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평론//
- 부수고 다시 붙이는 조각의 해체적 의미
어떤 존재자의 참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또는 어떤 것의 ʻ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서양의 오랜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서 철학자들은 본질이란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그 본질이란 인간의 이성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가령 우리는 A4 용지의 본질을 프린터 용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나는 A4 용지를 프린터 용지로 사용하지만, 나의 어린 동생은 그것을 종이비행기나 딱지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다면 A4 용지의 본질이 프린터 용지라는 통상적 생각은 정당한가? 나아가 나의 어린 동생은 A4 용지의 본질을 무시하고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을 뿐이며, 그럼에도 A4 용지의 본질은 존재하는 것인가? 서양의 오랜 이성주의, 본질주의 전통에서는 A4 용지의 본질은 프린터 용지이며, 누가 그것을 다른 용도로 복병산 작은 미술관 작품설치 전경 (21세기 돌, 멍청한 자각상, 나는 내가 아니다)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니체의 생각은 다르다.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알 수 없으며,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줄 수 없다.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해석을 하는 다양한 관점뿐이다. 이것이 니체의 관점주의 (Perspektivismus)이다.
인간을 포함한 세계 속 모든 존재자는 무상한 존재이며,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생성, 소멸, 운동, 변화가 존재자들의 모습이라면, 불변적이며 동일하고 항상적인 것은 단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불변적 동일성이나 보편적 본질은 존재자들의 존재 양태가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소멸하는 것, 그리하여 차이를 생성하는 것이 존재자들의 존재 양태라 할 것이다. 데리다는 이와 같은 니체의 반토대주의, 반본질주의적 사고를 받아들여 상호 관계를 떠나 그 자체로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며, 변치 않는 본질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것이 그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과 연결된다.
지금보다 오래전에 정희욱은 의도하지 않은 채 작업 도중에 부서진 돌조각의 파편을 모아 그것을 다시 결합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신의 전체 작업에서 의미 있게 진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희욱은 최근 작업에서 완성된 돌조각을 의도적으로 부순 뒤, 그 파편들을 다시 결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과 통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구의 오랜 이성주의 역사는 이성/비이성, 백인/유색인종, 서구/비서구, 남성/여성, 말하기/글쓰기의 이항 대립에서 전자에 우위를 부여해왔다. 해체란 이항 대립에서 어떤 우위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 대립이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구성된 가치임을 드러내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닌 어떤 것의 고정된 실체, 불변적 본질을 부정하고 그것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된다. 데리다는 모든 것이 텍스트이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텍스트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콘텍스트)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희욱이 최근 작업에서 완성된 돌조각을 의도적으로 부수는 행위는 기존 구조를 단순히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들을 통해 새로운 구조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전체로서 완결된 형태와 고정된 의미를 거부하는 의식이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어떤 작품이 그 바깥의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지시·참조 관계를 지움으로써 그 작품은 어떤 고정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부여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온전한 형상을 산산이 분해함으로써 작품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해체는 우리의 세계가 ʻ궁극적으로 결정되어 있거나 확정 가능한 고정된 실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정희욱이 돌조각을 떼어내고 부수는 행위는 ʻ완전한 전체’라는 실체를 부정하는 행위이며, 깨어지고 파편화된 틈을 통해 의미의 열린 해석을 가능케 한다. 또한 다시 붙여진 파편들은 원래의 맥락을 해체한 채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 기존에 없던 의미 구조를 형성한다. 부서진 틈과 흔적들은 원형, 또는 본질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조형적나는 내가 아니다.
장치다. 이 장치는 새로운 조형적 텍스트로 작동하여, 관객은 파편들의 관계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읽어내게 된다. 이렇듯 정희욱의 ʻ부수고 다시 붙이기’는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의미의 탈고정화를 이끌어내는 해체적 실천이라 볼 수 있다.
정희욱은 이번 작품들을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테제의 연작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은 고정된 자아, 본질로서의 자아(I)를 거부하는 선언이다. 이는 데리다의 해체 뿐 아니라, 푸코나 라캉, 나아가 쥬디스 버틀러의 주체 비판과도 연관된다. ʻ나’라는 주체는 완결된, 자기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 사회적 맥락 속, 무의식적 차연(différance)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변화되는 과정의 어떤 존재자일 뿐이다. 이는 동일성(identity)이라는 환상을 해체하는 것이며, 주체의 분열을 선언하는 것이다.

2. 조각과 단색 평면의 배치를 통한 의미의 재구성
정희욱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단색의 평면 캔버스를 깨진 조각과 함께 배치하는 실험이다. 예컨대 최근 전시 ‘관찰자’에서 작가는 기존의 얼굴 조각 뒤에 푸른색이나 옥색의 대형 단색 평면을 배경으로 세웠다. 이러한 입체 조각과 2차원 단색 면의 대비는 전통적인 시각 언어를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일반적으로 조각은 주변 공간이나 배경 맥락과 어우러져 해석되지만, 여기서는 단색 평면이라는 미니멀한 배경이 제시됨으로써 관객은 명확한 배경 맥락 없이 조각과 색면의 관계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표현과 배경의 경계를 흐리는 해체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돌조각의 질감과 형태, 그리고 뒤에 놓인 균일한 색 면은 서로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하나의 설치로 결합되어, 익숙한 의미 부여가 어려워진다. 데리다의 개념으로 보자면, 불변의 고정된 실체로서 파악할 수 없는, 이처럼 파편화되었다가 숱한 틈과 흔적을 가진 채 재구성된 돌조각의 의미 규정은 차이의 긴장 속에 지연되고 있다. 이렇게 정희욱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데리다의 ʻ차연’ (différance)을 시각화해서 보여준 바 있었다.
그는 이번의 작업에서 ‘멍청한 자각상’을 통해서도 그 관념을 드러낸다. ʻ멍청한’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만들어낸 얼굴 조각이 어느 특정 대상을 지칭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그리하여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없는 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의도된 ʻ멍청함’은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 의미 찾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그 멍청함 때문에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끊임없이 미뤄지며, 배경의 단색 평면과 결합되면서 의미의 불확정성은 더욱 증폭된다. 깨어지고 부서진 얼굴 조각은 인간의 형상을 암시하지만, 뒤의 단색 캔버스는 그 형상을 둘러싼 시간·장소·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 공백으로 작용한다. 관객은 색채에서 감정을 읽어내려 하거나 조각과 색 면 사이의 관계를 추측할 수 있지만, 해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의미는 여러 해석의 가능성 속에서 유보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의 깨어지고 해체된 얼굴이 어떤 특정한 지시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희욱의 해체된 얼굴 조각은 전통적인 조각이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ʻ지시-참조 관계’를 벗어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의 얼굴 조각은 우리 동시대의 뒤틀리고, 왜곡되고, 분열되고, 소외된 숱한 개인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얼굴 조각과 함께 병치된 단색 평면은 의미의 모호성과 다양성을 증폭시킨다. 데리다의 말처럼 작가는 작품의 규정된 해석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면서, 감상자 스스로가 작품과 대면하면서 의미를 생성시킨다는 해체 미학적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3. 작품 전반에 대한 해체적 분석: 의미의 유동성과 비확정성
앞서 언급했다시피 정희욱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개념 가운데에서 해체 개념으로써 조망할 수 있다. 정희욱의 작업은 대개 전통적인 조각 예술의 의미 체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번 작업에서 그 경향이 더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전통적 조각은 대개 형태의 완결성과 영속성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 주제 및 정신성을 전달하려 한다. 그러나 정희욱은 형태를 과감히 분절하고 빈 공간을 강조함으로써, 조각이 고정된 의미를 담지해야 한다는 전제를 파괴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체로 전통적 조각에 요구되는 형상성과 상징성 자체를 낯설게 만들어 전통의 권위를 무력화한다. 또한 그의 조각은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얼굴 형상일지라도, 내부가 비어 있거나 세부 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돌덩어리를 절개해 속을 비운 뒤 뚜껑돌을 다시 덮어 겉을 가리는 그의 기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빈 부분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 눈과 입이 뚫린 채 속이 빈 얼굴은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완성하도록 만든다. 또한 관객은 그 빈자리에 영혼, 숨결 등의 의미를 스스로 채워 넣게 된다. 이것은 곧 의미가 작품 속에 완결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해석 행위를 통해 비로소 구성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테제가 성립하며, 세계 (텍스트)는 그것이 놓인 콘텍스트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정희욱의 작업 역시 완결 대신 여지와 여백을 남김으로써 의미의 다층적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의미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동한다. 깨진 조각들은 과거의 전체를 암시하면서도 새로운 조합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맥락을 형성하고, 단색의 배경 색조는 보는 이에 따라 여러 상징으로 다르게 다가온다. 어느 한 가지 해석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여러 해석이 공존하며 충돌하는 “자유로운 유희”가 벌어진다. 요컨대 정희욱의 조각은 해체 미학의 포괄적 실천으로서, 조각 예술에 내재한 전통적 의미 부여 방식—온전한 형상, 고정된 상징, 배경과 대상의 구분—을 해체한다. 그 대신 의미의 미결정성과 유동성을 통해 작품을 텍스트처럼 제시하여, 관객이 제각기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새로운 의미의 망(network) 속에 작품을 위치시키게 만든다. 의미 확정의 끝없는 지연과 흐름이야말로 데리다 해체 철학의 핵심으로, 정희욱의 조각은 이를 조형적으로 구현하면서 조각 예술의 의미 작용 자체를 재고찰하게 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테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어떤 정체성을 거부하는 ʻ멍청한 자각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해체가 단순한 파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아니다”는 말은 내가 언제나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나 유동하는 어떤 존재자, 되기(Werden/Becoming) 중인 존재자라는 선언이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 부정이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의 해체와 새로운 의미 생성의 장을 여는 선언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 나는 사랑한다. 다가올 미래의 세대를 옹호하고 인정하며, 지난 세대를 구원하는 자를, 그러한 자는 오늘의 세대와 씨름하면서 파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에서 정희욱의 사유는 더 깊어지고, 더 확장되었다. 인간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과도기적 존재이며, 스스로를 넘어서는 가능성이며, 인간은 목적(Zweck), 다시 말해 도달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이행의 통로, 되기의 과정이라는 것. 그가 비록 정밀한 언어로 제시하지는 않더라도 그의 작업은 분명 이 지점을 의식하고 있다.//김종기(미술평론가, 철학박사,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상임이사)//
장소 : 복병산작은미술관
일시 : 2024. 4. 25 – 6. 16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