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A展(갤러리 청사포)_20221105

//작가 노트//
4년 전 ‘몸’의 의미를 묻는 작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진행해오고 있다. ‘몸’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어느 지점에는 정신에 비해 늘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정신이 존중되어 왔다면 ‘몸’은 건강과 이상적인 ‘미’를 위해 가꾸어야 할 대상이었고 정신을 담는 그릇 정도로만 대우 받아왔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신보다는 ‘몸’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고 그즈음 점점 약해지는 체력 때문에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못 버텨낸다는 생각이 나의 관심을 더욱더 ‘육체성’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작품의 시작은 ‘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감각과 기억들을 떠올렸다. 곧이어 몸이란 무엇인가? 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몸을 다스리는 방식이 달라진 그 기저에는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가? 등 온갖 생각들이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 나오는 듯 이어졌다. 터져 나오는 의문과 질문들을 잠시 뒤로하고 어느 날 조심스럽고 소심하게 구리 여인을 손에 두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몸의 감각에 맡긴 채 첫 코(사슬)를 시작으로 몇 날 며칠을 밤낮 없이 홀린 듯 손을 움직였다.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내 몸의 크기와 비슷한 여인이 구멍이 숭숭 뚫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를 완성하면 그 방법을 잊기 위해 꽤 오랜 시간을 두며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비슷한 형태의 몸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내 몸이자 동시에 다른 여러 몸들이 겹쳐진 우리들의 몸이었다. 살아오면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내 몸에 허용된 행동이나 존재 양식에 제약을 가하는 힘들에 숨을 수도 도피할 수도 없었던 표식과도 같았다. 취하고, 버린 많은 것들이 새겨진 몸은 ‘나’라기보다는 문화가 새겨진 집적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작업 초기 ‘몸을 둘러싼 외부의 사회적 관념들을 몸에서 분리시켜 오로지 존재론적 의미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라는 질문을 나에게 계속 던졌다. 그럴 때 마다 몸은 드러냄과 사라짐을 반복했다. 이후 “남성의 신체와 달리 재현된 여성의 몸을 해석하는 관습적 통로는 매우 협애하고 제한적일 뿐이다.”라는 비평글의 일부를 읽게 되었다. ‘본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사회적·문화적 과정’이라고 하지 않는가. 작품 속 얼기설기, 듬성듬성 사슬로 이루어진 텅빈 몸, 허물을 벗은 듯 껍데기만 남은 ‘몸’에서조차도 우리는 무의식을 지배하는 사회의 관념들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몸’이 더 이상 정신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여러 시선들을 되쏘는 일종의 스크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몸’의 사회학적 관점이든 자연주의적 관점이든 확실한 것은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고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시간과 노화를 벗어 날 수 없어 결국은 쇠락하고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몸’을 프로젝트로서 가꾸고 관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목표”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앞으로 ‘몸’을 테마로 언제까지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지난 6월(2022) “몸” Vulnerable 이라는 전시 제목으로 개인전을 가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갖게 되는 이번 전시 ‘몸’시리즈Ⅱ “corpus”/“말뭉치”는 “몸 속에 살기는 왜 이리 어려운지” ‘몸을 억압하면서 왜 끊임없이 몸에서 탈출하려고 하는지’ “여전히 몸은 왜 가치의 위계 속에 있는지” 등의 질문 속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회는 자연을 밀어내고 ‘몸’에 문화를 새기라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몸을 감시하며 억압의 대상으로 만들고 “문화가 선호하는 새로운 모델”들을 따라 다시 제작하기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사유 속에서 그들과 마주했다. 전시장에 매달리고 바닥에 놓일 몸들과 사진 속 해체된 몸들 사이에는 무슨 말들이 오고 갈까? 상상해 본다.//ROSA//

장소 : 갤러리 청사포
일시 : 2022. 11. 05. – 11. 19.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