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ECDOTE : 사소하고 연약하고 활기찬 말들展(스페이스 이신)_20250528

//전시 서문//
ANECDOTE : 사소하고 연약하고 활기찬 말들

데카메론(The Decameron)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적이라는 것은 고통 받는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데카메론에서 흑사병을 피해 시골 별장에 모인 열 명은 열흘 동안 하루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꺼낸다.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료함을 달래려는 목적도 있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흑사병의 침입과 그로 인한 공포를 달래려는 목적이기도 하다. 사소한 이야기에 담긴 연대, 이처럼 기획전 ‘ANECDOTE: 사소하고 활기차고 연약한 말들’은 일곱 명의 작가들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각자의 작업은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 세상들에서 비롯되고, 동시에 작가들의 성격과 가치관, 세계관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 마치 ‘데카메론’에 모인 사람들처럼.

김민아의 ‘Bottom of the Deep Blue Sea’는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팬데믹이 오기 전 여행을 다니면서 촬영한 필름 사진과 이후 수족관에서 촬영한 디지털사진을 섞어 놓는다. 작가의 사진에는 거대한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해파리처럼, 답답했던 우울감을 벗어나 처한 환경에서 희망적인 내일을 기대해보자는 마음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담겨있다. 김지은의 작업, ‘여기, 지금’은 타인을 의식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고 현재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주는 고요한 휴식, 식물이 주는 강인한 생명력을 말한다. 배미정의 캔버스에는 눈에 익은 구상과 낯선 추상적인 색과 사물들이 공존한다. 작가의 붓과 물감은 완전한 일렬로서 말할 수 없는 세상과 일상의 비틀린 틈, 그 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간다. 레나는 자신의 몸에 남은 상처와 변화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나의 ‘ABOMA’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과거를 벗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긍정을 드러낸다. 이병록의 ‘사진과 공간의 재해석’은 ‘보기(seeing)’의 새로움을 매체를 변주하면서 보여준다. 평면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사진의 복제성에 반기를 드는 이병록의 작업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근법의 기반을 비틀어 놓는다. 이수현은 자신이 직접 마주한 장면들을 포착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이수현의 ‘Surface’는 ‘이미-거기-있었다’라는 사진 매체의 특성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해석할 수 없는 감정들과 진실의 왜곡, 해석의 한계에 대해 말한다. 키 킴의 손끝에는 사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 ‘사랑할 때 보이는 것들’은 작가의 아버지가 찍은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는 연작으로 아버지가 본 장면들과 작가가 상상한 장면들이 중첩되면서 초현실적인 세계가 펼쳐진다. 작가의 에칭 작업 ‘Inspiration from the Forest’에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자유롭게 날고 싶은 작가의 열망이 엿보인다.

‘ANECDOTE: 사소하고 연약하고 활기찬 말들’은 회화와 사진, 영상과 텍스트를 넘나들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소한 순간들을 조명한다. 이상적으로 세상은 아름답고 즐거운 곳일 것 같지만, 삶을 직면하는 순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어지럽고 복잡한 광경이다. 매일 같이 귀를 때리는 소음, 시공간의 뒤틀림, 갑자기 찾아오는 낯선 감각, 그리고 고통을 겪은 후 느끼는 우울감. 이번 전시에 참가하는 작가들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여주면서 세상을 재해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ANECDOTE: 사소하고 연약하고 활기찬 말들’의 작업들은 자신이 지닌 내면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예술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삶의 시작점을 돌아보고 순간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고군분투한 노력의 산물이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에는 세상과의 관계,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 개인의 기억과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이번 전시는 사소한 일화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인 동시에 삶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내며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자리가 된다.
전시 제목 ‘Anectode’는 ‘일화(逸話)’라는 뜻으로, 한자의 뜻을 풀면 ‘순간적으로 증발되는 이야기, 가볍고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개인이 가진 사소하고 연약함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한 자리에 모일 때,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하거나 연약한 것이 아니게 되고, 다수의 활기찬 말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안아주는 연대가 된다. 이번 전시는 7명의 작가들이 따로 또 같이, 시각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고 인정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모인 연회가 될 것이며, 전시장 안에 들어온 이들은 누구나 환대받는 초대객이 된다. “이야기 나눔은 인간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실로, 서로 이해하고 견디며, 함께 성장할 수 있게 한다.(La narrazione è un filo invisibile che lega gli esseri umani, permettendo loro di comprendere, sopportare e crescere insieme.).” 스페이스 이신의 기획전 ‘ANECDOTE: 사소하고 연약하고 활기찬 말들’에 놓인 작업들이 위로와 연대를 나누는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본다.//글 레나(LENA)//

장소 : 스페이스 이신
일시 : 2024. 5. 28 –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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