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학展(리빈 갤러리)_20260804

//전시 소개//
강선학의 이번 개인전은 18번째다. 수묵화로 일관된 세계를 구축해온 그의 작업은 수묵화가 가진 장르의 특수성을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대중성, 상품성에 대응하는 논리로 보고 있다. 나무 몇 그루와 바위, 강, 배, 그리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인물을 배치하는 범박한 소재가 전부이다. 게다가 시대적 흐름과 무관한 듯한 소재와 수묵이라는 고답적인 형식을 가지고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고요함과 사유의 숙성, 자신에 관한 존재론적인 성찰을 환기하려 한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소재와 형식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첨예한 이론과 비평적 글쓰기로 미술평론가로서 활동과 태도에 상반되는 것 같은 이런 시도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술로서 시대에 대응이 급진적인 이념의 표현에 있기보다 그림을 통해 통찰하게 하는 것에 있다는 주장에 호응해보는 전시이다.

//작가 노트//
다시 ‘수묵적 사유’를 본다

가만히 번지는 화선지 위의 먹색을 보다 보면, 그 먹색이 물과 종이에 의해 매개되고 그 매개가 때로 그리기의 효과를 넘어 그것대로 표현이 된다. 그런 특성이 작품의 자율성으로 객체로서의 속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즈음 좋은 화선지를 만나지 못해, 실은 배접의 불신 때문에 처음부터 두 겹 종이(이배지)나 삼 겹 종이(삼배지)를 쓴다. 그러다 보니 번지는 느낌을 따르기보다 붓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그 붓의 중첩과 쌓임에 더 공을 들인다. 수묵이 가진 우발적, 임의적, 직감적이라는 말과 조금 거리가 생긴다. 먹으로 그린 대상이 종이에 스며들어 그리는 주체가 무화되어 가는 인상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가 뚜렷하고 주체가 더 드러난다. 그림 자체가 자율성을 얻기보다 그리는 사람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고 의미화하게 된다. 그리는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나뉜다. 화선지와 먹, 물과 붓이 만나 서로 드러나지 않고 하나가 되는 그런 그리기가 점점 힘들어진 셈이다. 그래도 수묵의 맛을 지켜보려 하는데 이미 재료를 다루는 배접이나 족자, 병풍을 만드는 공인들이 귀해졌고 골목마다 있던 표구점도 찾기 쉽지 않다. 화선지 생산도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고 한다. 수묵화도 어쩌면, 멀지 않아 모자라는 재료가 장르의 특징을 좌우하고 표현을 이끌고 기존하는 전통적 미감을 바꿔버릴 것이다. 수묵화가 아니라 수채화, 유화라 하듯 먹으로 그린 그림이 될 것이다. 종이와 먹의 맛을 내보려 맨 종이 체로 전시에 내놓지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나는 수묵화로 일관된 세계를 구축, 수묵화가 가진 장르의 특수성을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다양성과 대중성, 상품성에 대응하는 논리로 제기하려 한다. 나무 몇 그루와 바위, 물가, 배, 그리고 어디로 가닿는 시선인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배치해서 내면을 향한 시선이라는 범박한 소재가 내가 다루는 것들이다. 그게 전부이다. 게다가 수묵이라는 고답적인 형식을 고수하면서 시대적 흐름과 무관한 형식을 통해 우리 시대가 거부하고 있는 고요함과 사유의 숙성, 자신에 관한 존재론적인 성찰을 환기하려 한다. 시대에 걸맞지 않은 소재와 형식에서 자신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그런 순간들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충돌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조화보다 부조화의 어긋남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추스를 수 있다는 연유에서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첨예한 이론과 비평적 글쓰기로 몇 권 미술평론집을 발간한 입장에서 낡은 그리기를 하나의 기호로 옹호하는 것이 아전인수(我田引水) 같아 스스로 뒤돌아보지만, 예술로서 시대에 대응하는 것이 급진적인 형식이나 이념의 표현에 있기보다 그림을 통해 사유하게 한다는 주장에 호응해보는 작업이다.

그러나 내 그림의 소재들이 가진 전형성과 먹이라는 전통적 재료가 주는 고답적이고 관념적인 성격 때문에 스스로 이래도 좋은가 하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정작에 풍경화를 그리자고 산수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림이라는 표현 효과를 선택하기보다 단번에 직입하는 비언어적 감성을 위해 회화성을 최소화하려 한 의지를 밝혔지만, 소통불가능만 커진 것 같다. 상투적 형상과 의미들만 그림 위에 떠돌 뿐 상투성 혹은 선입견을 하나의 길로 선택해서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보는 이의 해석을 요청한 지점이 그리 효과적이거나 소통 가능한 측면에 대한 인식 부족이 없지 않았던 것일까. 내 그리기의 의지도 십여 년 사이의 관성에 물려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염려도 그런 하나이다. 디지털 이미지로 전환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현대적 이해를 구하거나 미디어에 의해 드러나는 전통 산수화를 통해 새로운 어떤 지점을 생성할지를 제안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것은 당연히 산수화의 영역을 확장할 것이고 산수화의 이해와 감상, 미학적 질문을 다른 지점으로 옮겨갈 것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작품의 “지금 여기는 언어, 이미지, 소리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풍경으로 그려져 있고, 살아가고 숨 쉬는 현재의 특정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자취들을 가시화한다. 미래는 현재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이상으로 어떤 시간들이 우리의 동시대들인지를 구체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김남시 등, 『평행한 세계를 껴안기: 수천 개의 작은 미래들로 본 예술의 조건』 서울시립미술관. 현실문화연구, 2018. P.22
그리고 “삶의 과제는 세계가 부르고 우리가 응답하는 대화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존 카푸토, 이윤일 옮김 『포스트모던 해석학』 도서출판 b, 2020. p.301
그러기 위해 ‘기술 세계의 빠르고 시끄러운 발걸음’에 대해 느리고 조용한 걸음을, 들뜨고 방자한 세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근래 부산대학교 한문학과의 김승룡 교수가 구해준 중국 현역 작가인 왕명명(王明明)의 화집을 뒤지다 이백이나 두보, 왕유와 백거이의 詩를 시적 정취와 형상의 울림을 함께 담아낸 전통적 의미와 그리기의 형식미에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실은 그 부러움은 내 모자란 구석을 메우고 있는 작품을 보는 열패감이 아니라 소재와 형식의 고답적 표현이 주는 울림이 여전히 유효하고 가능하다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때로 그런 감흥에 현대 수묵화의 지향점을 ‘예술의 종말’이라는 수다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 혹은 다급한 요청의 하나로 진단하기도 한다. ‘영원’하고 ‘고귀한’ 내용에서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감정과 내면성’이 예술의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한 현대의 흐름에서 그림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의식되는 방식’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수묵화의 비시대성은 이런 흐름에 대항적 지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저께, 아니 지지난달 6월 18일 18번째 평론집을 냈다. 공교롭게 이번 개인전도 18번째라 18이라는 숫자가 세 번이나 얽히는 것을 보면서 혼자 웃는다. 웃는 이유는 글쓰기와 그리기를 병행하는 내 욕망에 대해서, 창작이 다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이론을, 이론으로 충족되지 못하는 미진함이 창작으로 순환되는 소회에 피식 새어 나온 것이다. 남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그리 들여다보면서 정작 내 그리기는 제대로 들여다보는가 하는 자문이기도 하다. 그런 자문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 글쓰기도 그리기도, 때로 내가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해서도 그런 질문을 해본다.//강선학//

장소 : 리빈 갤러리
일시 : 2026. 8. 4 – 8.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