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글//
사진이 발명된 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무한한 생산과 소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는 데이터로 존재하며, 빠르게 생성되고 공유되며 사라진다. 이제 사진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머무는 기록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흐름에 가까워졌다.
벤야민이 말한 기술복제 시대의 ‘아우라’, 즉 단 하나뿐인 현존의 감각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복제가 가능해질수록 ‘지금-여기’의 유일성은 약화되고, 시간과 거리의 감각 또한 변형된다.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는 생성되는 순간부터 동일한 형태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상태로 존재하며, 이러한 변화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진은 여전히 ‘현존’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 속에서 흑백 은염사진은 여전히 물질로서의 사진을 드러낸다. 네거티브라는 물리적 원본과 감광, 현상, 정착의 과정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는 미세한 차이를 품으며, 각각의 인화물마다 서로 다른 밀도와 표면을 지닌다. 하나의 이미지는 복제될 수 있지만, 그 결과물들은 각기 다른 고유한 ‘현존’을 획득한다.
‘은의 잔상’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질을 다시 묻는 자리이다. 흑백의 절제된 화면 위에서 은빛 입자가 남긴 흔적을 따라, 9인의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과 빛을 탐구한다.
권오경은 8×10부터 20×24에 이르는 대형 필름에 인물과 풍경의 서사를 담아, 확대가 아닌 밀착 인화라는 본연의 방식으로 흑백의 미학을 펼쳐낸다.
박광범은 보이는 것만큼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면을 응시하며, 선망의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서의 강남을 다시 정의한다. 익숙함 속에 감춰진 도시의 고독한 시간의 층위를 조용히 들여다본다.
송원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가는 장소와 기억을 마주하며, 단순한 사라짐의 기록이 아닌 한때 존재했던 순간들이 남긴 은빛의 흔적을 찾는다.

이세연은 세계라는 무대에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풍경의 중심 너머 소외된 구석과 고독한 흔적을 포착한다. 고립된 프레임 속에 머무는 시선을 통해 역설적으로 획득한 자유로운 존재의 본질을 기록한다.
이승기는 유년의 신작로에서 마주한 포플러의 기억을 대형 필름카메라의 정교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묵묵히 세월을 견뎌온 고목을 통해 그 속에 새겨진 시간의 서사와 본질을 반추한다.
이인협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쉽게 세워지고 철거되는 신도시 외곽의 가설 건축물을 통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문명 자체가 거대한 가설(假說)은 아닌지 질문한다. 쉽게 대체 가능한 가설물에 불과한 실체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이향룡은 사라진 신라 사찰의 빈터에 홀로 남은 석탑을 통해, 돌의 표면 위에 켜켜이 쌓인 천 년의 시간을 유형학적 시선으로 기록한다. 형체는 사라져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최상걸은 재개발로 멈춰버린 ‘B-04 지구’의 풍경을 파노라마 포맷과 대형 카메라의 무브먼트를 응용하여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는 기묘한 고립감을 시각화한다. 선명한 현재와 흐릿한 기억이 교차하는 프레임을 통해 곧 사라질 공간이 지닌 유예된 생명력을 영원한 기록으로 치환한다.
최지영은 대형 카페라는 인공적 공간 속에 재구성된 ‘기획된 자연’을 통해 현대인이 갈망하는 새로운 형태의 산수를 탐구한다. 자본의 의도로 조율된 낯선 시공간을 흑백의 낮은 톤으로 포착하여, 인간과 자연이 얽혀 만들어낸 또 다른 질서와 헤테로토피아를 응시한다.
이번 전시는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의 흐름 속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고, 물질로 남겨진 사진이 지닌 시간성과 감각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은으로 남겨진 잔상 속에서 우리는 빛이 남긴 흔적을 마주하고, 그 안에 고요히 응고된 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한은경//
장소 : 아트스페이스 이신
일시 : 202. 6. 16 – 6. 28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