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형욱展(갤러리 이듬)_20260618

//평 론//
류형욱 회화 속 현대적 신화: 인간에서 풍경으로의 망명
글: 김승호 (동아대학교수)

원초적 혼돈(chaos)과 고독한 자기성찰(habitat) 류형욱의 고집스러운 내면 탐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거한다(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를 연상시킨다. 이는 오늘날 세계 질서의 붕괴와 혼란 속에서도, 외부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작업실이라는 고독한 내적 공간에서 묵묵히 예술적 본질을 파고드는 작가의 수행자적 태도와 궤를 같이한다.

오늘날 회화가 기술의 범람과 개념의 과잉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이, 작가 류형욱은 집요한 선묘와 밀도 높은 색채로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 관계를 파고든다. 그의 작업실은 치열한 실험실이자 온전히 자신에게만 천착해 온 수행의 공간이며, 사방을 가득 채운 작품들은 고집스러울 정도의 자기성찰을 투사한다. 작가가 구축해 온 신화적 여정 속에서 바다와 숲, 산과 식물로 대변되는 자연은 오랜 기간 탐구해 온 원초적 혼돈이자 억압의 공간으로 기능하며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결합시킨다.
최근 류형욱의 신작들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인물을 재현하는 표피적 구상화에 머물지 않는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내면세계가 거대한 우주적 질서와 결합하고, 종국에는 하나의 장엄한 풍경으로 정착해 가는 숭고한 연대기다.
화면 속 인물들은 수풀을 하나의 거대한 제단이나 사제의 외투처럼 두른 채, 독특한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이는 외부의 소란함과 시대의 대혼란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중심을 지키려는 고독한 자기성찰이자, 현대 피로사회에 대항하는 작가적 방어기제다. 생명의 본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러한 세계관은 10여 년간 숙고하고 투쟁해 온 작가로서의 외길이 이 화면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다.

주체적 사제(Antistes)에서 미학적 자아의 초상(Imago)으로 전통적인 가치나 신념의 수호자를 뜻하는 사제(Antistes)의 영역에서, 내면의 예술적 성찰과 형상화를 의미하는 미학적 초상(Imago)으로의 이행은 곧 유형욱 작가가 지향하는 예술가적 정체성의 변화를 대변한다.

류형욱의 화면 속 인물들은 상처와 고통 그리고 유한한 생명이 지닌 잔혹한 본질을 초연하게 감당해 내며 세계를 주재하는 주체적 사제로 격상된다. 이러한 집요한 노동은 마침내 인간 신체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여 거대한 암산과 바위섬 같은 지형학적 풍경으로 확장된다. 인물의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거대한 풍경은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원성에 대한 시각적 울부짖음이자, 동서양의 미학이 절묘하게 융합된 자아의 초상화다.
현대화된 여사제의 형상을 한 인물들은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상징하는 매개물을 손에 쥔 채, 날것의 상처 속으로 거리낌 없이 걸어 들어간다. 작가는 자연에 종속되어 있던 수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화면 정면에 전면 배치하면서도, 관람자의 시선과는 마주치지 않도록 처리한다. 이로써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초연해진 인물들은 세계를 주재하는 ‘주체적 사제’로서의 지위를 화면 위에 다시금 명확히 복획(復劃)해 낸다. 여기서 복획(復劃)이란 작가가 자신만의 선과 규범을 화면 위에 다시 긋고 재정립하는 실존적 행위를 뜻한다. 필자는 류 작가의 작업이 시각적 유희를 넘어, 주체적인 질서를 다시 세워나가는 작가만의 고독한 회화적 수행의 의미로 사용한다.

작가 류형욱에게 있어 이러한 정신적 노동의 종착지는 인간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에서 풍경으로 망명’하는 지형학적 확장인 셈이다. 흰 구름과 장막 같은 거대한 암산 그리고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면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바위섬은 사실상 인물의 형상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거대한 자아의 초상이다. 외딴섬이자 부동(不動)의 바위, 즉 고독한 주체의 정신은 우주적 풍경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성을 향한 갈망과 다름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혼돈과 상처를 받아들이고, 끝내 자신만의 견고한 산과 섬을 마음속에 세워 올릴 수 있는가.”

류형욱은 동양의 전통적 회화관에 서양의 상징주의적 도상을 절묘하게 융합함으로써, 형상회화가 도달할 수 있는 서사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혀놓았다. 자연으로의 귀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우주적 풍경과의 동화로 이행하는 그의 작업은 오늘날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 내면에 잠재된 거대한 파토스(Pathos)를 화면 위에 시각적으로 분출해 내는 그의 최근작들은, 이 불안정한 시대가 반드시 기록해야 할 하나의 ‘현대적 신화’로 각인되기에 충분하다.//김승호//

장소 : 갤러리 이듬
일시 : 2026. 6. 18 –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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