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진展(갤러리 아트숲)_20210415

상념의 조각들, 혹은 중얼거림의 이미지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영준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했을까?

한 작가의 회화작품을 보고 무심코 ‘말’에 관해 수많은 자문자답을 해야 했다. 말은 왜 할까?, 말은 수단일까? 아니면 목적일까? 도대체 ‘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스스로 애써 답을 찾으면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문답은 우리가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부질없어 보이는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때로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만, 평소 숙고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나름 철학적이고 진지한 사유의 기회라 할 수도 있다.

사실 ‘말’이라 했지만 진짜 궁금했던 것은 ‘언어’의 기능이랄까, 아니면 그것의 구조나 특징이랄까, 아무튼 우리에게 체화되어있는 기능으로써의 소통 수단 같은 것들에 대한 진취적인 이해의 욕망이자 궁극의 질문이었다. 말은 언어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루도 ‘언어’를 떠나서 살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터이고, 그것이 곧 우리의 언어생활이라 할 것이다. 무심코 이런 생각에 꼬리를 물게 만든 작품이 도대체 어떤 것 이길래……

필자와 작가 김남진과의 인연은 사실 드라마틱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떠올려보니 언제 어떤 계기로 그를 처음 알게 되었는지도 기억해 낼 수 없이 그냥 알게 된 관계다. 굳이 설정해 본다면 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학위과정 동료이기도 했던 작가이다. 전시를 매개하고 작품을 분석하는 사람으로서 판단해 봐도 참 좋은 작가이며, 개인적인 정서로는 믿음직한 선배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오래전부터 관찰해 왔지만, 적극적으로 분석하거나 평가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늘 한 번쯤은 집중해서 관찰해 보고 싶었던 작품을 꾸준히 해왔다. 홀연 기회가 왔고 그의 작업실을 몇 차례 방문하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마치 아직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스포츠 선수들의 루틴처럼 열심히 몸만들기를 하고 있는 크고 작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 앞에서 압도당했다.

김남진 작가에게서는 주위의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른 특징이 관찰된다. 그는 매우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감성은 절대 충동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소극적이거나 소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러한 작가의 특성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전사되어 있다. 그가 작업에 접근하는 방법은 그의 생각들을 신중하게 정보와 기호를 선택하고 감성에 결합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작업 과정을 관찰한다면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행위가 결부되는데, 그렇다고 예술가들의 해괴한 기행같은 것은 아니다. 사실 행위라 했지만, 김남진 작가가 작업에 수단으로 쓰는 도구의 특수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작업 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하기야 동시대 현대미술을 말하면서 기법이나 소재, 재료를 전통적인 범주에 국한 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그래서 가끔 작가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놀랍도록 특이하거나 생경한 행위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최근의 젊고 진취적인 작가들일수록 작업 과정에서 그러한 접근을 많이 한다. 신기하고, 스펙터클하고, 매끈하면서 위트와 유머로 효과를 보는 작가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때때로 특이한 기법이나 소재의 선택, 획기적인 행위들이 과잉되어 단순히 ‘신기한 물건’을 만들어 내거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기행을 일삼는 정도의 감흥을 넘어서지 못하는 작품들도 부지기수다.

역설적으로, 또 좀 극단적으로 말해보겠다. 작가 김남진은 전동드릴로 그림을 그린다. 이 진취적인 작업행위는 그만의 독특한 미감을 만들어 내는데 최적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신기하지도, 스펙터클하지도, 매끈하지도 않다. 그냥 보면 일반 평면 회화작품이다. 오히려 형광 효과와 유사한 물감이 적용되어도 작업행위나 소재의 특수성 때문에 텁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가 작품에서 보이고자 하는 효과 역시 순간적인 위트와 유머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은 첫인상으로 결정되는 충동적인 것도 아니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외견의 낯섦이 우리에게 쇼크를 주는 충격요법의 효과에도 유효하지 않다.

그의 작품을 접하면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이미지 기호들이 있다. 소위 구상회화라 불렀던 그런 것에 가깝다. 그런데 뭔가 접근이 쉽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관찰되는 기호들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구체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다. 그러니까 ‘이 형상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문장으로 해석해 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마치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작위적인 단어장 선택으로 늘어놓는 소위 ‘초현실주의 놀이’(자동기술법 automatisme)에 비유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김남진의 작품을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필자는 그의 작품 표면에서 발현하는 수많은 기호들과 흔적들을 ‘해독’하려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가끔 평자들은 작품의 번역가 역할을 한다. 그것이 가능한 맥락상의 작품에 한해서이다. 그런 태도가 평자로서 썩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가 있다. 예컨대 다양한 비유법의 운용으로 제작되어 작품의 표면이 지시하는 바가 숨어있는 이야기로 구성된 중층적 구조의 작품일수록 그 효과에 대해 설명해야 할 명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배경으로 한 아이콘(icon)이나, 신화를 다룬 소위 알레고리(allegory) 작품들일수록 전문적으로는 도상학(Iconography)적인 독해 능력이 필요하다. 김남진의 작품은 그런 구조와 매우 닮아있다. 그렇다면 ‘해독 불가’라는 것은 필자의 무능 때문일까?

그렇지만 사실 어느 누구라도 김남진의 작품을 정련된 언어로 독해할 수 없다. 분명 그의 작품 역시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의 역할이 알레고리와 같은 중층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는 몇몇 기호들이 작품마다 중복 등장한다. 빈번히 등장하는 기호 중의 하나가 해골이다. 계란과 같은 가금류의 알도 종종 등장하며, 특히 배경을 구성하는 도형으로서의 다채로운 원형도 그렇다. 그 외에도 꽃(카라)이나 인물들이 의미를 지니면서 등장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겠지만, 해골이나 알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비교적 분명하다. 해골은 죽음, 알은 탄생과 연결된다. 그럼에도 분명한 종합적 해독을 가능케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딱 꼬집어 그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어쩌면 김남진의 작품에서의 서사구조는 ‘중얼거림’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여전히 범언어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파롤(Parole)들이 병렬해 있어서 랑그(Langue)로 해독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징적이거나 알레고리화 되어있는 네러티브 구조임에도 문법적으로 갖춰진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일견했을 때, 말과 언어에 대해 자문자답하도록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림기호는 우리의 경험 속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사물들임에도 그림 전체가 지시하는 기의의 모호함 때문이랄까? 이러한 경험은 왜 언어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솔직히 말하면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는 상황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진단이 맞았다면 김남진의 회화는 실패한 것인가? 적어도 구상회화, 알레고리적인 중층적 구조를 가진 그림으로서 해석적 측면이 언어적 완결성에 도달하지 못한 나쁜 그림일까? 사실 이 모든 과정과 효과는 이미 작가 김남진이 전략적으로 꾸려놓은 의도적인 것이다. 그는 합판 표면에 드릴로 상처를 낸다. 무작위적인 상처가 아니라 철저히 계획된 방향, 힘 조절, 각도에 의해서이다. 그러니까 그가 드릴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 극단적이면서도 틀리지 않은 핵심이다. 드릴로 합판 표면에 구멍을 내고 상처를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때론 드릴 작업에 의해 발생되는 톱밥과 나무 먼지를 접착제에 버무려 화면을 연출한다. 합판 표면의 구멍과 상처는 음각된 이미지 실루엣을, 덧붙여진 톱밥은 양각 실루엣을 만든다. 이 미세한 높낮이는 역시 미세한 그림자를 품는다.

매끈하지 않은 표면, 합판이라는 소재는 물감의 투명한 발색을 방해한다. 물론 작가 스스로가 무채색을 즐겨 쓴다는 것은 쉽게 관찰되지만, 전체적으로 거친 표면에 광택이 없는 색채가 텁텁한 인상을 갖게 한 것이다. 좀 더 구조적으로 관찰해보자. 그의 대부분의 그림에는 사람이 등장한다. 유독 한 명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모두가 익명화돼 있다. 대부분이 서양 여성처럼 보이는데, 그녀들이 처한 입장은 복장이나 포즈, 그들이 들고 있는 사물들에서 구별된다. 하지만 그(녀)들과 주위 배경과의 의미심장한 결합을 보았을 때 혼란스러움이 가중된다. 등장인물들은 사실적이고 가능태 속에 자리하지만 그(녀)를 두르고 있는 배경은 놀랍게도 해골 탑이 있거나 거대한 알이 등장한다. 그리고 연작처럼 보이는 그림에서는 과격하다고 까지 할 만한 크고 역동적인 동작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주위로 다양한 색채와 크기가 다른 원이 겹쳐 배경을 이룬다. 그녀들은 해골이 쌓인 탑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는 다양한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500호의 그림도 다수 시도한다. 거대한 표면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있어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이 구석구석을 수색해야 하는 시선을 요구한다. 고대 문명의 상징으로 대표되었던 피라밋이 흔히 보는 대상으로 묘사되지 않고 마치 미래의 건축물로 보였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로켓 발사대로 쓰고 있다. 그림 전체가 잿빛 톤으로 뒤 덥혀 어떤 사건의 전초적인 징후처럼 의미심장함으로 물들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피라밋 중심부로부터 발산되는 작은 원형들이 몇몇의 선형으로 방사되는데, 놀랍게도 그 물방울과 같은 원형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자칫 못 알아차릴 듯한 네거티브 음영으로 새겨져 있다. 또 하나의 거대한 그림은 더욱 복잡하다. 이 그림 역시 한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는 아니다. 여기저기에 이미지 군집이 있고, 피라밋 그림과 마찬가지로 그림 전체의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원형 속에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화면을 읽어 가면 갈수록 더 놀라운 발견, 마치 사건의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들을 찾아낸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흩어져 있는 원형 속에 묘사된 인물들이 실제 역사적인 인물들이거나 소위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원형으로 도식화된 채 익명화 되어있다. 도장으로 각인된 것처럼 말이다.

다시 열거하자면, 허공에서 같은 옷을 입은 소년들이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놀이를 하고 있다. 그 주위로 사슴의 두상, 해골들의 집합, 유아들의 군집과 원형 속 인물들 등, 이렇게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마치 서로 친족이거나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듯 모두가 줄로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나자르 본주(Nazar boncuğu)가 있다. 주로 파란색 눈동자를 한 구슬의 형태로 터키의 기념품점 장신구로 익숙하다. 이 나자르 본주는 터키의 신화같은 전승된 전통 서술에 연결되어있는데, 소위 ‘악마의 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악령을 쫒는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적처럼 여기는 것이기도 하다. 김남진은 이 나자르 본주를 마치 자신의 분신인 양 거의 모든 그림 속 여기저기에 등장시킨다.

작가 김남진은 그의 작품 소재를 거대 담론으로 얘기한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문명이나 문화, 사회와 역사, 삶과 죽음이다. 그것은 박물관이나 피라밋, 우주선, 해골, 알, 나자르 본주와 같은 것에 은유한다. 화면은 정확한 뎃생으로 묘사된 형상들과 투시 원근법에 의한 유클리드적 공간감을 가지면서도 어느 순간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기호들을 난립시킨다. 중력을 무시한 이미지 기호들이 공간에 자유롭게 부유한다거나, 상식으로 읽혀지지 않는 상황들을 연출한다. 이렇게 틀지어지지 않은 이미지들의 관계는 어떤 틀을 상정하고 ‘해독’해 내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기호들의 종합적 ‘해독’은 실패한다.

그의 화면에서 가능태로 가장된 부조리한 상황들은 어쩌면 무의식처럼 파편화된 상념들이다. 마치 꿈의 장면처럼 말이다. 위에서 얘기했던 역사, 문명, 시간, 습속, 삶과 죽음과 같은 큰 개념들이 어떤 기호 이미지에 비문법적인 언어, 그러니까 지극히 그만의 파롤들로 접합해 있다. 그래서 그의 이미지는 시작과 끝이 있다든가 기승전결과 같은 것에 결속되어 있지 않다. 기호들은 서로가 서로를 불러내는 계열체도 아니다. 그러니 초현실주의자들의 언어 놀이와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내었다. 그는 그의 그림으로 이념이나 세태에 대한 특별하고 강한 입장을 표명하지도 않는다. 그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터득해온 다양한 정보들과 인상, 지식과 관념, 시간과 공간에서 느끼는 상념의 상태, 어쩌면 문법을 갖지 않은 미분화된 언어의 상태를 화면에 드러낸다. 그가 그만의 언어로 구사하는 중얼거림의 기록이랄까?

이러한 연출법은 우리가 그림 보기에 습속화 되어있는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 ‘분명 이런 이야기 일거야!’ 라든지 ‘이것은 그것을 가리키지!’와 같은 의미의 사슬들에 전제해 왔던 관습에 일침을 가한다. 마치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기표는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항상 미끄러진다’고 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예상치를 보기좋게 빗나가게 한다. 그냥 그의 작품은 화면이 연출하는 컨디션을 보는 것이다. 마치 ‘나는 해석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어떤 대상 앞에서 그것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작가가 묘사하는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은 정확한 뎃생과 명암법에 의거해 있고 명료한 투시 원근법도 적용된 사실적인 회화 앞에서 각각의 이미지 기호가 지시하는 바를 찾으려는 무의식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해야 할까? 물론 김남진 작품 감상법 같은 매뉴얼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있어서도 안 된다. 필자가 찾았던 단서들은 그저 그림에 마딱 뜨려진 현재의 눈으로 읽어야 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면, 마치 추상회화를 보듯이 조망해야 한다는 것 즈음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기호들이 숨은 의미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굳이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를 구성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마치 그 그림의 메시지나 작가의 의도에 결부하는지 확인해야 하는 것으로 종결지으려는 태도를 무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중얼거림’은 작가가 문화나 사회현상에 대한 특별한 내면화의 방법이다. 이를테면, 화려한 치장으로 역동적인 포즈나 춤을 추는 젊은 여성들과 그 주위에 배치된 다채롭고 화려한 원형은 마치 오늘날 미디어에서 상품으로 각색된 캐릭터에 대한 무상함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어떤 답을 찾거나 판단을 위한 비판이나 고발의 형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스텐스의 편린 같은 것이다. 감상자인 우리들이 꼭 그것을 따라가야 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그런 내면화과정을 타자로써 읽게 만드는 구성이다. 그의 거친 표면과 투명하지 않은 색감이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 예컨대 판화 원판의 작은 음양각들이 발화(發話)전의 언어라면, 원판에 의해 찍혀진 작품으로써의 판화는 결과적 국면, 발화의 완결성을 갖는다.

‘상념의 편린’이라던가 ‘중얼거림’이라는 비유는 그의 작품이 일으키고 있는 독특한 사건의 풍경을 묘사한 말이다. 성경이나, 신화라든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징적 맥락을 읽는 방법처럼 무엇인가 딱 떨어지는 명료성보다는 오히려 무의식적이거나, 언어 이전의 상념, 다양한 사건들이 주관적으로 결합된 이미지 기호들은 그 자체의 컨디션으로 우리와 대면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랄까? 작가의 거대 담론들에 대한 파편처럼 흩어진 상념을 회화라는 완결된 결과 앞에서는 아이러니는 너무나 독특한 경험이다.

김남진의 모든 작품을 요목조목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언어로 꾸준히 작품을 제작해 낸다는 것만큼 고달프고 외로운 일도 없다. 그럼에도 성실히 다작을 감내해 내는 작가가 기꺼이 세상에 선뵈기 전의 작품을 수고스럽게 꺼내어 보여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그의 그림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알게 된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비로운 즐거움이었다. 작가는 이제 입체작업에도 시도했다. 필자에게 처음 보여준 (완성 전)입체작품 카라 꽃도 흥미로웠는데 앞으로 성공적인 진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김영준//

장소 : 갤러리 아트숲
일시 : 2021. 04. 15. – 0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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