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귀선展(아보 갤러리)_20220917

//전시 평론//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일반화하기는 좀 그렇지만, 대개 그림은 작가를 닮는다고 했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림 속에 자기가 투영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도 작가가 보이는가. 작가는 그림 속에 자기를 어떻게 투사하는가. 작가 조귀선은 수채화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수채화를 통한 형식실험으로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고, 그런 만큼 수채화를 통해 자기만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얻고 있다. 모든 매체에는 다른 매체와는 구별되는 매체적 특수성이 있고, 여기에 통달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다. 바꿔 말해 작가는 수채화의 매체적 특수성에 통달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 매체적 특수성이 뭔가. 수채화는 물로 그린 그림이다. 그런 만큼 물의 성정을 알아야 하고 또 닮아야 한다. 물의 성질과 자기 성질이 서로 부합해야 실제로 그림도 더 잘 그릴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사실상 체질론을 의미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성정이 어떤가. 맑고 투명하다. 마치 물로 그린 듯 맑은 성질과 함께, 아무리 진한 어둠 속에서도 여실한 투명한 깊이를 유지하고 있는 색감이며 질감이 그렇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그 색감과 질감 그러므로 그 질료적 성질은 마찬가지로 물로 그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이와 안료(먹과 채색)를 매질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먹그림을 닮았다. 먹그림의 성질과 수채화의 성질에 닮은꼴이 많지만, 특히 스며들면서 번지는 효과 곧 발묵과 선염법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스미는 성질의 종이와 투명한 성질의 안료가 만나서 가능한 일인데, 그 자체 터치가 중첩되면서 쌓이는, 막도 불투명하고 안료도 불투명한, 그래서 어쩌면 막과 또 다른 막이 만나는, 그리고 그렇게 불투명한 막을 형성하는 타블로와 비교된다.
담채화(담채화 자체도 이미 어느 정도 수채화의 일종이지만)처럼 맑고 투명한 기운이며 분위기가 장기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물을 머금은 종이에 안료가 닿으면 안료가 종이에 번지고 스며든다. 그렇게 종이와 안료가 일체화되면서 일부러 그리기도 어려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들고, 그렇게 크고 작은 얼룩들이 모여 알만한 형상도 만들고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채화는 어쩌면 얼룩으로 그린 그림 그러므로 일종의 얼룩 그림(혹은 얼룩 회화)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이처럼 비정형의 얼룩이 만든 그림이란 점에서 수채화는 운명적으로 추상(성)을 그 이면에 포함하고 있다. 비록 알만한 형상에서마저 사실은 그 이면에서 추상(성)과 형상(성)의 길항과 부침이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추상과 형상 혹은 구상성의 형식적 스펙트럼 사이를 오가는 작가의 그림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개는 수채화 고유의 물성을 형식실험하고 극대화한 바탕화면 위에 모티브에 해당하는 알만한 형상을 올리는 식이며, 그렇게 추상(성)과 형상(성)이 하나의 화면에 어우러지면서 공존하는 식이다. 여기에 더러 안료를 흘리고 뿌리는, 보기에 따라서 마치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을 차용하고 변주한 것 같은 우연성(엄밀하게는 계획된 우연성 혹은 통제 가능한 우연성)의 도입으로 추상과 형상의 경계는 더 지워지고 모호해진다.
안료가 그렇고 종이 또한 그런데, 천연의 닥을 원료로 만들어서 그 결이 균일하지 않은 한지에, 그리고 그 표면에 우둘투둘한 미세요철이 있는 아르쉬지에 물감이 반응하는 성질이 다 다르다. 종이 그러므로 그림 속으로 물의 기운이 번지고 스미면서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효과로 치자면 한지가 맞고, 그 표면 위로 미세요철과 함께 붓이 지나간 자국을 남기는, 종이 고유의 결이 오롯한, 그렇게 종이 자체의 질감과 성정이 그림과 일체를 이룬 경우로 치자면 아르쉬지가 감각적으로 와닿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그림은 물의 성정에 따라서, 그리고 여기에 종이의 성질에 따라서 자기표현을 다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고, 실제로도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그 형식적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더러 그림과 함께 그 표면에 요철이나 패턴이 있는 기성의 오브제에 물감을 묻혀 종이에 대고 찍어내기도 하는데, 판법을 도입해 회화를 확장하려는 시도로 보이고, 일상의 도입으로 자신의 작업에 현실성을 기하려는 기획으로도 보인다. 한편으로 작가는 대개 수채화 고유의 성질을 극대화한, 그 형식실험에 착안한 추상으로 바탕화면을 연출한다고 했는데, 이런 추상 화면과 함께 상당한 그림에서 바탕화면이 빈 화면 곧 여백인 채로 남겨진다. 여기서 여백은 그 자체 빈 그림이 아니다.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다.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기술이고, 미처 그리지 않은 채로 그림을 암시해 그림의 의미며 서사를 확장하는 기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여백은 하늘이나 물과 같은 실재의 부분 이미지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고, 그 자체 작가의 내면이 투사된 내면 풍경의 표상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이 그림 위로 지나가는 라인이다. 그림을 유기적으로 만들고, 그림에 리듬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자체 자연에서 채집된 모티브 이를테면 식물의 덩굴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그림에 리듬을 부여하기 위해 도입한 형식적인 장치이기도 할 것이고, 때로 그 자체 작가 자신의 생체리듬(바이오리듬, 이를테면 그날 그때의 사사로운 기분과 기운이 반영된)을 표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추상적인 화면에 알만한 모티브를 중첩 시키는데, 때로 자화상(그 자체 자기반성적인 행위의 소산으로도 볼 수 있는)을 포함한 주변인과 같은 사람들을, 그리고 도시와 거리와 같은 일상의 정경을 모티브로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꽃과 소라(바다의 소리를 듣는 그러므로 그리워하는 장 콕토의 소라?)와 냇가의 자갈과 같은 자연을, 그리고 숲과 같은 풍경을 소재로 그린다.
더러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스러운 풍경이 시적 서정과 함께 작가의 성정(향수?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풍경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풍경을 소재 혹은 주제로 그린 일련의 그림에서는 알만한 형상보다는 다만 빛과 얼룩의 어울림과 상호작용이 있을 뿐이어서 실재하는 숲을 그렸다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에 존재하는 숲 그러므로 내면의 숲을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부 정물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는 사물 초상화(사물에 자기를 투사한)의 가능성이 엿보이고, 물속에 유유자적하는 오리 떼에서는 자기 내면에 질서를 되찾고 싶은 그러므로 내적 평화를 얻고 싶은 일상적인 욕망이 읽힌다. 아마도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도 그 욕망이 그대로 전해질 것이고, 실제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근작에서는 꽃과 함께 특히 새와 여우가 등장하는데, 작가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고, 작가의 얼터에고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새는 아마도 희망을 상징할 것이고, 특히 꽃과 더불어 새를 한 화면에 그린 것은 전통적인 화조도를 현대적으로 각색하고 자기화한 경우로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여우인데, 아마도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일 것이다. 원작에서 여우는 서로에게 길들여진다는 것, 서로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러므로 서로에게 보통의 존재가 특별한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관계 설정을 위해 타자에게 내미는 손짓일 수도 있겠고, 자기 자신(자기_타자)과 화해하기 위한 제스처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이외에도 작가의 그림에는 아마도 삶의 여정을 상징할 종이배와 타자에게 내미는 손과 마찬가지의 선물을 상징하는 보자기와 같은, 타자와의 관계와 관련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상징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징과 더불어 작가는 자기를 표현하는, 그리고 의미를 확장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그 상징은 비록 작가가 찾아낸 것이지만 그러므로 작가에게 각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 의미가 보편성을 띤 것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공감을 얻는다.//고충환//

장소 : 아보 갤러리
일시 : 2022. 09. 17. – 0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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