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부산항4展(미광화랑)_20160603

//부산일보 기사//

“이 전시는 너무 힘들어서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개인 화랑에서 세 번 했으니 이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이어가 주길 기대해야죠.”

2년 전 미광화랑 김기봉 대표가 했던 말이다. 부산을 대표하는 근대미술 작가들을 발굴해 보여주는 전시 ‘꽃피는 부산항’은 미광화랑이 2010년부터 2년 단위로 이어온 기획 시리즈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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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술판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전시지만, 사실 개인 화랑이 준비하기에는 굉장히 힘이 든다. 대부분의 작가가 조명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신 분들이라 작품이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았고, 심지어 유족조차 작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많았단다. 김 대표는 친척, 지인들까지 만나 작품의 행방을 물었고 일본 화상에게까지 부탁할 정도였다. 어렵게 작품을 구해 와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니 작품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돈이 되기는커녕 돈을 써 가며 준비하는 전시이다. 이 힘든 전시를 김 대표는 또다시 선보인다. 7월 3일까지 열리는 ‘꽃피는 부산항4-부산근대미술 12인전’이다.

김 대표는 “부산 근대미술사엔 독특한 개성이 있는 작가가 많은데 대한민국 미술사에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그 보석 같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정말 힘들었지만, 꼭 해야 하는 전시라 이렇게 다시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12명의 작가를 소개한다. 김 대표는 네 번의 시리즈 전시 중 이번 전시가 최고 수작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로 분류되는 임응구 작가의 1930년대 작품 ‘파도’는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1940년대 우신출 작가의 ‘경주 계림 풍경’과 1958년 서청찬 작가의 ‘호박이 있는 정물’을 수작으로 추천했다. 김윤민, 양달석, 오영재, 송혜수, 김종식, 김영교, 임호, 김경, 황규응 작가의 대표작도 모두 만날 수 있다. 양달석 작가의 ‘낙원’은 일본에서 어렵게 구해 온 작품이다. 모든 작품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붓질이 살아있어 회화가 가진 힘을 제대로 보여준다.

미광화랑의 ‘꽃피는 부산항’ 시리즈 전시는 서울 미술자료 미술관에 도록이 정식으로 소장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주말이면 전국의 미술 애호가들이 전시를 찾고 있다. ▶’꽃피는 부산항4-부산근대미술12인전’=7월 3일까지 미광화랑. 051-758-2247.//부산일보 김효정 기자, 2016.6.13

//미광화랑 모시는 글//

금번 저희 미광화랑은 “꽃피는 부산항4“(부산근대미술12인전)을 기획 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미광화랑이 그동안 기획한 근대미술 전시 중 가장 마음에 두고 기록하고 싶은 특별한 전시회입니다.

부산 근대미술은 독특한 개성이 있는 작가들이 많이 있고, 또한 그들이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부산 자체의 근대 미술사의 체계적인 정립은 물론, 대한민국 미술사 에서 조차 누락되어 여전히 평가절하 되어있는 현실입니다.

결코 그냥 지나치지 못할 중요한 작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대구, 광주.등 타 지역의 근대작가들에 비해 제대로 평가가 안 된 보석같이 빛나는 근대미술가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 부산 시립미술관 에서의 부산 근대미술사 정립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미광화랑은 “꽃피는 부산항”(부산근대미술전)을 3회째 시리즈로 진행하며 많은 부산의 근대작가의 작품들을 발굴, 소개 하여 왔는데, 의외로 서울의 미술자료 미술관에 도록이 소장 되는 등, 미술계와 일반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4회째를 맞는 이번 “꽃피는 부산항 전”에서는 특별히 우리 부산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작가들 중에 12분을 신중하게 선별 하였고, 그 중에서도 수작과 희귀한 작품들을 골라 펼쳐 보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 임응구(1907~1994)의 해방이후 처음으로 공개 되어지는 1930년대 “파도”작품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1940년 우신출의 “경주 계림 풍경“과 1958년 서성찬의 ”호박 있는 정물“등 김윤민, 양달석, 오영재, 송혜수, 김종식, 김영교, 임호, 김경, 황규응, 등 부산 근대미술에 있어서 중요한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 되어져 있습니다.

모쪼록 바라기는 이번 전시회가 부산 근대미술사를 풍부하게 하는 일과 복원하고 보완하는 일에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미술관계자, 미술애호가, 관심 있는 부산시민, 여러분들의 많은 관람을 바랍니다.

//작가소개//

김경 金耕 본명 金萬斗 (1922-1965)

경남 하동 출신으로 일본 나혼(日本) 미술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하였고, 1953년 토벽(土壁)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5년 미화당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1958년 상경 후에는 인창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모던아트협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초기에는 소, 여인, 명태 등을 작품의 주된 모티브로 민족적 정서에 바탕을 둔 향토색 짙은 사실주의적 작품세계를 추구하였으나, 후기에는 대상을 해체, 요약 재구성하는 환원적 추상을 모색, 심화시켰다.

김종식 金鍾植 (1918-1988)

동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제국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교편을 잡다 제작에 전념하기 위해 교직을 그만 두었다. 김종식은 우신출과 함께 척박한 여명기 부산화단을 가꾼 1세대 토박이 작가였다. 그가 섭렵한 회화세계는 폭이 넓고 다채로운 가운데 민족전통 회화가 지닌 영묘한 정신세계를 현대적인 화법으로 해석 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그저 ‘왔다 가는’ 무위의 초연과 달관의 기운이 느껴진다. 사생과 풍경들은 영기를 지닌 유채의 필치와 색채로, 부산과 그 근교인 남부지방의 산하를 그린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화첩 600권, 드로잉과 유화작품 등 2만 여점을 남길 정도로 뜨거운 창작욕을 보였다. 사후에는 제자들과 지인들에 의해 범어사 상마마을 어귀에 부산최초의 그림비가 세워졌다.

임호 林湖 (1918-1974)

경남 의령 출신으로 일본 오사카(大阪)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마산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경남미술연구회와 혁토사(赫土師), 토벽(土壁)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부터 한성여자대학(현 경성대학교)에 재직하였으며, 간결한 선묘와 강렬한 색채로 사실적 형식 속에 민족적 내용을 담기위해 애썼다. 대표작으로는 해녀와 관음상이 있는데,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을 찾고자 개인적인 작품 활동 뿐 아니라 부산 근대기 화단을 형성하는데 여러모로 기여한 바가 많다. 강직한 성격과 언변으로 여러 그룹 활동을 주도하는 인물 이었으며, 당시 부산 미술계의 흐름과 동향을 소개하는 글을 기고하면서 부산근대화단을 형성해 나간 활동가로서의 예술가이다.

김윤민 金潤玟 (1919-1999)

경남 남해 출신으로 오사카(大阪) 미술학교를 졸업했고, 김경, 김영교, 김종식, 서성찬, 임호와 함께 토벽(土壁)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윤민은 자연에 대한 시정을 환상적인 풍경으로 담아내어 당대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다. 청록색과 주황색을 주조로 재현적 회화양식을 추구 했으며, 재현성을 넘어선 몽환과 초현실의 신비감이 깃든 유현한 필치로 캔버스에 물감을 다지듯이 쌓아올리는 기법으로 과작의 작품을 생산하였다.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그와 유사한 작품은 없고 오직 김윤민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적인 화면을 만들었으나, 그러나 예술적 성과에 비해서 제대로 조명이 되지 못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서성찬 徐成贊 (1906-1959)

서성찬은 큰 양복점에서 일하고 모은 돈으로 일본 가와바다 양화연구소 에서 서양화를 수학하였는데 일본의 네오나르도 후지다가 그의 스승이다. 남아있는 작품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화면 구성과 필치, 독특한 색채 감각, 우연한 선묘로 구성된 작가의 작품은 이미 대가적 풍모를 지니고 있으며, 당시 양(羊)을 주로 그렸던 김남배와 함께 부산 화단의 쌍벽을 이루었다. 서성찬은 토벽회, 경남미술연구회, 춘광회 등의 창립 멤버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 이후 부산 지역 화단의 형성에 있어 커다란 공로를 쌓은 작가라 할 수 있다. 1958년 임호, 정원일, 서성찬 셋이서 함께 귀가하다 영도다리 위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김영교 金昤敎 (1916~1997)

대구 출신으로, 일본 다이헤이오(太平洋) 미술학교 회화과에서 수학하였고, 1953년부터 토벽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후에는 대학 교수직과 작가활동을 겸하기도 하였다. 화풍은 폴 세잔(Paul Cezanne)풍의 이지적 화면을 구사했는데, 후기 인상파의 전형적 양식인 세부적인 묘사보다는 대상을 단순화하고 경쾌하면서도 견고한 필치로 표현, 부산의 근대화된 도시모습과 실경풍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필치로 소박하고 성실하게 표현 하였다.

임응구 林應九 (1907~1994)

임응구는 부산 최초의 서양화가로 190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운 뒤 1928년 후반 조선미술전람회의 특선작가로 활동했다. 이듬해 14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토시코의 상(俊子の像)」이 조선총독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토 오큐(伊藤應九)로 창씨개명한 뒤 일본인 화가로 활동하면서 제국미술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 광풍회(光風會) 등 일본 유력 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하며 각종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화업을 이어나갔다. 해방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임응식(林應植)이 그의 동생이다.

송혜수 宋惠秀 (1913-2005)

송혜수는 191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8년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였고. 6.25 때 부산에 정착하여 활동하였다. 1958년 부산 상록다방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67년《한국근대미술 60년》전 등 다수의 기획전에 초대되었으며 1972년 한국신자유미술가회를 창립하였다. 2005년 92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 사재를 털어 미술상 기금을 마련하였고 그의 뜻을 이어 2005년 송혜수 미술상이 제정되어 해마다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부산미술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송혜수는 불상, 말과 소, 수렵도 등을 많이 다루었으나 일반적으로 ‘소와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에게 소는 민족이며 여인은 사랑(모성애)이다. “예술은 마음의 눈물이다” 는 말을 남겼다.

양달석 梁達錫 (1908∼1984)

양달석은 경상남도 거제출신으로, 진주농업학교에 재학 중 그림에 흥미를 느껴 그림 공부에 열중하였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수채화가 입선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의 독립미술전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광복 이후 부산에 거주하면서 동심이 깃든 향토적인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경향은 시골의 자연환경과 농촌생활의 서정을 동화처럼 정겹고 평화롭게 전개시키는 독특한 세계를 보여준다.

우신출 禹新出 (1911~1992)

부산 수정동 출신으로 전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춘광회(春光會)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현장에서 사생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고, 부산 시내와 교외의 풍경을 담은 다수의 작품들을 남겼다. 1940년 “경주계림” 으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하였으며, 부산작가가 그린 것으로 현존하는 최초의 유화작품인 ‘삼행의 길(1931)’ 이 부산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영재 吳榮在 (1923-1999)

오영재는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946년 동경의 아사카다니(阿佐賀谷) 미술학원에서 2년간 수학했고, 경주 예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57년 이후 부산에 정착, 미술교사로 생계를 이어갔고, 동시에 1956년 경남교육미술가협회 회원, 1957년 부산미술가협회 회원, 1971년 후기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부산 화단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에 정진했다. 오영재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작업 초기의 1950년대를 자연 풍경이나 정물, 인물을 보고 느낀 대로 그리는 “사실화 시기”, 1960~70년대 대상을 면분할하며 조형적 실험을 전개하는 “구상화 시기”, 1980년대에는 구상과 추상을 병행하며 다양한 색조와 면 분할을 통해 리듬감 있는 화면을 구성하였고, 90년대부터 본격적인 추상화 작업에 몰입했는데, 그의 작업은 초기 구상작업부터 후기 추상 파라다이스 작업까지 끝까지 연결이 되어 진다.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도 끝까지 자신의 예술혼과 양심을 팔지 않았던 작품과 인품이 모두출중했던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예술가였다.

황규응 黃圭應 (1928~2004)

부산출신으로 선주(船主)였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난 황규응은 공부보다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6·25 전쟁 이후 청년방위대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경찰에 몸담게 되었다. 경찰 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 시기에 황규응은 양달석(梁澾錫), 서성찬(徐成贊) 등과 교류를 가졌다. 황규응은 주로 수채화를 그렸는데 그는 비록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보여 주었다.
황규응의 수채는 자연에서 받은 감동을 어눌한 필치로 화려함 보다는 탁한 느낌이 나게, 은근함으로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화면을 보여 주고 있는데, 비 오는날의 우중풍경(雨中風景)과 습윤한 대기감을 표현한 작품은 가히 절창이라 할만하며, 호남에는 배동신이 있다면, 영남에는 황규응이 있다고, 할만하다.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6. 6. 3 –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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