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철展(피카소화랑)_20191205

//전시 서문//

소멸의 역설을 간직한 현재의 시간들

미술감독 김종원

끊임없이 반복되는 붓질의 행위 – 시간성 속에 나타나는 표상 그리고 표상은 있으나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부유하는 공간들. 시공간의 해체 속에 수평적인 모호한 경계가 존재한다.
인간의 시각이 지각하는 사실적인 바다의 표상이지만 인간 내면으로부터 그 표상의 처음과 끝을 인식할 수 없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표류하는 심상으로 이끈다.
이러한 인간 내면에 깃든 사유 속에 시간성, 소멸, 죽음, 그리고 허무함의 메타포를 형성한다.

만약 최상철의 90년대와 2000년대 초 작품을 인지 못 하고 현재의 평면 회화를 바라본다면 그의 작품을 극사실 회화 어디쯤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표상은 사실적 묘사가 아닌 작가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사유의 반영이며, 또한 명확한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딱히 알아차릴 수 없는 모호함이 고차원적 역설로 사유 안에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기호를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소멸’이라는 자신만의 상징체계이며 소멸은 ‘현재의 시간성’이라는 명제 아래 영원성을 말하고 있다.
최상철은 21세기 인간의 고뇌와 욕망을 나타낸 네오-바니타스(Neo-Vanitas)를 실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니타스가 17세기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삶과 물질의 헛됨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체계로 표상됐다면 21세기 최상철이 보여주는 바니타스는 동시대의 인간사 – 허무, 공허, 세속, 권태 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덧없음을 부여한 알레고리의 재해석이자 또 다른 가능성이다. 또한, 그가 보여주는 방식은 설치 미술부터 평면회화까지 아주 다양한데, 현대미술의 다양성에 혼돈상태를 보였다고 말하기보다 그의 미술을 돌이켜 볼 때, 그는 확고한 자신만의 사유가 존재하고 있다.

작가를 이해하려면 2019년 현재의 사유와 이전의 사유로 구분되는데, 크게 90년대부터 2000년대 시기와 2019년 현재의 시기로 나누어 논할 수 있다.
90년~2000년대 그의 작품에서는 현재와 다른 명료한 소멸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소멸로 예기되는 죽음이라는 주제이며 삶과 죽음, 흑과 백의 사유가 실로 명료하다. 그 당시 최상철을 지배하던 시계, 해골, 유골함, 거울, 신문, 사다리는 바라보고 있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사유로 느껴지는 원형적 소멸의 메타포이다.
굵고 강직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사유는 죽음에 관해 고민한 흔적들이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소멸 적 표상들을 비치는 유리나 거울을 통해 연속적으로 투영시켜, 소멸이 끝이 아닌 소멸의 역설로 이끌어 동양의 ‘윤회(輪廻)’ 그리고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의 ‘상대적 시간’으로 말한다.
그는 이러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은유하는 작업에서 ‘임계지대(臨界地帶)’라는 명제를 사용한다. 임계지대(臨界地帶)는 보통 천문학에서 블랙홀의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이 시작되는 경계 구역을 뜻한다. 그의 이러한 사유 속 작품들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보여줬으며 ‘영원회귀의 굴레’를 동양과 서양의 모호한 경계 어디쯤에서 더해간다.

이전까지의 작품이 ‘원형적 소멸의 윤회’ 혹은 ‘상대적 시간을 통한 영원성’을 보여줬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는 진화된 원형의 소멸과 동시에 생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시간의 직접성이 나타났던 – 시계의 움직임, 초심 사운드 없이도 2019년 작품에서는 표상 너머의 자신만의 시간성을 ‘시각이 아닌 그 무엇’으로 보여준다.
지나간 시간 속의 굵고 강직한 사실적 표상을 통한 소멸은 어느덧 작가의 내적 시간과 함께 현재의 찰나와 조응한다. 그 조응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철저한 작가만의 고뇌와 내적 시간이 존재한다. 3, 40대의 실험적이고 솔직담백한 직선적인 표상을 뒤로한 채 이제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뚜렷한 경계의 흑과 백이 사라진 뒤 어느덧 윤회를 바탕으로 하는 회색이 잿빛 회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적어도 최상철에게 회색은 자신을 대변하는 색으로 작가의 몽상 안에서 생성의 알레고리로 재탄생하고 있다. 마치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란 시에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표현처럼 회색은 소멸을 생성으로 연결하는 고차원적인 역설이다.
작가가 표상한 바다 수평선 끝에는 어느덧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는 뚜렷한 바다 형상의 고집이 없다. 때로는 바다가 있어야 할 표상에 나뭇잎이 가득하고, 시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장미가 자리 잡는다. 역시 소멸을 느끼기보다 소멸의 역설로서 영원 회귀적 영원성과 반복되는 생성의 가능성으로 와 닿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작가의 삶을 다 알지 못해도, 또한 작가의 삶과 상관없어도 작품을 보는 이들이 각자의 홀황(惚恍)을 느끼며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인간은 고정된 상태로 머물지 못하며 그럴 수도 없다. 삶의 정답이나 확고한 진리 혹은 고정된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21세기의 불안과 허무함을 작가의 사유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고정되지 않은 생성 가능성을 통해 살아있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항시 반복되는 지나간 현재와 지나갈 현재 그리고 도래할 현재로 대변되는 최상철의 시간성은 언제나 현재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사유는 결국 예전 90년대부터 2000년대의 작품들과 현재 작품의 사유는 형식만 다를 뿐, 전혀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다만 다가올 현재의 생성 가능성을 내포하며 그의 사유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김종원//

장소 : 피카소화랑
일시 : 2019. 12. 05. –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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