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展(예술지구_P)_20151212

인간 문명을 바라보는 양서류의 시각

박민수 (한국해양대 HK교수)

물은 지구 생명의 시원이다.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시원은 바다에 있다. 수십억 년 전 원시바다에서 탄생한 최초의 생명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물과 뭍의 수많은 동식물로 진화했고, 그중 한 종이 인류다. 인류는 현재 진화의 정점에 있다. 뭍의 인류가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게 된 것은 기술 덕분이다. 기술은 인간의 삶 전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생래적 본능에 의지해 특정 환경에 고착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기술 없이는 자연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출현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감각기능과 신체무기 및 방어기재가 약한 존재이다. 만약 이런 존재로만 머물렀다면 인간은 필경 오래 전 멸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출현은 ‘세계 개방적 존재’, 다시 말해 지각능력과 학습능력 덕분에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의 탄생을 뜻하기도 했다. 이런 능력을 지닌 인간은 계획적이고 협업적인 행위에 의해 외적 자연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생존여건을 개선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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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기술이란 그와 같은 생존전략을 가리킨다. 인간의 생존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변화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이라 불릴 수 없는 무엇이다. 자연 아닌 그것을 인간은 언제부턴가 문화 내지 문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문화는 원시적 도구에서 거주공간과 운송수단을 거쳐 법과 경제 및 사회질서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산출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문화란 맨몸으로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마련한 둥지인 셈이다. 문화라는 둥지는 자연에서 거의 모든 재료를 얻지만, 지극히 반자연적ㆍ탈자연적 성격을 지닌다. 인간은 반자연적ㆍ탈자연적 문화를 통해 자연 안의 불편과 위험을 해소하고자 한다.
기술로 이룩된 인간의 둥지는 자연의 불편과 위험은 물론 그 무상성(無常性)도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은 정신세계에서 무한과 불변, 절대를 본질로 한 이념의 체계를 건립할 뿐 아니라, 현실세계에서도 거대한 인공의 낙원을 구축해 나간다. 흙에서 완전히 분리된 인공 낙원, 오늘날 대다수 인류가 거주하는 도시는 반자연ㆍ탈자연의 총화이다. 도시는 공원이나 조경 식물 등의 얄팍한 흔적 외에는 자연을 인간 삶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자연 자체는 불편과 위험 그리고 무상함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자연의 무상함에 저항한다. 도시는 영원을 꿈꾼다. 철근과 콘크리트, 아스팔트로 이뤄진 도시는 자연의 위력에 맞선다. 때로 도시의 견고함이 자연의 위력에 밀리는 듯하지만, 인간은 기술의 진보를 믿는다. 그리고 진보신앙에 기대어 인간생존과 도시문명의 영원함을 낙관한다.
따지고 보면 이런 낙관주의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인간은 자연의 위력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을 만한 문화와 문명을 이룩했으니 말이다. 굴복은커녕 인간은 자연을 철저히 이용하는 방법을 부단히 발전시켜 왔다. 인간은 기술적 지식에 기대어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마저 얻은 듯하다. 인간에게 자연은 만만한 무엇이다. 생명의 모태였던 물도 이제는 얼마든지 활용 가능한 물질로 취급당할 뿐이다. 인간이 물을 활용하기 위해 하안과 해안에 건설한 도시들을 보라. 하늘로 치솟은 도시의 건축물은 인간의 기술과 지혜를 증명하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 혹은 다행스럽게도 – 이런 낙관주의가 통용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는 중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환경파괴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명의 부작용과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기술의 힘으로 건설한 둥지가 바로 기술로 인해 붕괴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보복을 두려워한다. 자연을 파괴했기에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실상 자연 자체는 파괴되지 않으며 보복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에게 호의적이었던 자연 ‘환경’이 사라질 뿐이다. 인간이 사라져도 이 혹성의 자연은 자연으로 머문다. 설령 인간의 과오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져도, 그리하여 혹성을 구성하는 물질과 존재자의 모습이 바뀌어도, 그것은 – 한때 존재했던 인간의 개념으로는 – 분명 자연일 것이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우주 전체의 수명은 차치하고, 이 혹성 내 생명체의 역사에 비춰 봐도 지금까지 인간의 문명사란 미미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 문명사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무상성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변화와 운동, 생성과 소멸은 우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견고함도 우주의 이 속성 앞에서는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 무상함이라는 우주의 속성만큼 견고한 것은 세상에 없으리라. 인간과 그들의 문명이란 이 변화무쌍한 우주 속의 한 점, 한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찰나의 삶을 어떻게 살다갈 것인가? 어차피 인간문명은 종말을 고할 것이니 – (자기)파괴적으로 – 지구자연을 남용할 만큼 남용하다 사라질 것인가? 하이데거의 표현으로, 자연을 오직 ‘에너지원’으로만 간주하고 ‘닦달(Gestell)’을 일삼다 흙먼지와 물만 남기고 사라질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기술과 문명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 옳은 길일까? 하지만 기술과 문명을 포기하는 순간에는 인간의 삶도 부재하는 것이 아닐까? 기술과 인간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니 말이다. 다시금 하이데거의 견해를 빌면, 인간의 기술 자체가 파괴의 근본원인은 아니다. 인간은 기술의 의해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면서도 자연 –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퓌시스(physis) 혹은 대지 – 과 더불어 존중어린 유기적 관계를 맺었던 시절도 있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인간의 사고방식과 기술은 그릇된 길로 접어들었다. 현대의 기술은 기술의 근원적 의미를 망각했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인간이 사고방식과 기술에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하이데거 역시 근원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지 분명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근원을 찾는 물음을 중단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어쩌면 그 물음에는 답이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 물음만 묻다가 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그 물음에 충실하기만 해도 인간은 썩 나쁘지 않은 환경을 다른 생명체에게 남겨 주고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조명환 작가의 작품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물음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하는 듯하다. 작품집을 열면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물에서 바라본 뭍의 모습, 물에서 본 건축물들의 모습이다. 도시의 건축물은 인간 문명과 기술의 상징이다. 자연의 그 무엇도 닮지 않은 그 모습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웅대하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물에서 바라본 모습일까? 조명환 작가는 ‘양서류의 시각’을 의도한다. 뭍의 인간 문명을 보면서도 물을 망각하지 않는 시각을 의도하는 것이다. 뭍에 건설된 인간 문명에 물은 한계를 긋는다. 물은 인간문명이 멈칫하는 한계선일 뿐 아니라, 그 문명보다 강력한 무엇이다. 그렇기에 작품집을 넘길수록 인간 문명의 상징들은 점점 작아지고 그 윤곽도 선명함을 잃는 반면, 물의 비중은 커진다. 물은 인간 문명을 감싸 안는 터전, 하이데거의 말로 대지 혹은 퓌시스를 상징한다. 동시에 물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시원이기도 하다. 물이 인간문명의 시원임은 역설적으로 문명의 종말이 알려준다. 작품집의 마지막 사진들에서 건축물들은 사라지고 무채색의 물만 남는다. 인간문명은 사라지고 없다. 이 종말의 장은 그러나 시원의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마지막 사진들은 순환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순환이 순조로우려면 인간이 오만방자함으로 지구자연을 너무 ‘망쳐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겸허함을, 물음에서 실현될 그 겸허함을 조명환 작가는 ‘양서류의 시각’에서 촉구하는 듯하다. 그 시각은 시원과 현재와 종말의 순환을 바라보는 거시적 시각, 근원에 다가서고자 하는 자의 시각이다.

– 장소 : 예술지구_P
– 일시 : 2015. 12. 12 – 2016.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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