이 결여되어 있고, 개념이면서 개념의 정교함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결여로서의 매체이다. 그 결여는 때로 구성, 재구성을 유희로 이끌어 간다. 그래서 유희 자체에 빠질 위험이 상존한다. 보는 이가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유희 이상의 것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박봉래의 작품에서 유희라는 말을 긍정과 부정 사이에 두면서 현상과 가상의 치열한 성찰이기를 바라는 요청은 당연한 것이다.//강선학//

//프로필//

1992 부산대학교 미술학과 졸업(서양화전공)

개인전
1회 1999년 전경숙 갤러리
2회 2006년 조부경 갤러리
3회 2008년 영아트 갤러리(서울)
4회 2009년 부산 롯데백화점
5회 2010년 미광화랑
6회 2016년 미광화랑
7회 2017년 이젤갤러리
8회 2018년 e웰니스 치과 갤러리
9회 2019년 이젤갤러리

기획전
1991 대학미전(동상)
1992 현장 051전(다다)
1994 제3작업실 이후전(다다)
1999 뒷모습전(대안공간 섬)
2000 그림 맛전(후소갤러리)
2002 한여름밤의 일기(칸지)
2003 책상속의 동화전(용두산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기획
2005 Busan in Busan전(시청)
2008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부산문화회관)
2009 꿈을 선물하다 전(조부경갤러리)
2012 미광화랑 이전개관전(미광화랑)
2013 컬러 앤 웨이브(갤러리 움)
2013 부산국제금융박람회(벡스코)
2015 새벽별전(부산광역시청)
2016 그리다전(p&o갤러리)
2016 봄을 봄전(해오름)
2016 백인백색전(해운아트)
2017 100앨범 100아티스트(서울 롯데백화점 애버뉴홀)
2017 금정문화전(금정문화회관)
2018 현대미술 13인전(미광화랑)

아트페어
2016 화랑미술제(서울코엑스)
경남아트페어(창원킨텍스)
2017 화랑 미술제(서울코엑스)
경남아트페어(창원킨텍스)
2018 화랑미술제(서울코엑스)
아트부산(부산벡스코)
BAMA 국제화랑아트페어(부산벡스코)
경남국제아트페어(창원킨텍스)
블루 아트페어(해운대 그랜드 호텔)

장소 : 이젤 갤러리
일시 : 2019. 12. 02. – 12. 12.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