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혜展(갤러리 루벤)_20230906

//평론//
박경혜의 ‘동심을 그리다’ 전은 2010년 이래의 개인전 부제에 빠지지 않았던 동심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한다. 어른에게 동심은 잃어버린 것이며 상실감이나 추억의 원천이 된다. 작가는 ‘내가 탁해졌다 싶을 때 돌아가야’하는 ‘어른을 위한 동심’이라고 말하며, 소설 ‘어린 왕자’의 예를 든다. 예술이 ‘잃어버린 시간’(프루스트)을 찾는 유력한 방식이라면, 동심은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 중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작품군은 작가의 마음을 잘 드러낸다. 박경혜에게 동심으로 대변되는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정체성 회복의 일환이다. 즉 ‘단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 삶의 본성을 회복하고 재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유년기가 좋은 시절로 여겨지는 이유는 삶에 대한 묵직한 의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저개발국의 아이들은 어른의 의무를 지며, 여자아이는 조혼이나 매매혼을 통해 강제로 성인이 되기도 한다.

근대 이전, 생산력이 저조한 시대에 어린이로서의 시기는 더욱 짧았다. 역사학자들은 어린 시절이 보편적이기보다는 그 시간과 내용이 역사적, 지역적, 계층적으로 다름을 말한다. 어린 시절, 특히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하게 긴 어린 시절을 가지는 인간의 위상은 생물학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사회생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클라이브 브롬홀의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 붙인 서문에서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어린 시절이 점점 더 연장되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무덤까지 연장되었다’고 하면서, 이러한 연장으로 인해 ‘인류의 공격성이 줄어들고, 협동성이 증가했으며, 기본적인 번식 시스템으로서 사랑과 결혼을 선호하는 감정 상태가 만들어졌고, 언제나 호기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의문을 품는 거대한 뇌가 생겨났다’고 지적한다. 유기체의 생존에 있어 불리할 수도 있는 긴 유년기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은 유년기와 친숙한 예술에 의미를 부여한다.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춘, 요컨대 문명이 자리 잡은 곳에서, 어린 시절은 부모를 포함하여 주변으로부터 사랑과 보호받는 시기로 간주 된다, 오직 꿈꾸고 배우고 놀기에 몰입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박경혜의 작품에 놀이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아이가 가장 애착을 느끼고 몰두하는 것은 놀이다. 그에 의하면 놀고 있는 아이야말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는 면에서, 즉 그 세계의 사물들을 새로운 질서에 맞추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배치하고 있다는 면에서, 마치 예술가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예술가와 놀이하는 아이와 자주 비교되는 이유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예술가 역시 몽상적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를 진지하게 여긴다. 프로이트는 놀이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진지함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본다. 작가가 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만큼, 그 시절의 놀이가 등장한다. 그런 놀이는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추억이며, 새로운 세대에게는 낯선 재미를 줄 것이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개구리나 메뚜기를 잡아 구워 먹었다는 에피소드나 굴렁쇠 굴리기, 널뛰기, 제기차기 등은 책에서나 봤을 것이다. 성장을 위한 폭주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한국 사회는 유독 단절이 심했다. 이후에 아이들 놀이의 대세가 되었던 게임조차도 그렇지 않은가. 작품 속 자전거 타기 정도가 요즘에도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면, 흔치는 않을 경험이다. 박경혜의 놀이하는 아이들은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동식물과 별, 친구와 식구들과 함께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는 따스한 소우주다. 옛날의 놀이와 함께 이전의 시공간이 소환된다. 놀이는 자아가 중심이 되는 총체적 세계로, 이후 파편적 노동의 의무를 져야 하는 세계에 불시착한 어른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동심을 동경하는 예술은 어린이의 어법을 흉내 내기도 한다. 내용은 형식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어린이의 어법은 어눌하지만 진실을 표현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작가도 참고하는 파울 클레, 피카소, 장욱진 같은 대가들의 전략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는 인물과 풍경 일부에서 발견되지만, 박경혜만의 변주도 보여준다. 작품 ‘미소’에서 큰 냄비 형태나 스마일 기호 같기도 한 얼굴은 파울 클레의 영향이 있지만, ‘별따라 달따라’에서는 정지된 초상을 넘어 행동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품 ‘저 너머’에서 전경의 누렁소나 중후경에 언덕길을 손잡고 같이 가는 사람들 같은 반쯤 기호화된 도상은 ‘심플’을 매우 강조했던 장욱진의 세계와도 닮아 있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진 동심에 요즘의 관심사인 토속적인 세계와의 연결에서 거장을 만난 것이다. 자연 사이로 난 길을 손잡고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는 ‘눈부신 날’도 마찬가지다. 미술사적인 영향 외에, 마침 작가가 교직에 있으면서 아이들의 세계를 직접 접할 기회가 많았던 것도 참고할 수 있다. 박경혜의 작품에는 아이가 처음 필기구를 쥐었을 때처럼 선적인 표현이 많다.

본격적인 미술 수업의 결과인 원근법이나 양감보다는 선으로 상상을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추상적인 기호가 아니라 상형문자 같은 중간적 단계다. 예외가 숫자들이다. 작품 속 1부터 7 사이의 숫자들은 ‘유아의 나이이며, 일곱빛깔 무지개’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다른 기호들은 지시 대상의 본질을 포함한다. 가령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나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지만, 동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집’ 하면 삼각형 지붕과 사각형 몸체의 결합이며, 삶의 온기가 피어오를 굴뚝도 빠지지 않는다. 박경혜의 작품 속 집에도 자주 나타나는 그러한 도상은 기호와 대상의 중간적 형태다. 동그라미에 막대기 하나로 표현된 식물은 어릴 적 부친이 가꾼 정원에 대한 기억이 담겨있다. ‘헬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동물은 작업실 앞의 고양이부터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겪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까지 포함하며, 이들 타자와의 평화로운 공존을 바란다.

최근 작업에는 선적 형태 안팎을 채우는 색의 질감을 살린다. 작가는 이에 대해 ‘흙같이 우리가 돌아갈 상태’라고 말한다. 또 하나의 변화는 민화의 ‘까치와 호랑이’ 같이 한국적인 소재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소박함을 좋아하는 감성의 연장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동심과 민속적인 것이 교차되는 지점도 그러하다. 민화의 도상 같은 ‘꼬꼬’는 멍멍이, 야옹이, 삐약이 등 동물이 내는 의성어로 그 동물을 지칭하는 아이의 방식이다. 작품 ‘낭만 여행’은 아이가 그린 듯한 동식물, 인간, 천체 등 우주를 이루는 존재들이 따스한 색감 속에 교감한다. 작품 ‘Hello’는 그가 굴리는 둥근 공들과 함께 중력을 초월하여 ‘놀고 있는’ 삐에로의 모습이다. 놀이를 공연의 형태로까지 승화한 것이 서커스다. 둥그런 마법의 원 안에서의 놀이꾼인 삐에로는 노는 아이임과 동시에 고도의 기교를 필요로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초상이기도 하다. 근대미술에서 광대와 동일시된 예술가의 모습(피카소, 로트렉, 쇠라 등)은 그림에 자주 나타난다.

작품 속 놀이는 제목에 나타나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민속놀이인 ‘제기차기’에서 둥근 나무들 안의 둥근 영역은 써커스의 장처럼, 놀이가 가능한 소우주를 상징한다. ‘널뛰기’도 특별한 담장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류학자들은 놀이의 자율적 시공간을 강조한다.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가 아닌 호모 루덴스라고 규정하는 호이징가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호모 루덴스’에서 ‘유희란 어떤 이익도 얻지 않지만 인간을 완벽하게 몰두하게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놀이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행해지며, 여러 규칙에 따르는 일련의 질서 속에서 진행되는 행동이다. 그것은 일상적 세계 한가운데 있는 일시적 세계들’이다. 프랑스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 또한 ‘유희는 엄격한 한계와 조건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하나의 폐쇄적인 총체를 구성한다’라고 한다. 놀이는 그것이 펼쳐지는 특수한 시공간을 가진다는 점, 요컨대 놀이의 영역은 닫혀 지고 보호받고 따로 잡아둔 세계, 즉 순수공간(카이유와)이며, 일정한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 신성하고 분리된 영역(호이징가)을 말한다.

놀이는 일상의 세계의 한복판에 있는 일시적인 세계이다. 예술 또한 그러한 영역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사유들이 놀이나 예술이 단순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스스로 정한 규칙에 의해 엄밀하게 작동되는 놀이와 예술의 세계는 자연의 법칙과는 다른 문화의 모델임을 말한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놀이는 자유의 실현이기 때문에 한 사회의 문화적 이상들이 예술 속에서 예시된다. 예술은 마르쿠제가 ‘현존하는 현실 내의 다른 현실’이라고 명명했던 가상을 창조한다. ‘굴렁쇠 굴리기’에서 둥근 형태와 선이 결합한 나무들과 비슷한 굴렁쇠다. 지금은 사라졌기에 놀이 참여자들은 민속 의상을 입고 있다. 그때와 지금을 이어주는 것은 여전히 푸르른 자연이다. 그네타기, 술래잡기, 줄넘기 등은 자연 속에서 이루어진다. 작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둥근 나무들과 풀숲 같은 거칠거칠한 필촉이 특징이다. ‘동행’은 시리즈를 순차적으로 보면 동감이 느껴진다. 활짝 웃는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개나 새가 따라간다.

연둣빛 녹색은 신록 같은 아이들의 색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서도 동그란 형태에 작대기 하나로 나무를 표현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과 평행하게 배치된 자연은 도로만큼이나 다듬어져 있다. 자연은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 같은 현대적 놀이는 기하학적 형태들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점차 많은 것들이 코드로 환원되는 시대의 놀이는 소비를 촉진시키는 마케팅이 지배하는 경쟁적 세상을 은유한다. 박경혜의 작품에서 놀이는 자연과의 교감을 필요 충분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폐쇄적 체계가 아니다. 바람과 별과 바다가 놀이의 배경이다. 자연과의 연결망은 기호에 있다. ‘별바라기’에서 고깔모자와 해, 달, 별, 우산이 연결된다. 사람은 동그라미, 직선, 곡선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작품에서 아이는 별들을 풍선처럼 들고 있으며, ‘별빛 그림자’에서 집들이 자리한 지상의 아이들은 별을 가지고 논다. ‘별밤’에서 고층 건물 사이로 보이는 달과 별은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장면이다,

문명의 빛 공해를 뚫고 온 별을 보는 한 쌍은 낭만적이다. 지상의 하늘인 바다 또한 놀이의 영역이다. ‘바다’는 작가가 살아왔던 지역을 암시하며, 땅과 바다를 구별짓는 것은 굴곡진 선이다. 작품 ‘여행’은 선의 굴곡만을 변화시켜 산과 바다를 구별한다. 바다는 거칠어도 배 안의 사람들은 즐겁다. 특히 여행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다. 박경혜의 작품에서 집은 보호받는 안식처의 원형이다. 나무와 돌담에 둘러싸인 집이 있는 ‘풍경’에서 화면 양쪽에 집을 향해 머리 숙이는 나무들, 그리고 질서정연하게 쌓인 돌담은 집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영역임을 알려준다. 제비집까지 세들어 있는 ‘home’에서 먹이 물고 오는 어미 새와 기다리는 새끼들은 집의 본래적 의미를 나타낸다. ‘행복한 날’에서 가장이 과일을 한 바구니 들고 오는 집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춥고 배가 고픈 집은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아니면 현대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안도감과 소중함을’ 담았다.

또한 작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가족의 사랑과 믿음에서 나를 발견하고 잠시라도 그때의 순간으로 회귀’하고자 했다. 작가는 가족 공동체의 장인 ‘우리 집’을 여러 개 그렸다. 강아지 안과 밖이 집으로 채워져 있는데. 아이와 강아지가 있는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이야기도 가득한 곳이다. 반려동물이 집안의 주축인 집도 많아진 상황을 반영한다. 집 안은 음표와 알파벳을 비롯한 다양한 기호로 가득하다. 작가는 집안의 집, 집 밖의 집들을 기호적으로 연결한다. 미로처럼 겹겹이 줄지어 있는 집들에는 별이 하나씩 자리하는 ‘별을 품은 집’은 삼각형과 사각형의 조합으로 집을 표현하는 기본적인 방식이며, 천체 또한 기호화된다. 집으로 가는 길이나 집의 주인공은 다정한 한 쌍이다. 여러 집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연금술사의 집’이다. 붓을 든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 속 집에는 여러 작품들이 쟁여져 있다. 작품 속의 작품들이다. 작업은 연금술과 비교된다.

평범한 돌이 황금으로 변신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과학의 역사 속 연금술처럼 근대과학을 가능하게 했던 풍부한 실험의 장이 되었다. 여성의 초상은 작가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옆과 앞 얼굴이 한데 합쳐진 입체파 스타일의 여성이 있는 ‘와인의 향기’는 일상의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평면적 화면을 채우는 물감의 물성은 원근법을 무시 또는 확장한 입체파가 광학적 공간에서 촉각적 공간으로 이행했을 때 새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면과 측면이 결합된 얼굴은 노랑색 머리와 함께 마치 가면처럼 보이는 ‘여심’에서, 거칠게 칠해진 붉은 바탕은 여성의 정열을 표현한다. 피부가 얼룩덜룩해 보일 정도의 거친 표면의 옆얼굴인 ‘꽃이 피다’를 다른 초상들과 비교하면 얼굴 반이 배경으로 사라진 상태다. 작가는 주체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연과 더 접속한다. 작품 ‘내 눈물 모아’에서 반만 묘사된 여자의 눈에서 나오는 입자들은 그가 품고 있는 물고기의 물이 된다. 삶과 작업을 꾸려나가는 이의 자의식을 은유한다. 눈물은 자기 안의 소중한 것을 키우는 또 다른 우주가 된다.//이선영(미술평론가)//

장소 : 갤러리 루벤
일시 : 2023. 09. 06. –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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