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展(갤러리 네거티브)_20201205

//전시소개//
갤러리 네거티브에서 김홍희 사진전 <동경은 따뜻한 겨울이었지 Warmth in Winter Tokyo>을 연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김홍희 사진가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비주얼아트에서 사진을 공부하며 생활하던 시절 촬영한 필름 사진 약 서른 점으로 구성된다.
1980년대는 도쿄가 버블경제의 정점에 있던 때이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작가는, 앞으로 도쿄가 버블 경제로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자적 안목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도쿄에 사는 소시민의 삶을 목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시는 일본의 소시민들이 도쿄에서 떠밀리고 떠밀려 여러 위성 도시로 피난을 가듯 이주를 하던 때였습니다. 도쿄 외곽에 나가면 새로운 집, 새로운 콘크리트 아파트에 이주해 살고 있는 소가족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지요. 내 눈에는 그들이 행복해 보였지만 한편 왠지 알 수 없는 연민도 느껴졌습니다.
부산보다는 따뜻했지만, 부산과는 다른 습도를 머금은 냉기가 익숙치 않게 다가왔던 그때의 도쿄.35년 전 청년 김홍희는 따뜻하지만 겨울인, 겨울이지만 따뜻한 도쿄에 집중하고 있었다. 1989년, 신주쿠 니콘살롱 초대전에서 선보였고, 1926년부터 만들어진 일본 사진잡지 ‘아사히카메라’에 게재되기도 한 작품들을 포함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의 초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노트//
사진 귀신이 씌었는지 밤마다 같은 꿈을 꾼다. 노출과 포커스를 맞추고 셔터를 끊으면 ’찰칵‘ 하는 셔터음이 없이 맥없이 눌러진다.
“또 고장이다”

밤마다 결정적 순간에 끊은 걸작이 셔터 고장으로 매번 수포로 돌아가는 꿈.
내 20대와 30대를 잠 못 이루게 한 귀신들린 사진병이었다.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산토리 위스키를 유리잔 가득 마시고 새벽이 되도록 웅크리고 앉아 있기를 2년 여. 이런 꿈을 매일 밤, 자그만치 2년 동안 꾸었다.

사진의 ’사‘자도 모르면서 입학한 사진학교.
한국의 부모 형제를 뿌리치고 떠난 일본 생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한없는 불안.
이것이 35년 전의 내 모습이다.

오는 12월 5일 부산의 갤러리 네거티브에서 하는 이번 전시는 그 때의 내 모습이다. 한없이 부끄럽고 소심하기만 했던 젊은 날의 초상.
지금도 역시 그 시절로부터 한 발자국도 못 내 디딘 노년의 초입.

내가 여전히 사진 귀신에 붙어 어쩔 줄 모르는 줄 알겠지만 당신만 알고 계시길.
내가 바로 그 사진 귀신이라는 것을!

//작가가 전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1989년 신주쿠(新宿) 니콘 살롱(Nikon Salon)에서 내 생의 첫 사진전 제목이 바로 <동경은 따뜻한 겨울>이었다.

당시의 동경은 버블 경제의 정점을 치닫고 있었다.
돈과 물건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말 그대로 지상 낙원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시절 나는 일본에서 혼자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배고픈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나는 긴자나 신주쿠의 전시장이 오픈하는 날이면 자주 들렸다. 거기에는 언제나 푸짐한 음식과 맛난 음식들이 있었고 누가 일부러 와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진을 하게 된 동기도 이와 비슷했다. 하루는 랭귀지 스쿨의 벽보에 찢어진 신문이 붙어 있었는데 ’일일 사진학교 입학식‘ 광고였다. 거기에는 친절하게도 점심 식사 무료 제공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쭉쭉빵빵 이쁜 모델 아가씨 촬영도 공짜에 점심까지 무료로 준다니!
얼씨구나 하고 찾아간 곳이 나의 모교가 될 줄이야.

스튜디오에는 눈부신 모델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카메라를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조교들이 일일 입학 체험자들이 찍은 사진을 프린트 해서 나누어 주었다. 마음에 들어하던 모델 사진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동안 선생님의 크리틱 시간이 되었다.

나는 같은 모델을 찍은 선생의 사진과 내 사진이 비교 되는 순간 전율했다. 선생의 사진에는 살아있는 모델이 있었고 나의 사진에는 포커스가 나가고 흔들린 형편없는 솜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담당 선생이 “자네 사진은 포커스와 맞지 않고 손을 떨었네”라고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 전혀 안목도 반성도 없는 사진을 보고 스스로 감동하고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진 것이다.

’도쿄 비주얼 아트’의 신입생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점심 한 끼를 때우러 간 우연 속에서 발생한 대사건이었다. 도시계획을 공부하러 갔던 청운의 푸른 꿈이 한순간에 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당시 나는 어떤 형태로든 내 스스로 돈을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집에서는 1원짜리 한 푼도 지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카메라 몸체를 하나 사고 또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번에는 35미리 렌즈를 하나 샀다. 몸체와 렌즈가 하나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은 필름과 인화지와 약품을 살 돈이 없었다. 또 아르바이트를 해서 필름과 인화지를 사서 매일 카메라를 메고 시간이 나는 대로 미친 듯이 동경을 찍었다.

이 전시가 바로 그 때의 동경이다.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 35년이 되었다. 겨울의 동경은 따뜻했지만 습기 찬 동네의 추위는 부산과 달랐다. 싸늘하게 옷깃을 파고 들었다. 따뜻했지만 겨울이었고 겨울이었지만 따뜻했다.

나는 당시의 동경을 버블 경제로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자적 안목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저 동경에 사는 소시민의 삶을 목격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따뜻하지만 겨울인, 겨울이지만 따뜻한 동경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소시민들은 동경에서 떼밀리고 떼밀려 위성 도시로, 위성 도시로 피난을 가듯 이주를 하던 시절이었다. 동경의 외곽에 나가면 새로운 집, 새로운 콘크리트 아파트에 이주해 살고 있는 소가족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들이 행복해 보였지만 한편 왠지 알 수 없는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우에노 공원에서도 만난 가족도 마치 가족 유람단처럼 동경 관광을 왔지만 피곤에 절어 있었다.

당시는 동경 땅 모두를 팔면 미국 전토를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동경은 자본이 완전히 잠식 해 정말 부자가 아니면 동경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동경에서 더 견딜 수 없던 소시민들은 동경을 떠나 300만 명이 동경 밖으로 이주 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 때 본 것은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지금 감히 추측해 본다.
왠지 아리고 쓸쓸한 분위기의 사진. 지금 일본은 망해가고 있다.
당시 버블 여파가 때문인지 정보화 시대와 4차 산업 시대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본 것은 부의 범람으로 인해 진정 챙겨야 할 것을 챙기지 못한 일본 동경의 당시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일본의 생존과 직결 되면서 현실로 다가 온 셈이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떤가?
여지없이 일본의 발전을 따라 온 우리는 진정한 모습은 어떠한가?

30년 전 유학 시절에 찍어 일본 신주쿠 니콘살롱에서 초대전을 하고 ‘아사히 카메라’에 실렸던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면서 일본의 데자뷰가 한국 땅에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경은 따뜻한 겨울이었지’가 당신과 나에게 답을 구하고 있다.//

장소 : 갤러리 네거티브
일시 : 2020. 12. 05. – 2021.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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