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규展(갤러리 조이)_20160817

전통과 현대의 조형적 긴장을 드러낸 획(劃)의 미학

임성훈(미학, 미술비평)

널리 알려졌듯이, 바실리 칸딘스키는 점, 선 면을 회화의 기본적이고 원형적인 구성요소로 설명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칸딘스키가 단지 점, 선, 면의 형식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의 논의에서 핵심은 결국 형식 그 자체보다는 그 형식과 관계하는 정신의 문제에 있다. 정신이 결여된 형식이란 그 기술적 완성도가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해도 예술의 이름과 이에 따른 의미를 정당하게 갖지는 못할 것이다. 김운규의 작업은 선을 주제로 한다. 그의 작업에 나타난 선은 칸딘스키가 논의한 선의 맥락과는 근본적으로 그 양상을 달리하지만 공통점 또한 찾아볼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선이 단순한 형식적 구성요소가 아니라 예술적 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조형적 결정체라는 점이다. 김운규의 선은 기하학적이거나 추상적인 형식미을 추구하는 선이 아니다. 그의 선은 형식으로 드러나지만 형식의 틀을 부단히 벗어나는 마음의 선이다. 달리 말해, 그의 선은 곧 획(劃)으로서의 선이다. 획으로서의 선은 조형적으로 무한히 변용되는 메타포로 표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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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규의 선은 일련의 패턴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은 디자인적으로 개념화된 패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작품에 나타난 획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패턴의 형식보다는 획으로 표현된 마음이 수없이 반복된 자연스러운 결과물로 보일 것이다. 단지 형식을 위한 선을 넘어 그 형식에 상응하는 정신을 불러오는 선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메를로-퐁티가 “신체화된 코기토”를 통해 강조했듯이, 정신이란 몸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정신은 몸의 행위와 연동된다. 김운규의 획은 형식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론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선이며,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 곧 몸의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선이다. 먹선은 정신만의 표현도 아니고 행위만의 표현도 아니다. 정신과 몸의 행위가 가장 깊은 조형적 본질의 차원에서 총합적으로 재현된 것이다. 또한 그의 획은 나아가 삶의 형식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선이다. 그러기에 감상자는 몸의 행위와 마음이 교차되면서 생겨나는 에피파니(epiphany)를 미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운규의 획의 미학은 평면 작업에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적극적으로 오브제가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평면과 오브제를 결합한 작업을 시도한 바 있기에 기법적으로만 본다면 그다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운규 작가의 시도에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고유한 조형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물어보자. 작가는 왜 이런 오브제 작업을 굳이 하는 것일까? 답하기 쉽지 않은 물음이지만, 작품에 나타난 획의 미학을 내재적으로 읽을 수 있다면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오브제는 앞서 언급한 획의 조형적 느낌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명하려는 시도에서 작업된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단초는 아무래도 촉각성이다. 획은 시각성뿐만 아니라 촉각성을 동시에 불러오는 체험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단지 이러한 촉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오브제가 사용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브제는 그 자체로 고유한 조형적 특징을 이루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연관성에서 볼 때 촉각적인 체험을 이끌어내는 획의 느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즉, 오브제 작업은 획이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평을 확장해서 보여준다. 먹선의 표현과 오브제의 표현은 모순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으로 침투하면서 획의 미학을 강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확인되는 작업의 기본 방향을 도식적으로 요약하자면, 선에서 출발하여 오브제를 통해 조형성이 강화되고 다시 평면회화로 돌아간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변증법적이다. 평면회화에서는 선과 오브제 작업에서 사용된 색감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거친 천에 돌 알갱이를 넣은 물감을 붓이 아니라 나이프를 사용해서 그려진 화면은 얼핏 전형적인 모노크룸 회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모노크룸 회화나 단색화에서 환기되는 조형성과는 상당할 정도로 그 결을 달리하는 평면회화이다. 김운규는 색의 방법론을 차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획의 미학의 맥락에서 자신의 고유한 조형언어를 표명하려고 시도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작품의 핵심 주제는 “심안의 흐름”이다. 그의 평면회화는 우연성에서 비롯되는 생동적이고 자연스러운 획의 힘 그리고 오브제에서 강화된 촉각성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미적 분위기를 창출한다. 이런 점에서 김운규의 회화에 나타난 평면성은 모더니즘의 평면성(flatness)과도 그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김운규는 획의 회화적 가능성을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수묵과 채색에서 받은 영감을 현대적인 예술적 감수성에 상응하는 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재현에는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선과 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그의 일관된 조형의식이 근저에 놓여 있다. 실상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결합하고 이를 조형적으로 성취해 내는 일이란 생각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통과 현대를 융합하려는 시도들이 단지 외형적인 결합에 따른 형식에 그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운규는 형식의 내재적 측면에 주목하면서 회화의 존재론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노력이자 과정을 자신의 작업에서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선과 색의 이중주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미술기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조형적 긴장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낸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그의 작품에서 완연하게 드러나는 획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미술사에서 확인되는 분위기를 느낀다. 그러기에 김운규의 작업을 두고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더불어 현대미술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획의 미학을 정립하고 있다고 말해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임성훈//

– 장소 : 갤러리 조이
– 일시 : 2016. 8. 17 –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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