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옥展(써니갤러리)_20200507

//평론//

단절 없는 사물들의 언어

강선학

사실적인 묘사를 위주로 하는 작업은 대체로 자기 자신의 언어를 내세우는 대신 사물이 가진 객관적인 형상에 충실 하려 한다. 객체에 반응하는 과잉의 주관을 절제하려는 태도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자 자신을 낮추는 의미들로 이해된다. 때로 사유의 허약성을 숨기는 허위의식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현대미술이 가진 과도한 자아의 표출이 아니라 자연에 충실 하려는 세계관으로 여겨진다.

이영옥의 작업은 그런 일반적인 분류보다 이 양자 사이에서 얻어지는 자연과 인위의 상의성(相依性)으로 화면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대상에 과도하게 매여있는 사실적 묘사를 넘어서고자 한다. 정물화에서 반복되는 소재도 소재 자체에 대한 관심이거나 묘사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같은 맥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기호에 가깝다. 그녀가 유독 집착하는 소재는 화면을 구성하는 기표로서 역할이지 일정한 의미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리적 기저를 읽게 하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일반적인 사실화에서 목격되는 사물의 구체성에도 불구하고 전제된 실제의 대상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 같지 않다.

풍경화 역시 사실적인 묘사나 정경을 옮겨 놓은 듯하지만, 실제 하는 대상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기반을 두고 밀도 있게 장소를 이해하려는 태도도 아니다. 장소를 이해하려는 것보다 감정적 호응을 얻으려는 어떤 분위기, 공간에 놓인 위상의 표시로 여겨진다. 사실적 인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하는 풍경을 거부하면서 시작되는 세계, 자신이 만들고 구성한 풍경이자 정물로서 세계를 말하고자 한다. 화면 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변화, 질감과 색상은 외부의 빛에 드러나는 형상들이 아니라 내면의 빛으로 드러나는 사물들이 공간과 호응하는 이미지에 더 가깝고 그런 시현에 매료되어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비탈길을 중심으로 골목길로 밀고 나와 좌우로 펼쳐지는 헌책방의 서가들. 그 속의 책을 한 권, 한 권 묘사로 드러내는 개별화는 책들 사이의 변별보다 질감의 형상화에 가깝고, 한 권의 책이 가진 선과 형태와 공간은 화면 전체의 구조, 재질감을 이루면서 화면을 해체하고 종합하면서 이어지는 화면을 만드는 논리적 특징과 연관된다.

철길에 붙여 날림으로 얽은 듯 낡고 조잡한 집들, 나무 판재와 슬레이트 지붕, 루핑으로 덮인 풍경은 선이나 면으로 분할되고 재구성된다. 사실적인 형태보다 그들이 내보이는 질감이 더 두드러지고 철로 변의 가난을 보다 잘 대변한다. 철길 옆으로 나온 세간살이와 크고 작은 독들, 철길 위에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세밀하지 않지만, 단색조의 색상과 구성으로 드러나는 대략의 모습으로도 기억 저쪽의 공간이자 시간 속에 숨어 있는 현실감을 환기한다.

이런 풍경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지만, 이 시기의 색상과 재질감은 실내의 정물에서 목격되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블라인드가 조금 올라간 창가 실내 쪽으로 모과, 석류, 마른 꽈리, 해바라기, 붓통, 공작 깃털, 마른 연대, 반쯤 열린 서랍과 그 속에 든 물감들이 보이는 책상, 정물대로 쓰인 의자와 등받이에 걸친 수건, 의자 위에 놓인 팔레트, 바닥의 기름통과 붓, 기타 소품들이 있는 ‘실내’는 단색조의 색상을 바탕으로 빛과 그늘을 적절하게 드러내며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이런 소재는 여느 정물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성을 띠지만, 눈에 띄는 것은 블라인드 안으로 들어오는 빛에도 불구하고 음영의 효과로 대상을 묘사하거나 사실성을 높이려는 것보다 질감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형태나 색상 대신 질감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현실적인 정합성보다 촉감적 감응에 주목하고, 대상의 입체감이나 현실적 빛에 대응하는 색상보다 내면과의 교호에 초점이 놓인다. 질감이 자신만의 형식미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보다 조금 후기에 나온 작품이지만 비슷한 맥락을 보이는 작품으로, 회색과 흰색이 적당히 혼합된 창틀을 중심으로 그려진 실내정경이 있다. 창가는 나이프로 물감을 바른 듯한 효과가 드러난다. 그 사이 바깥과 연결되는 창이 있고 창틀에 놓인 석류, 모과, 화병, 오른쪽 벽에 걸린 마른 꽃대, 그게 전부인 화면이다. 창밖은 어둠이 짙고, 어둠 사이로 남은 빛에 드러나는 건물들과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창안의 밝음과 창밖 어둠이 대비적 구조를 대신한다. 시선은 창밖으로 나가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이고 창가에 놓인 정물들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정물들,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묘사되거나 사실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외양을 갖고 있지 않다. 실내조명에 의해 드러나는 실제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를 덮고 있는 빛의 효과로서 재질감, 사물은 질감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거의 평면에 가까운 형태감을 보인다. 전체적인 인상은 구체적인 사물로 묘사되지만 단축법의 구사조차 거부하는 평면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대상을 주관적 반응으로 드러내려 했는지, 사물의 객체를 중시하는 사실주의적 태도로 마주했는지 헤아리게 된다. 당연히 사물 자체의 질감의 효과에 치중하고 그 질감이 안겨주는 다른 현실에 초점이 놓여 있다.

초기의 ‘목선’도 이런 형식과 다르지 않다. 정박 중인 작은 어선인 목선 주변의 소도구들을 중심으로 어항의 한편을 표현하고 있는데, 물의 표현에서조차 붓으로 칠하기보다 나이프로 바른 듯 한 재질감으로 효과를 낸다. 그것은 형태보다 운동감, 정박 중 물길에 몸을 맡기고 있는 배의 운동감을 파문이 번져나가듯 두터운 질감으로 표현, 중의적 효과에 주목하게 한다.

초기에 보이는 재질감에 대한 관심은 중후반기의 마아블링이나 번지기의 기법으로 이어진다. 이 기법은 객관적인 대상 묘사에 효과적이기보다 우연적인 효과를 나타내는데 효율적이다. 이런 기법을 기반으로 대상을 묘사하거나 구성한다는 것은 사물을 객체로 파악하거나 장악하기보다 그것에 연유하는 감응에 더 민감하다는 것이다. 사실 화면은 구체적인 정황을 드러내기보다 내재적인 관계로서 구성된 관계의 역할들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제작 시기로 봐서 중후기에 많이 다루는 여주, 표주박, 수세미, 방울토마토 따위에 마블링이나 번지기가 배경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물은 옥상정원이라는 현실의 배경을 잃고 사물 자체의 현실적 위상보다 화면에 놓인 구성적 요소로 긴밀해진다. 구체적 사물을 현실에서 유리시킨 대신 조형적 배려가 우선시 된 것이다. 평면화됨으로 얻어지는 추상성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그리기로서 행위와 사물 간의 의외적 만남, 현실의 정합성보다 대상을 대하는 심리적 감흥이 주요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단순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기보다 묘사가 생략됨으로 사물에 빠지지 않고 정서적 교감이 사물을 넘어서서 작동한다.

이런 소재 외 모과, 석류, 꽈리, 램프, 마른 꽃, 배경으로 삼는 번지기, 긁기의 흔적은 현실감보다 소재들의 느낌, 이미 체험된 추상으로 만나게 된다. 질감이야말로 사물을 입체로서 보다 평면으로 보게 만들고 평면으로 대체된 사물들은 묘사가 아니라 추상성을 띤 느낌을 전달하는 매체가 된다. 단색조의 색상 운용이나 반복되는 소재들이 단조로운 데도 변화를 보여주는 임의성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인상은 이런 요인에서 비롯된 것일 거다.

근래 작업에서 활용되는 마블링이나 번지기의 임의성은 풍경으로 드러날 때 한몫을 더 한다. 하늘이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하는 구성에서 읽게 되는 의미와 배치는 풍경의 정황을 묘사하거나 옮겨 놓기보다 하늘이 주는 우연성의 인상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하늘의 우연성을 구름이 대신하는데 그 구름은 관찰한 대상이 아니라 물감이 번진 자국에 가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시로 변하는 하늘의 변화를 잡는데 구체적인 구름의 모양을 잡아내는 관찰이나 순발력보다 그것들이 이루어지는 우연성을 원리로 삼아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효과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블링이나 번지기만한 기법이 없다. 그러나 그 기법이 곧 사실성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이해와 다르지 않다. 그리기나 붓, 나이프의 활용이 묘사에 용이하지만 소재로서 갯바위들의 절면을 표현하는 데 더 적절하고, 우연적인 효과는 사실적 묘사보다 한층 다양한 표현을 얻게 한다. 말하자면 묘사를 통한 대상의 효과, 지각, 질감은 재료와 대상의 자율성을 구속하는 것이다. 작가의 인위적인 묘사력보다 재료의 물성이나 대상의 사물성을 그 자체의 우연적인 효과 속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배경이 현실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의 반응이 만드는 임의적인 행위가 현실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감응하는 자신에 대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만남을 현시하는 것이다.

전 시기에 걸쳐 목격되는 것은 무엇보다 마티에르나 긁기, 번지기, 마블링에 의해 손에 잡힐 것 같은 질감이다. 그는 대상을, 세계를 촉감적인 접촉을 통해 만나고 있다. 촉감은 형태나 색상과의 관계보다 시각적이지만 직접성에 호응하는 실재감에 가깝다. 다루고 있는 정물이나 풍경에서 드러나는 일련의 소재들을 통해서 세계를 묘사나 객관적인 사물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비친 현실감에 호응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적 표현에 대한 또 다른 지점이다.

이영옥의 이번 전시는 그동안의 작업을 아우르는 것이지만, 내 언어, 작가의 언어로 대체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언어가 드러남으로 나를 이끄는 형상들의 세계가 드러나게 됨을 보여준다. 그것은 소재들의 물성을 그 자체의 흐름에 맡겨둠으로 생기는 효과이지만 그것이야말로 객체와 주체, 대상과 감응, 그리기와 우연성 사이에 단절 없이 이어지는, 형식이 내용인 자신의 조형적 성취다.//강선학(미술평론)//

장소 : 써니 갤러리
일시 : 2020. 05. 7. –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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