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時空의 빛, 変奏
작업을 해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은 단순한 작업의 축적이 아니라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관조해 온 여정이었습니다.
전통 한지 위에 반복되는 원시적인 형태, 삼각형과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도형은 단순한 형태로 보이지만, 그것은 생성과 소멸, 질서와 변화, 가변성과 불변성, 과거와 현재가 만나 새로운 미래를 이루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시공의 빛’과 ‘변주’는 서로 다른 연작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이 이어진 두 흐름입니다.
같은 형태를 반복하면서도 늘 다른 화면이 만들어지는 것은 빛과 시간, 그리고 나의 감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감성과 사유를 일깨우는 일이며, 침묵 속에서 더욱 길어지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문화상을 소중한 격려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변함없이 전통의 정신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체현하며 시대와 호흡하는 작품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예술은 끝없는 길이며, 그 길 위에서 오늘도 한 장의 한지 위에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공간의 빛을 담으며, 현대적인 조형성의 획득과 고유 정서의 발현을 위해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김수길//

//평론//
입체에서 평면으로
김수길의 근작에 대해
한국화의 실험적 열기는 대체로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왕성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문화적 변혁의 추이가 어느 때보다도 활기 있게 전개되었다는 전반적인 시류와도 일정한 관계를 지니지만, 한국화 내부의 변화적 요청이 한결 강렬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을 듯하다.
한국화 내부의 요청이란 다름 아닌 현대적 회화 내지는 조형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왕성하게 제기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식된 양식과 방법으로서의 서양화와는 달리, 전통적 양식으로서의 한국화가 현대적 회화로서의 위상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는 보다 절실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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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에 의한 비정형의 방법은 드디어 한국화의 비구상이란 새로운 명칭을 얻어 제도권 속에 합류하게 된다.
한국화에서의 비정형의 방법을 위시한 다양한 실험의 발판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는 여러 분야에서 실험의 열기가 높았으나, 특히 한국화 영역에서의 실험은 한국화라는 형식을 벗어나려는 보다 근원적인 양상을 띤 것이었다.
김수길을 비롯한 일군의 젊은 작가들에 의한 방법적 모색은 평면의 차원을 벗어나 화면 속에 대담한 오브제의 차용과 콜라주의 방법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 새로운 차원을 형성한다는 열의를 반영하였다.
부식된 금속제나 망가진 옛 기물의 목재 또는 묵은 한지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한 입체적 내지는 부조적 화면을 구현해 주었다.
김해성이 지적해 준 것처럼 김수길의 방법은 “보다 공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던” 것이었다. 수묵이나 화선지란 기본적 매재를 벗어나 서양화의 캔버스니 돗자리 같은 지지대를 사용하는가 하면, 다양한 현대적 도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 실험은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으나, 김수길과 같은 오브제의 적극적인 원용과 다양한 매체의 콜라주를 시도한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김해성이 김수길의 방법을 두고 극단적인 공격형으로 본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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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은 이 같은 내면을 사변적인 구조로 명명하고 있다.
“평면에서 입체로의 양식 변화가 점차 평면적인 화면으로 전이되면서 보다 사변적인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김상철)
일견 간결하면서 동시에 풍부한 변화의 내연은 사변적 구조의 반영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입체에서 평면으로의 회귀가 결코 반전이라기보다 입체적인 것의 내면화의 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띠처럼 그어진 단순한 수묵의 구조나 그것의 발전으로서 복잡한 기하학적 구조가 다 같이 오랜 시간의 경과를 내장한 의태적인 형상임을 유추해 볼 때, 오랜 시간 마모된 금속제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묵에 의한 번짐과 수축이 간결한 형태에 하나의 변화의 조짐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오랜 시간을 경과한 마모의 형태일 때 비로소 사변적인 내연을 품는 것은 아닐까.
그 사변적인 내연이란 다름 아닌 공간과 시간의 융합을 꾀하는 또 하나의 모색으로서 말이다. 강선학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이제 화면은 대상을 옮겨 놓거나 지칭하는 공간이 아니라 화면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가지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오광수 미술평론가//
장소 : 부산시청 제3전시실
일시 : 2026. 9. 28 – 10. 4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