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재展(한새 갤러리)_20261021

//평론//
빛으로 조성된 샹그릴라의 세계

— 조영재의 작품에 대한 소견 —

글 김병식(미학·미술사학·예술철학)

얼마 전 필자는 화가 조영재로부터 자신의 전시 작품에 대한 평문을 부탁받았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평문 분야의 요청을 사양해 온 터라 조금 당황했으나, 익히 보아 온 오랜 벗의 훌륭한 작품들이기에 평소 느낀 바를 숙연한 마음으로 표현해 보고자 한다. 필자와 조영재는 조형의 기초를 익히던 시절에 한 공간에서 수학한 화우(畵友)이며,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종종 만나 서로의 일상을 묻고 예술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 왔다. 수개월 전에 조영재의 작업실에서 그의 최근 작품들을 본 필자는 그 새롭고 원숙한 의경(意境)에 자못 놀랐는데, 즉 우아하고 신비로운 심상적 정취가 물씬 느껴져서 평소보다 더 자세히 감상하면서 그의 생각을 들어 보았다.

조영재가 남겨 온 그림들을 두루 살펴보면, 모든 그림이 꿈속의 환영을 연상시키며, 그 환영의 기운을 운용하는 매개와 동력은 ‘빛’이다. 조영재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빛은 대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자 마음의 귀착지이며, 정해진 형상은 없으나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사물 하나하나와 연계하여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조영재가 묘사한 나무·물결·숲·구름·산·바다 등이 모두 빛 속에 깃들어 있거나, 희미한 빛 속으로 아득히 사라지거나, 또는 새하얀 빛망울의 무리가 곳곳의 자연물과 서로 어우러지는 등의 오묘한 변화를 조성하는데, 이로 인해 자연물의 예리한 윤곽과 경계가 무너지고 부드럽고 온화하고 몽롱한 꿈결 속의 대자연이 연출되어 나타난다. 이에 관한 내용은 아래 조영재의 여러 대표작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자세히 부연하기로 한다.

조영재가 지금까지 남겨 온 그림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크게 초기 계열 화풍과 후기 계열 화풍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 계열은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에 빛망울이 요소요소에 산발적으로 어우러진 계열이다. 이 계열에는 산속 경치의 일부 또는 경물의 일부를 잘라 취한 그림들이 많으며, 구성과 포치(布置)가 간결하고 경물의 색상과 형상에 역동적인 기세가 느껴진다.

조영재의 초기 계열 대표작 ‘로스코의 숲 II’를 보면, 커다란 바위를 중심으로 주변에 잡목들과 잡초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데, 다양하고 강렬한 원색을 조합했음에도 효과가 매우 우아하며 격조가 높다. 다시 말해 적(赤)·청(靑)·자(紫)·홍(紅)·황(黃) 등의 원색을 과감히 사용했는데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조화를 이루는데, 그 원인을 살펴보니 채도와 명도를 적절한 곳에 다양하게 배열하는 조영재의 회화적 감각이 매우 탁월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또 그것이 교묘히 운용된 까닭에 화면 전체의 통일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점은, 흰색 빛망울의 절제된 크기와 흐름, 그리고 이합(離合)·집산(集散) 등이 적절하고 이상적으로 분포됨으로 인해 전체 화면의 온화한 기운이 자연스럽게 우러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부신 빛망울이 다양한 원색의 화려함을 모두 정리하여 가라앉혀 주고 있다. 이 그림의 온화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또 다른 요인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부드럽게 무너뜨린 데에 있다. 윤곽을 무너뜨리는 몽환적 묘사법은 조영재의 최근작에 이르러 거의 모든 그림에 적용되어 있는데, 이상향·꿈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가 강조되는 최근작일수록 이 묘사법이 더 진가를 발휘하는 듯하다. 이상 설명한 형식적 특징은 ‘로스코의 숲’ 시리즈에 거의 모두 적용되어 있다. 색채를 다루는 조영재의 기술적 수준과 조형 감각이 실로 놀랄 만하다.

조영재의 초기 계열 그림 중에 약간 다른 양식의 그림들이 있는데, 즉 ‘푸른 열매’·’머위와 소나무’·’청매화’·’푸른 소나무와 참나무’ 등이 그러하다. 그중 ‘푸른 열매’가 인상적인데, 특히 구성미가 훌륭하다. 주제인 짙고 굵직한 나무가 화면 상단 끝에 자리해 있어 통일감과 안정감을 갖추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인데도, 하단의 잡목 가지와 교묘히 연계함으로써 통일감과 안정감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독특한 그림이 되었다. 밝은 화면을 가르며 올라가고 내려가는 잔가지들의 구성미와 여백의 자연스러움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이 계열 그림들의 구도는 중국 남송(南宋) 시대에 많이 사용된 국부취경(局部取景)·일각구도(一角構圖)와 유사한데, 오히려 조영재의 구도 양식이 일률적인 남송 시대의 구성 양식보다 더 독특하고 변화가 다양하다. 조영재가 남송 시대의 그림들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정황에 따라 감각적으로 처리했던 것이 오히려 독자성을 갖춘 원인으로 짐작된다. 취경(取景)에 대한 조영재의 주도면밀하고 세심한 고민과 노력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초기 계열에서 ‘목신의 숲 II’ 역시 독특한 매력을 갖추고 있어 그 원인을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산만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은은한 아름다움이다. 원색이 이리저리 산만하게 흩어지고 주제인 사슴이 숨은그림처럼 푸른 배경 속에 뒤섞여 있는데, 그러함에도 오래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은은히 우러나오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얼핏 보면 주제가 주변의 산만하고 잡다한 나뭇가지들 사이에 숨어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데, 즉 작가가 ‘숨은그림 찾기’처럼 의도적으로 사슴을 숨긴 것이다. 푸른 나무에 푸른 사슴을 그린 다음에 강한 빛 원색까지 화면 곳곳에 산만하게 뿌려 놓아 주제가 한층 더 숨겨진다. 배경 색상과 빛을 보아서는 동틀 무렵 혹은 밝은 달이 뜬 밤인 듯하기도 한데, 푸른색과 원색과 검은색이 신기하게도 서로 잘 어우러지며, 간간이 가해진 흰색도 자못 우아하다. 이 그림을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면 그제야 사슴과 나무의 숨은 윤곽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게 되며, 이어서 뒷배경인 물결도 드러나게 되는데, 배경의 곳곳에서 은은히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물결과 나무들의 미묘한 변화가 놀라울 정도로 오묘하다. 화가 조영재가 보는 이로 하여금 빛의 변화와 더불어 그 뒤의 어둠 속에 깔린 미묘한 변화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감상하길 원했던 것이다.

조영재의 후기 계열 그림들은 조영재가 근래에 남긴 것으로, 주제가 빛인 점은 변화가 없으나 화풍이 초기 계열과는 현격히 다르다. 물론 초기 계열 그림의 화법이 후기 계열 그림에도 요소요소에 반영되어 있으며, 다만 새로운 화법이 폭넓게 사용됨으로 인해 초기 화법을 사용하는 비중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을 따름이다. 이 계열의 그림들에 나타난 형식적 변화를 개괄하자면, ① 시각적 번잡(煩雜)함을 정리하여 정수(精髓)만 남긴 점이며, ② 동적(動的) 화풍에서 정적(靜的) 화풍으로 변모한 점이며, ③ 다양한 원색에서 단일 계열 색상으로 통일된 점이며, ④ 추상성을 가미한 심상적 요소가 크게 강조된 점이다. 이 외의 소소한 기법적 변화는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첨가하기로 한다. 그림 양식이 간일(簡逸)하게 변모한 점이 가장 눈에 띄는데, 즉 과거의 복잡한 포치(布置)와 구성이 모두 배제되고 수평 또는 수직 방향으로 간략히 정리하여 빛이 이슬비처럼 하늘 가득히 아래로 떨어지거나, 물결 위에 수직의 빛줄기들을 묘사하거나, 또는 평원(平遠)의 수평선을 중심으로 광활한 강물과 하늘이 맞닿아 아득히 멀어지는 등의 구성 양식이다. 풍광의 정취는 마치 선정(禪定)에 들어선 것처럼 맑고 고요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롭고 신비로운 미적(美的)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회화는 정신의 산물이며 기법은 정신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조영재의 그림 양식은 비유컨대 ‘단번에 뛰어넘어 곧바로 여래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돈오(頓悟) 양식이 아니라, 오랜 수행 과정을 거쳐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의 점수(漸修) 양식이다. 그래서 조영재는 타고난 재능 외에도 오랜 경험과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고, 그 노력의 흔적은 그가 남긴 모든 그림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조영재의 후기 계열 대표작 ‘Blue Shangri-La’는 미적(美的) 정취가 특히 우아하고 아름답다. 근경의 뚜렷함과 원경의 모호함이 조화롭게 대비를 이루는데, 구역 간의 구성비(構成比)가 적합하고 색조의 차분함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간과할 수 있는 독특한 기법이 숨어 있는데, 즉 광활한 물결에 사용된 기법이다. 물결을 가까이에서 보면 무수히 많은 미점(米點)을 서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특이한 점은 푸른 미점의 아래에 보라색·분홍색·금색 등의 미점이 엇갈리면서 층층이 겹쳐 있고, 그 색조들이 표면으로 은은히 드러나면서 푸른 물결의 우아한 격조를 크게 높여 주고 있다. 그리고 물결을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히 올려다보면 물결의 기저에 숨어 있던 금색이 드러나는 이색적인 효과를 감상할 수 있다. 우아하고 신비로운 효과를 배가(倍加)하기 위해 다양한 색조를 겹치는 이 기법은 고대의 동양회화에서도 적염(積染)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사례들이 있다. 다만 동양회화에서는 색조가 다소 섞인 탓에 효과가 혼연한 데에 비해, 조영재의 이 그림에서는 투명 필름을 겹쳐 놓은 것처럼 효과가 깔끔하다는 점에서 양자가 구별된다.

조영재는 감상자를 위해 무한한 상상의 공간을 남겨 두었는데, 그곳은 빛의 세계, 즉 샹그릴라의 세계이다. 조영재의 말에 따르면, 샹그릴라의 세계는 인간 세상의 허위와 가식을 걷어낸 순수의 세계이자 모든 생명체가 동경하는 마음의 고향이며, 현실 세계의 본원이다. 조영재는 감상자의 시선을 샹그릴라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화면상에 근(近): 대지 → 원(遠): 물결 → 무(無): 하늘의 세 단계 여정(旅程)을 설정했고, 이에 따른 표현법을 뒤에서 설명하듯 단계별로 달리 적용했다. 무한적인 원(遠)은 유한적인 근(近)에 기인하여 나타나며, 근(近)에서 출발해야만 그 나아감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역으로 무한적인 원(遠)은 유한적인 근(近)을 더 뚜렷이 부각하는 작용을 하는데, 고대의 사상가는 이 원리를 일컬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했다. 대자연의 원(遠)에는 하늘과 대지가 맞물려 서로 감응하고 융합하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변화가 생성되는데, 감상자는 원(遠)의 경계에서 대자연의 변화를 통한 정신적 풍요를 얻게 된다. 원(遠)은 노장(老莊)이 말한 대로 “혼미하게 되어 사물이 없는 무(無)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노자’의 무(無)는 노장(老莊)의 중심사상인 ‘절대 자유의 영역’이자 조영재가 말한 샹그릴라의 영역이다.

조영재는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근경(近景:大地)을 매우 뚜렷하고 강렬하게 묘사했다. 근경의 어떤 부분은 짙은 검정 곁에 화려한 노랑 원색을 과감히 붙이거나, 넓고 불규칙한 보라색 원(圓)에 초록색 윤곽선을 긋는 등의 묘사법으로 형상의 예리한 윤곽과 강한 대비를 강조했다. 근경에서는 푸른 계열의 대지와 중경(中景)의 넓은 물결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는 노란색 선(線)이 두드러지는데, 역시 전혀 촌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넓고 부드러운 중경의 정취와 자연스럽게 이어 주고 있다. 이 그림의 전체적인 기운과 운율을 주관하는 가장 환상적인 부분은 물결 상단에 밝고 몽롱하게 펼쳐진 두 개의 타원형 빛이다. 타원형의 구성비(比)에 어색함이 전혀 없으며, 섬세하고 부드럽게 펼쳐지는 빛의 명도(明度)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영재가 이 그림에 심혈을 기울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쪽 타원형을 길게 가로지르는 부드러운 빛줄기는 이 그림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는 동적(動的) 기운 역할을 하고 있어 정감이 넘치는데, 선율의 명도(明度) 변화와 면적 대비가 매우 자연스러워 전체 화면의 우아한 격조를 더 높여 주고 있다. 이 그림은 경계를 담담히 무너뜨린 물결과 빛줄기가 특히 아름다우며, 은은히 드러난 빛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보는 이로 하여금 온화하고 신비로운 기운을 체감하게 해 준다.

조영재의 최근 대표작 가운데 ‘빛 속에서 I’ 역시 정취가 우아하고 아름다워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장식미(裝飾美)가 풍부하여 누가 보아도 정감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 아래쪽 근경(近景)에 포플러나무 세 그루가 황량한 대지 위에 쓸쓸히 세워져 있는데, 나무를 지탱하는 짙은 대지의 굴곡이 잔잔한 물결과 유사하여 그 실루엣의 규칙성이 장식미를 더해 준다. 이 그림도 ‘Blue Shangri-La’처럼 근경이 짙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는데, 다만 포플러나무의 형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구상회화 범주에 가까워진 점이 다를 따름이다. 이 그림은 새하얀 안개가 가득 깔린 땅끝과 이슬비처럼 내려오는 하늘의 빛망울이 매우 인상적이다. 짙고 뚜렷한 근경과 배경의 하늘은 서로 강한 대비를 이루며, 새하얀 안개로 뒤덮인 지평선과 포플러나무의 담담(淡淡)한 윤곽이 대지와 하늘을 연결해 주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래의 검은 대지가 새하얀 안개를 향해 점점 깊이 사라져 가는 심원(深遠) 과정이 매우 강렬하며, 포플러나무가 전체 화면의 우측에 자리하여 좌우 비대칭을 이루는 점이 이 그림의 유일한 변화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크고 작은 빛망울이 신비롭고 몽환적인데, 자세히 보면 채도가 낮은 청(靑)·자(紫)·분홍(粉紅)·금(金)·백(白) 등의 많은 색채가 크게 혹은 미세하게 산발적으로 흩어지면서 오묘하게 융합되어 있어 보는 이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결론적으로 ‘빛 속에서 I’에도 이 계열의 기타 그림들과 다름없이 간결한 구도에 은은하고 우아한 색감을 갖추었으며, 아울러 정취가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치 선정(禪定)에 들어선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조영재의 최근작 ‘봄빛’이다. 이 그림에서는 형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던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사물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빛줄기로 상징되는 새하얀 세로선(線)들만 남겼는데, 율동적인 세로선의 구성미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이 그림은 의미에 따른 이미지를 묘사한 심경(心境) 위주의 그림이므로 추상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작가의 제작 의도와 더불어 감상자가 보고 느끼는 그 어떤 감정도 모두 주요 모티브에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물결·선(線)·색상 등의 시각적 요소뿐 아니라 고요함·정갈함·화사함·우아함·차분함·쓸쓸함·황량함·추함·공포감 등의 감정적 요소도 포함되며, 깊게는 작가와 감상자의 일상·철학·사상·관념·인생관까지 감상의 주요 모티브로 삼을 수 있다. 추상의 영역은 비유컨대 정형화된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자유분방한 재즈이며, 고전발레가 아니라 그 어떤 몸짓도 허용되는 현대무용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 속에서 필요에 따라서는 의미상의 깊이와 형식상의 우열 등을 느끼거나, 논하거나, 문의하거나, 분석할 수 있으며, 단순히 시각적 이미지만 감상하거나 애호해도 무방하다. ‘봄빛’에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은 다양한 굵기의 빛줄기가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파장을 일으키는 선(線)의 율동적 구성미에 있으며, 여기에는 선(線)마다 각기 다른 변화와 조화로 인한 아름다움도 포함된다. 예컨대 뚜렷이 드러나는 굵고 새하얀 선(線), 배경색에 희석되는 선(線), 파동을 일으키는 선(線), 떨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선(線), 다양한 색의 선(線)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고요한 배경 화면을 율동(律動)의 공간으로 장식해 주고 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정취의 특징은 고요함을 가르는 선(線)의 파동, 곧 ‘정중동(靜中動)’이다. 그것은 조영재가 오랜 기간 탐구해 온 빛줄기에 대한 미적(美的) 해석이며, 빛줄기를 통해 나타낸 작가 본인의 심적(心的) 이미지이기도 하다. ‘봄빛’은 다양한 빛줄기의 파동을 통해 맑고 고요한 경계를 추구하는 조영재의 표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상 조영재의 과거와 현재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분석해 보았다. 조영재의 초기 계열 작품들이 주로 외향적으로 드러내는 강렬한 유형이었다고 본다면, 후기 계열 작품들은 강하고 화려한 과거의 색채와 필선(筆線)을 그림의 내부로 함축시킨 고요하고 정갈한 유형이어서 양자가 대조를 이룬다. 조영재의 최근작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가 다양한 색을 함축하여 은은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표현 방식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색의 채도를 크게 낮추는 방식이며, 또 하나는 금색을 포함한 서너 가지 이상의 다양한 색점(色點) 등을 서로 병치(倂置)하거나 겹치는 방식이며, 또 하나는 무채색과 담담(淡淡)한 색채를 나란히 함께 사용하거나 한 가지 계열 색의 명도(明度) 조절을 통해 그림 전체를 완성해 나가는 방식 등이다. 조영재가 남겨 온 두 계열의 그림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각자의 장점이 있으며, 작가의 심적(心的) 변화가 최근의 화풍으로 변모한 주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조영재의 생활 정서와 심적 변화에 대해서는 아래 단락에서 논하기로 한다.

생활은 예술의 원천(源泉)이다. 고대 중국미술의 대가(大家)들 가운데는 혼탁한 속세를 떠나 대자연 속에 은거(隱居)한 문인들이 많다. 형호(荊浩)·범관(范寬)·거연(巨然)·양해(梁楷)·육치(陸治)·담당(擔當)·석도(石濤)·팔대산인(八大山人) 등을 비롯하여, 그림만 남겨지거나 기록에만 오른 저명 화가들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이들이 은거(隱居)한 이유는 천차만별이었지만, 하나같이 명예와 이익 등의 잡다한 욕망을 버리고 자연의 품안에서 자유를 만끽했다. 이들은 자연의 변화를 깊이 감상하면서 그 속의 이치와 정신을 탐구했으며, 자연을 마음에 합치시켜 시로 읊고, 악기로 연주하고, 그림으로 남기는 등 자연 속에서 ‘문(文)과 예(藝)에 노닐었다.’ 예를 들어 보자면, 지형산(支硎山)에 은거한 육치(陸治)는 “고관대작이 찾아와 그림을 요구하면 집안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가도, 지나가던 과객이 그의 집 마당에 우연히 들어오면 그를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장소로 안내하여 종일토록 서로 즐거움을 만끽했다(‘명사’).” 또 북송(北宋)의 문인 범관(范寬)은 “북방의 깊은 산속에 기거하면서 늘 시야를 자유로이 하여 사방을 돌아보고 그 속의 정취를 얻었으며(‘성조명화평’),” “그가 마음과 대자연을 융합하여 화폭 위에 그려내면 그것이 그의 진실한 그림이 되었다(‘광천화발’).”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에 관한 기록이 더 많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산에 올라 물에 임하니 종일토록 돌아가는 것을 잊었고,” 양고(羊祜, 221–278)는 “산수를 좋아하여 매번 훌륭한 풍경을 만나면 반드시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는데 종일토록 싫증을 내지 않았다.” 남조(南朝)의 은사(隱士) 공형지(孔淳之)는 “산수를 좋아하여 깊은 산에 들어갈 때마다 늘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저명한 음악가 원숭(袁崧, ?–401)은 산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에 기거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는 것을 잊었고,” 저명한 은사(隱士) 종병(宗炳)도 “산수를 유람할 때마다 오랜 기간 그곳에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이들 또한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돌아가지 않고’ ‘질리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그 아름다움에 깊이 몰입했던 저명한 문인들이다. 고대의 화론가(畵論家)는 이러한 예술가들을 “대자연을 지극히 사랑하는 고질병을 앓은 사람들(泉石膏肓 煙霞痼疾)”이라 표현했는데, 이들에게는 생활이 곧 예술이었고 예술이 곧 생활이었다. 필자는 화가 조영재가 질박하면서도 맑고 우아한 화풍을 갖추게 된 원인에도, 자연인으로 살아 온 그의 생활 정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작업실 마당에서 아득히 먼 곳을 조망해 보면 첩첩이 이어진 군산(群山)이 빛과 안개와 구름을 끼고 희미하게 출몰하는 신비로운 변화를 볼 수 있는데, 특히 비가 온 다음 날이나 아침 햇살이 비칠 때면 구름안개 속의 경물들이 빛을 만나 조화를 이루는 장관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자연을 가끔 마주하는 필자의 느낌이 이러한데, 그 속에서 살아 온 조영재 본인의 감성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의 작가 노트에 이러한 글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장엄한 앞산과 구름의 움직임, 나무, 새와 개울물 소리, 그리고 피부를 스치며 지나가는 기분 좋은 바람은 존재의 기쁨을 가져다 준다.” 그가 대자연의 아름다운 정취에 젖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아울러 자연을 대하는 그의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주변의 자연물과 ‘기분 좋은 바람’을 통한 ‘존재의 기쁨’은 일종의 생기와 활력으로 상징되며, 또한 대자연이 화가 조영재에게 불어넣어 준 화사한 에너지로부터 느낀 ‘기쁨’을 의미한다. 조영재의 초기 그림들을 보면 자연 속에 홀로 남겨진 본인으로 상징되는 사슴 또는 새가 등장하는데, 그것의 시각적 존재감이 자못 인상적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주변 배경도 곱고 화려하지만, 새와 사슴은 특히 곱고 사실적이어서 화면에서 가장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필자가 감히 추측해 보건대, 이 시기에 조영재가 느낀 대자연의 빛은 그 속의 본인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림들이 모두 원색으로 만연하며 주제인 사슴과 새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그림 위의 모든 사물이 그림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화려함과 존재감을 뽐내며, 화면 가득 생동감이 넘친다. 필자가 그의 초기 작품에 관한 내용을 또 끄집어내는 이유는, 조영재의 최근 작품들이 심상(心像) 방면에서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영재의 최근 정서를 조금 엿보지 않을 수 없는데, 그의 사생일기(寫生日記)에 이러한 말이 나온다. “구름은 잠시 모양을 만들다가 바람에 흩어져 대기(大氣)로 사라진다.” “깊은 밤 강가에 앉아 무심히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본다.” 내용이 자못 사색적(思索的)이다.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심적(心的) 변화가 있었던 듯하며, 글에 나타난 그의 정서가 초기 작품에서의 ‘환희와 열정 혹은 생동감’이 아님은 분명하다. 글 내용에 탈속적(脫俗的)·선적(禪的) 정취가 물씬 풍기는데, 이는 그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 화려함·분명함·정밀함·강건함이 아니라 무상적(無常的)·사색적(思索的)·심상적(心象的)·관념적(觀念的)·탈속적(脫俗的)이며, 그의 최근 작품에 나타나는 시각적·심상적 정취와 일치한다. 즉 조영재가 쓴 사생일기의 내용이 은유적·함축적·사색적·탈속적이듯이 그의 정서와 감정도 그러했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그림에도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강조하는 예술가의 진실한 생활 감성이다.

조영재의 그림을 모두 감상해 보면, 그가 줄곧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음을 느낄 수 있으며, 그 마음을 그림 위에 이상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재료와 기법을 깊이 연구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수한 예술적 감성과 예술적 기량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깊은 사고(思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역대의 우수한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조영재 역시 기법(技法)·소양(素養)·견식(見識)·감성(感性)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오랜 기간 부단히 노력해 왔고, 앞으로도 물론 그러할 것이다. 조영재는 화가가 가져야 할 다양한 요건을 기본적으로 모두 갖춘 견실한 화가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주요 표현 대상인 자연 속에 살면서 늘 자연과 정신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며, 이러한 환경은 조영재의 작품이 생장(生長)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예술적 토양이자 원천이다. 이 때문에 조영재의 그림에서는 소박하고 진솔한 그의 성격과 더불어 신비롭고 생명력이 넘치는 대자연의 정취가 묻어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가 그의 그림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줄곧 그러해 왔듯이 필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조영재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가 필자의 오랜 벗 조영재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행사가 되길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조영재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남기고 싶은 말이 많이 있으나, 핵심 내용에 지장을 주는 잡다함을 걷어내고자 여기서 졸필을 내려놓는다. 먼 미래에 조영재의 그림을 바라보는 그들의 높은 안목을 어지럽히지나 않을지.//김병식//

장소 : 한새 갤러리
일시 : 2026. 10. 21 –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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