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식//
조미화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이 화면이 무엇을 보여주는지보다 얼마나 오래 이어져 왔는지가 먼저 느껴진다. 한 번에 만들어진 장면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조금씩 밀어 올린 시간처럼 보인다.
주사기 끝에서 나온 물감이 선이 되고, 그 선이 다시 다음 선으로 이어진다. 급해지면 금방 흔들리고, 힘이 달라지면 두께가 달라진다. 그래서 이 작업은 형태를 만들기 전에, 그리는 사람의 상태를 먼저 드러낸다. 손의 리듬과 호흡이 맞아야만 이어질 수 있는 선들이다.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만 같은 선은 없다. 아주 미세한 차이들이 겹치면서 화면이 만들어진다. 멀리서 보면 단정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안에는 지나온 시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끊어진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시 이어지고, 이어지다가도 미묘하게 어긋난다. 그 작은 차이들이 이 작업의 밀도를 만든다.
그래서 이 화면은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계속되고 있는 과정에 가깝다.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그리는 동안 어떤 상태로 있었는지가 더 또렷하게 남는다. 선을 긋는 동안, 생각은 줄어들고 호흡만 남는다.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의 화면이 된다.
이번 전시는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미 만들어진 것을 설명하기보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시간을 그대로 보려고 한다. 한 장의 이미지를 이해하기보다, 그 안에 쌓인 순간들을 따라가 보려는 쪽에 가깝다.
그 앞에 서면,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 무엇이 보이는지보다, 얼마나 오래 이어져 왔는지를 보게 된다. 화면은 조용한데, 그 안에서는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
그리는 동안, 시간은 멈추지 않고 남는다.//모마 K 갤러리//

//작가 노트//
1 선이 머무는 자리-밝음으로
아침, 커텐 사이로 빛이 스며들면 쪼그라들어 있던 마음이 조용히 펴진다. 다림질한 흰 셔츠처럼, 구겨졌던 내면이 아무 일 없던 듯 다시 숨을 쉰다. 나는 늘 경계의 바깥에 서 있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낯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방향을 잃고, 같은 자리를 맴돌다 다시 돌아오는 일들.
그래서 나는 믿지 못할 순간의 감정과 떠도는 생각 대신 선을 긋는다. 주사기 바늘 끝에서 시작된 한 줄의 선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며 화면 위에 쌓인다. 그 반복은 무엇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나를 붙잡아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하는 방식이다. 선 하나에는 숨의 길이와 손의 떨림, 그리고 마음의 결이 그대로 남는다.
물감이 바늘을 지나 캔버스에 닿을 때, 내 안에 오래 머물던 불안과 집착, 회한이 조용히 빠져나온다. 그렇게 선은 쌓이고, 시간도 쌓인다. 어느 순간 선은 면이 되고, 나는 그 안에서 또 하나의 공간을 만난다. 그곳은 특별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감정을 붙잡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저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고요에 가까운 곳이다.
나의 선 작업은 광막한 화면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하나의 존재의 흔적이다. 지나온 시간과 공간, 불안과 집착, 슬픔은 이곳에서 다른 결로 스며든다. 기쁨으로, 감사로, 말없이 번지는 밝음으로. 선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선이 이어지듯, 나는 그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오늘의 나를 그대로 통과시키는 시간. 그 가벼워진 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마주한다.
2 선:線을 쌓다-밝음으로
경계의 바깥을 서성이며 낯선 시공간 속에서 길을 잃던 나는, 한 줄의 선을 그으며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닿고자 했던 나의 섬, 나의 동굴. 쉽게 닿지 못했던 그곳은 내면의 가시를 뽑아내며, 나를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의 작업 도구는 붓이 아닌 주사기다. 주사기 바늘 끝에서 밀려 나오는 가느다란 물감의 줄기가 단순한 조형 요소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며 선을 긋는다. 그것은 믿지 못할 마음을 다독이며 밝은 길을 찾아가는 흔적이다.
선을 긋는 행위는 흩어지는 나를 붙잡아 현재에 머물게 하는 하나의 수행과도 같다. 주사기를 압박하며 물감을 밀어낼 때, 내 안의 해소되지 못한 불안과 집착, 켜켜이 쌓인 회한들은 바늘 끝을 통해 조용히 빠져나온다. 선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마음의 무게는 그만큼 가벼워진다.
반복되는 선들은 층층이 쌓여 어느덧 하나의 면이 되고, 그 면은 다시 내가 숨 쉴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된다. 그곳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자리이며, 그저 흘러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평온의 장소다.
광막한 캔버스 위에 남겨진 선의 자취들은 내가 이 세상을 잠시 머물다 간다는 존재의 증명이기도 하다. 과거의 슬픔과 불안은 주사기 끝을 통과하며 기쁨과 감사, 그리고 밝음으로 이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새로운 선이 시작되듯, 나는 오늘도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통과시킨다. 그렇게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반복의 선 끝에서, 나는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진다.
3 HOMO-VIATOR _길을 걷는 사람
어설픈 이방인인 나는 늘 경계의 바깥에 서 있다. 낯선 시공간 속에서 숱하게 좌표를 잃고, 도돌이표를 찍듯 길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일상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나의 습성은 결국 또다시 동굴을 향해 걷게 한다.
‘HOMO-VIATOR_길을 걷는 사람’ 작업은 불안정한 감정과 이성이 화해하는 나의 기도다. 반복적으로 층층이 쌓아 올리는 선을 긋는 행위는 ‘지금, 여기’에 머무르고자 하는 하루의 미약한 흔적이기도 하다.
내면을 다독이기 위해 선을 긋는 작업은 물리적으로도 매우 까다롭고 고된 과정이다. 물감이 주사기 바늘을 통과해 한 줄의 선으로 캔버스에 드러날 때, 마치 내면 깊이 박혀 있던 가시가 뽑혀 나오는 듯한 감각이 일어난다. 그렇게 반복되고 쌓여가는 시간과 선이 어느 순간 면으로 확장될 때, 나에게는 또 하나의 시공간이 열린다.
그곳은 숲속에서 지름길을 찾지 않고, 시시때때로 출렁대는 내면의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평온이 머무는 자리다.
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선이 이어지듯, 나는 그 선들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걷는다. 편안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걷는 이 길은, 내가 닿고자 하는 섬을 향한 걸음인 동시에 오늘 이 자리에 온전히 스며들고자 하는 마음이다.
4 작품설명
‘HOMO-VIATOR_길을 걷는 사람’은 3ml, 5ml, 10ml, 20ml의 주사기를 도구로 삼아, 반복과 연속,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선의 축적을 통해 개인적 사유를 이미지화한 선묘 작업이다.
주사기를 통해 그어지는 선은 일정한 속도와 힘을 요구하는 반복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 이 축적된 시간의 흔적은 단순한 조형을 넘어, 작가의 내면과 작업 의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신체적 통제와 정신적 몰입이 맞물리며, 서로 다른 길이의 선들이 겹쳐지고 쌓여 화면 전반에 균질한 질감을 형성한다.
세부적으로 보면 일정한 두께의 직선과 곡선이 무수히 중첩되며, 마치 물감이 응결된 구조와도 같은 밀도를 만들어낸다. 단색에 머무르지 않고, 유사한 색채들이 반복적으로 겹쳐지면서 두터운 색의 층을 이루고, 이는 화면에 깊이와 긴장감을 더한다.
이러한 선의 집적은 멀리서 볼 때 중성적인 색채 추상으로 인식되며, 독자적인 시각적 언어를 형성한다. 동시에 점, 선, 면의 기하학적 구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인간 내면의 사유를 응축된 형태로 드러낸다.
이 작업은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내면의 균형과 평온에 다가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동양적 사유와 현대적 미학이 결합된 조형 언어로 평가받고 있다.//조미화//
장소 : 모마 K 갤러리
일시 : 202. 5. 13 – 5. 3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