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식//
어컴퍼니에서는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창진 작가의 개인전 ‘빈 종이’를 선보인다.
이창진의 작업은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것들’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주택가 폐기물, 아파트 수거장, 중고마켓 플랫폼 등을 통해 병풍, 족자, 액자 수백여 점을 수집하였다. 더 이상 집안의 벽면에 걸리지 못하고, 미술시장에서의 가치를 상실한 채 버려지거나 밀려난 그림들이 작업의 재료가 된다.
익명의 원작자들이 그린 산수화와 화조도 등은 작가의 손에 의해 오려지고 분해되며, 콜라주 형식의 새로운 이미지로 재조합된다. 이는 단순한 재활용이나 수집을 넘어 미술사 바깥으로 밀려난 이미지들에 대한 재서술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을 ‘통계학적 미술사’라고 명명하였다, 중심이 아닌 주변에 남아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진 다수의 이미지를 추적하고, 그렇게 상실된 가치와 시간의 흔적을 현재로 소환하였다.
특히, 수집된 모든 이미지를 화조도, 산수화 등 동양화의 형태로 재구성하며 일련의 작업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투리 종이조차 남김없이 소진 시킨다. 무엇 하나 버려지지 않도록 하는 이러한 작업 태도는 단지 창작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환경 문제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자원의 순환인 업사이클링(Upcycling)은 미술계를 비롯해 전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제이다. 이창진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서, 폐기된 이미지들의 문화적, 미적 가치까지 회복시키는 지속 가능한 예술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빈 종이’에서는 ‘통계학적 미술사’ 시리즈를 총망라함과 동시에, ‘여백의 종이’에 주목한 ‘오각형‘ 연작이 새롭게 소개된다.
오각형 연작은 다이어그램, 산수도 등의 작업을 위해 원화 속에서 필요한 형상을 오려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여백을 소재로 삼은 시리즈로, 단순히 빈 공간이 아니라, 이미 형상을 내포하고 있는 주체적인 존재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통계학적 미술사? 는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의 미술적 감각과 취향이 어떻게 소비되고 소멸해왔는지를 통계처럼 보여준다. 잊혀진 이미지들의 서사와 그 조각들을 엮어내며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작가의 시선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어컴퍼니//

//작가 노트//
2023년 말에 진행된 개인전 ‘통계학적 미술사’는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그림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연히 당근마켓을 보며 어릴 적 주변 어느 집에나 걸려 있었던 모란, 대나무, 산수화 등과 같은 동양화 액자들이 헐값에 혹은 무료 나눔으로 올라온다는 것을 보며 미처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그런 그림들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말 없는 사라짐은 특히 자신이 작가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왔던 도태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감을 마주하게 했고, 그 그림들을 수집해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전시는 그 재구성 이후의 과정으로써 그림에서 형상이 분리되고 남은 빈 종이(여백)에 관한 고민을 담았다.
전시 이후 나는 특별히 그림을 모으는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분리한 액자와 유리가 쌓여가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거니와 한쪽에 쌓여있는 빈 종이 조각들에 대한 생각들 때문이었다. 맨 처음 동양화 콜라주 작업을 생각해 낼 당시, 동양화에 있는 여백이 각각의 형상을 분리하는데 용이하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막상 작업에 들어가 칼을 들고 그림 앞에 섰을 때 산과 하늘을 또 나무들을 경계 짓고 떼어내는 일은 다른 의미로 쉽지 않았다. 형상을 떼어낸 그 나머지 종이들에서 깊이를 보여주던 먼 산은 희미한 물감의 자국이 되어버릴 것이고, 특히 여백으로 처리된 강과 물안개, 또 하늘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그냥 종이 차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꺼내놓지 않는다면 누구도 캐묻지 않을 일이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오리고 남은 종이 자투리로 밖에 보이지 않기에. 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화면의 간격을 조절해 주던 강과 물안개, 하늘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종이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보기도 하며 아무래도 그것들을 다시 드러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종이들을 조합해 빈 부분 없는 하나의 종이로 결합하기로 했다. 그것은 맥락을 잃고 떨어져 나간 작은 조각들로 구성된 ‘표본’을 작업할 때처럼 모든 그림의 조각들을 남김없이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표본 작업에 쓰이는 떨어져 나온 자투리 모양들
하나의 남은 종이 밑에 다른 남은 종이를 겹쳐놓고 윗부분의 형상을 따라 칼로 오려 위, 아래를 합치면 마치 장판이나 시트지를 이음매 없이 하나로 이어 붙일 때처럼 이음매가 없어진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최대한 빈 공간 없이 맞추고 다시 또 이어 붙이기를 반복하여 여러 장의 종이를 하나의 면으로 이어 붙여 나갔다. 그림의 가장자리 부분이었던 종이의 직선 면이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시 이어 붙일지 멈출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빈 종이에서 형상이 잘려 나간 모양 중 일부는 그런 겹침 칼질에 의해 또다시 아랫종이에 복제되기도 했지만 날카로운 부분들이 조금씩 무뎌지거나 변형된다. 종이 간의 색, 질감 차이로 잘린 모양이 더 부각되고, 말이나 새 같이 제법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것과 유추해 내기 힘든 형상들이 맥락 없이 혼재해 있었다. 과정이 반복될수록 남은 종이는 점점 작아지고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서로 다른 그림에서 온 종이들을 붙여 한 면에 나열해 놓으니 각양각색의 종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게 그림이 오기 전까지 어떤 공간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왔는지 저마다의 사정과 시간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이후 합친 종이들을 배접하기 위한 패널을 만들었다. 패널에 올라간다는 것은 그간 주로 해온 설치작업의 호흡과는 무척 달랐다. 수집과 그에 따른 증식이 열려있는 나의 작업 특성상 일반적인 사각의 패널은 그 안을 어떻게 구성해도 답답해 보였기 때문이다. 패널과 씨름하던 차 결국 나는 그 답답함의 이유가 사각 패널의 중력을 전제로 정해진 상하좌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각으로 된 문과 창문, 캔버스, TV와 같이 사각은 방향을 연상시킨다. 그 사각의 틀 안에서 방향성 없이 증식하는 빈 종이들은 프레임의 가장자리에 맞게 재단되어질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써 다각형의 패널을 만들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빈 종이의 가장자리에 맞춰 패널을 제작하기로 했다. 다각형 중 오각형은 사각형에서 벗어나는 그 시작점이라서 좋았다. 다시 오각형에서 변을 하나씩 늘려가면 점점 원이 되고 또 중력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원래 그림에서 하늘의 역할이던 빈 종이-여백은 그렇게 또다시 오각형의 패널 속에서 마치 누워서 하늘을 보듯 또다시 천창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그 빈 종이가 하늘이고 강이며 물안개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이창진//
장소 : 어컴퍼니
일시 : 2024. 5. 20 – 5. 3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