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연展(갤러리 화인)_20231109

//전시 평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연기(緣起)
: 찬주 박정연의 추상화

                                                김이순(미술평론/미술사)

I. 왜 그림을 그리는가

‘나에게 그림 그리는 행위는 마음공부하는 수행의 자취…
이 행위를 통하여, 존재의 심연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림과 함께 하는 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드리우리라.’

찬주(燦柱) 박정연(朴正連, 1968년생)이 2008년 개인전 브로셔에 남긴 작가노트다. ‘왜 그림을 그리는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의 목적 혹은 의미에 대한 질문은 화가들만의 것은 아니다. 미술사를 공부해온 필자는 이 점이 매우 궁금하여 얼마 전부터 미술사가들의 저작물이 아니라 미술가의 저술이나 작가노트를 살펴보곤 하는데, 글의 길이가 길든 짧든 작가노트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파악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임이 분명하다.
박정연 작가를 알게 된 것은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봐왔고 그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도 익히 알고 있지만, 최근에서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라는 화두를 중심에 두고, 그의 작품을 그의 수행적 삶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II. 박정연과 소나무
찬주 박정연이 즐겨 그리는 모티프는 소나무다. 대학 시절에는 절규하는 인물, 피골이 상접한 소외된 인간, 인체를 연상시키는 말린 명태, 가오리 등을 동양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과감한 색과 붓질로 표현했으며, 자연 풍경을 사생한 수묵 실경산수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91년 제1회 개인전에서 《人間 · 현장스케치》라는 타이틀로 전시되었다. 대학 졸업 후 결혼과 출산이 이어지면서 작품활동과는 먼 생활을 하던 그는 깨달은 바가 있어 10여 년 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학원에 진학한 후 제2회 개인전을 연 것이 2004년이다. 그가 소나무라는 단일 모티프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부터일 것이다. 한때 근사한 소나무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스케치를 하고 때로는 현장에서 남다른 필력으로 박진감 있게 소나무의 기운을 화폭에 담아내기도 했던 박정연은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 작가’ 중 한 명으로, 2020년에는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기획전 《松下步月》(2020.11.26~2021.1.31)에 출품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소나무는 그의 삶 속에 언제나 존재했다. 어렸을 적 학교를 오가던 길에서 늘 마주하던 소나무는 화가로서의 삶에서도 함께였다. 그의 소나무 그림은 독야청청하게 한 그루만 그려진 경우도 있고, 두 그루의 소나무가 어우러지거나 숲을 이루기도 한다. 그의 소나무는 현장 스케치를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 소나무의 형상을 기본으로 하지만 표현의 스펙트럼은 넓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상시키는 문인화풍의 간일한 소나무를 그리는가 하면, 선종화처럼 과감한 붓질로 소나무의 둥치를 표현하기도 하고, 음양오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방색으로 소나무의 둥치에 색을 더하기도 했으며, 점차 노란소나무를 즐겨 그리더니, 마침내 단청 안료를 도입하여 독특한 황금소나무를 탄생시켰다. 혹은 종종 인체를 닮은 소나무를 그리기도 했으며, 소나무 그림에 ‘자화상’이라고 명제를 붙일 정도로 소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소나무의 형상과 색에 천착하여 그러던 그가 2년 전에 열린 부부전, 《금슬상화전》(금련산역 갤러리, 2021.12.28~2022.1.2)에 소나무가 추상화된 작품을 선보였다.

III. 무심무념 상태의 시각화
이번에 열리는 열 번째 개인전 역시 소나무를 소재 삼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이번 출품작들에서는 소나무의 형상이 와해되었다. 먹만으로 그렸든 안료를 사용하였든 소나무의 껍질을 클로즈업한 것 같기도 하고 속살이 드러난 것 같기도 한데, 어떤 경우에도 서사나 재현은 일절 없다. 대체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것일까?
20년 가까운 세월을 소나무 그리기에 전념했기 때문에 구상적인 표현에서 추상적인 표현으로의 이동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프로세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잔 이후의 현대회화에서는 형상이 해체되어 배경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평면화를 이루었고, 이런 이유에서 추상미술을 현대적인 미술로 평가한다. 그러나 박정연의 경우는 이러한 일반론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사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추상적인 작품들은 작가가 의도한 변화라기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 묵상하던 수행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박정연의 추상적인 작품이 지닌 의미를 논하기에 앞서 기법과 제작과정을 살펴보자.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은 파라핀 염색 기법에서 시작된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배운 파라핀 염색 기법을 2004년 제2회 개인전에 출품한 소나무 그림에 접목하기 시작했다. 광목천에 파라핀 염색을 한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불규칙적 선으로 척박한 땅을 표현했다. 부분적으로 잘리기도 한 상처투성이의 뿌리는 거친 황무지에서도 굳게 자라는 소나무를 강조한다. 이후에도 파라핀 염색 기법으로 만들어낸 불규칙한 선들로 독특한 조형미를 창출했는데, 실타래처럼 엉킨 불규칙하고 예리한 선들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깊은 심연을 표현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추상적인 작품에서 파라핀 염색 기법은 더욱 중요한 표현 요소로 보인다. 앞선 시기에는 구상적인 소나무의 뿌리 주변을 표현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면, 추상적인 작품에서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다. 파라핀 염색 기법으로 우연적이고 자유로운 선을 만든 다음, 작가는 그 선을 화두로 삼아 직관에 따라 선이나 색을 덧붙여 나간다. 앙드레 마송(André-Aimé-René Masson, 1896~1987)이 모래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로운 선과 형태를 보고 이미지를 상상하며 선과 색을 덧그리면서 내면의 의식을 끄집어내듯이, 박정연 역시 자유로운 선에 직관적 감각을 더해 그림을 완성해간 것이다. 그렇다고 박정연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로 분류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이성을 통제한 상태에서 무의식을 끄집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면, 박정연은 무심무념(無心無念)의 상태를 물질적인 재료를 통해 시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두드러진 중요한 특징은 대형 작품만이 아니라 10호 미만의 소형 그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한때 700호 크기의 작품을 제작할 정도로 저력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는 1호 크기의 작품들이 있는데, 작가에 따르면 큰 작품보다 1호 크기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고 한다. 작을수록 내용을 압축해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리는 데 소요하는 시간이란 단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박정연은 그림 그리는 일을 수행으로 삼는 작가다. 대부분의 작가가 그러하겠지만, 그는 특히 일상의 삶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고 무심무념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만 붓을 들고 작업을 한다. 그 상태는 찰나일 수도 있고,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파라핀 염색 기법으로 자유롭게 표현된 우연적인 선과 형상을 무심무념의 상태에서 관(觀)하고, 그런 상태에서 작동하는 감각으로 선과 색을 덧그려 나가는 것이다.
박정연의 작품은 추상화로 보이지만, 가만히 작품을 들여다보면 바위나 풍경이 보이기도 하고 그가 오랫동안 그려온 소나무 둥치의 껍질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부분적으로는 겉껍질이 벗겨진 상태의 속살이 보이기도 한다. 형상과 배경은 구분되는 듯하지만 사실 뚜렷한 경계는 없다. 그 결과 그림은 평면화되었고 추상화적 경향을 띤다. 이러한 작품들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해체하며, 형상과 배경, 안과 밖, 본질적 요소와 부차적 요소를 분별하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림들을 클레멘트 그린버그 모더니즘의 핵심인 ‘평면성’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동양화에서 그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는 ‘여백’처럼, 그는 있음과 없음, 안과 밖,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화하고, 가시적 세계를 비가시화한다. 최근 열린 《환대의 식탁 – 마주하다》(갤러리 아트 한, 2023.7.22~8.17) 초대전에 남긴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는 박정연이 요즘 무엇에 몰입하고 있으며 왜 추상화로 변모했는지를 짐작게 하는 열쇠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비추고자 한다.’

장소 : 갤러리 화인
일시 : 2023. 11. 09 – 11. 16.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