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미展(사상 갤러리)_20201130

//평론//
서상욱(역사칼럼니스트, 평론가)

같이 가고 싶은 길.
벌써 몇 년 전이다. 김해의 작은 갤러리 카페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났다. 몇 명의 작가들과 함께 한 전시였는데 유난히 마음을 끈 작품이 있었다. E.F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의 제목이 제1 감으로 떠올랐다. 손영미도 작았다. 그를 직접 보고 난 후의 제1 감은 작은 사람이어야 크고 넉넉해진다는 깨달음이다. 작아야 아름답고, 작아야 위대하고, 작아야 영원하다는 역설을 그와 그의 작품이 수줍게 말한다.

클로즈업된 커다란 꽃과 하늘을 찌르며 솟구친 뉴욕의 마천루를 그린 조지아 오키프가 부상하는 미국의 기세와 욕망을 그려냈다면, 손영미는 장자에서 대붕의 비상을 보고 의아해하는 작은새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작은새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이 이렇게 속삭인다. ‘삼라만상은 모두 작은 것들의 모임이지요.’
당시 나는 서울을 떠나 삼랑진 구천산 속에서 살았다. 역사와 철학은 미세한 근본에서 거대담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익어간다. 구천산은 나에게 발효의 공간으로 적당했다. 그러나 발효를 촉진할 알맞은 효소가 없었다. 천 길 벼랑에 떨어지다가 간신히 나무뿌리에 매달려 손을 놓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에게 그의 그림 속에 있던 가는 선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선들은 공중으로 퍼지더니 그물로 변했다. 안심하고 그물로 뛰어들었다. 아주 가끔 그와 만나면 속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나의 구천산 3년 살이는 손영미와 그의 작품이 자양분을 주었다.
파스텔톤의 원색으로 그린 장면들은 어디나 서로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졌고, 그 사이를 갖가지 가는 선이 수줍게 잇고 있다. 선들은 모두 오방색이다. 자세히 보면 거기에는 생명의 발아가 있다. 모든 생명은 작은 씨앗에서 커지고, 자연은 자양분을 공급한다. 자연과 생명의 교환은 거래가 아니라 조화이다. 거래에는 이해관계가 개입되지만, 조화는 함께 어울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거래의 마찰은 파국과 투쟁으로 이어지지만, 조화는 성립되지 않아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반자도야(返者道也), 돌아가는 것이 도라고 했던가? 그는 자기 그림 어디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오방색 선을 길이라고 했다. 길은 연결을 의미한다.
과학 기술의 혁명은 점차 고립된 자아를 양산한다. 나르시즘의 병리적 상태는 자폐이다. 타자와의 연결이 차단된 상태이므로 고립된지도 모른다. 소외가 타자에 의한 강압 때문이라면, 고립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그의 그림에서 수줍은 에로티즘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나르시스트에게 보내는 손길 때문이다.
‘이리로 와 보세요. 같이 가고 싶은 길이 있어요.’
늘 그렇게 말한다. 손영미와 그의 그림이.//서상욱//

장소 : 사상 갤러리
일시 : 2020. 11. 30. –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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