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징展(갤러리 GL)_20190201

우징 – 철에 소리가 깃들다

구본호(동대문 문화재단 대표이사)

쇳소리가 난다.
쇠가 서로 부딪쳐서 나는 소리다.
악기들 중에 쇠로 만든 악기들이 있다. 꽹과리, 징 등과 같은 악기들은 쇠에 리듬을 입혀 두드리면 소리를 내는 악기다. 이런 유의 악기들은 놋쇠로 만든 악기로 소리가 높고 날카롭다. 한마디로 맑고 청음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카랑카랑한 쇳소리, 그래서 쨍쨍 울릴 정도로 야무지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쇳소리라 한다.

어찌보면 쇳소리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가미되어 있다. 대다수의 나무로 만든 악기에 비해 뭔가 모르게 강한 인상을 주는 소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타, 첼로, 바이올린 등 나무로 만든 악기들은 소리를 품었다가 다시 내미는 마치 어미같이 소리를 안고 있다가 밖으로 밀어내는 소리라면 쇳소리는 즉흥적이고 도발적인 불같은 성격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쇠로 악기를 만들었다. 기존의 나무로 만든 악기와 같은 소리를 낸다. 비전문가가 들으면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정교하게 들리는 악기를 나무가 아닌 쇠로 만들었다. 나무로 만든 악기와 차이가 있다면 기타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들고 연주하기엔 너무 무거워 여성들이 연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는 점에서 악기는 아닌 것 같다. 단, 무게를 제외한다면 일반 악기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문제가 무게다. 이 무게가 소리를 내는 악기에서 소리를 듣는 미술품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 필자가 아는, 막연한 쇳소리는 아니다. 날카롭거나 둔탁한 소리가 아닌 맑은 소리에 왠지 귀가 아닌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귀가 아닌 눈을 돌리게 하는 이유는 소리를 감상하기 위해 찾은 곳이 아닌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들린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우징. “철에 소리가 깃들다”라는 주제로 2016. 3. 2 – 4. 3일까지 송도윗길에 소재한 부미아트센터에서 전시를 한다. 철판, 스테인리스 스틸 등과 같은 금속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눈으로 보여주는 미술가가 이제는 소리를 보여주는 전시를 한다. 전시된 작품들은 기타, 첼로,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하프 등 악기 여섯 종을 금속으로 만든 것들이다. ‘우징고’, ‘우징금’, ‘징하프’, ‘우쟁’, ‘징기타’, ‘우첼로’ 등과 같이 작품마다 붙여진 작품명 또한 재밌다.
‘우징고’, ‘우징금’, ‘우쟁’ 등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철판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거문고, 가야금, 기타 등의 모양으로 만든 악기, 아니 악기를 닮은 미술품에 기타를 치듯 튕기면 소리가 난다. 쇳소리와는 다르다. 쇳소리는 왠지 부정적이다. ‘우징고’에서 나는 소리는 이런 부정적인 또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작가가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용접하면서 부정적인 소리나 이미지를 긍정적인 소리로 바꾸어 놓았다. 쇠를 통해 아름다운 소리를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튕겨보는 재미는 타 전시장에서 느낄 수 없는 묘미다. 이런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게 될 궁금증이 있을 것이다. 첫째, 작가는 왜 무거운 쇠에, 딱딱한 물성에 부드러운 소리를 가미하려했을까? 둘째, 통상 미술은 보는 예술이다. 보는 예술에 왜 들리는, 듣는 예술을 접목하려 했을까? 마지막으로 가장 원론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작품(미술품)의 경계란 어디까지일까?
헤겔은 예술은 인식이 아니라 직관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를테면 예술은 직관을 통해 진리에 다다르고자 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제 더 이상 예술은 직관에 다다르지 않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1820년대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다. 이전까지의 미술을 철학적 의미를 추구한 시기로 본다. 그리고 아서단토는 위대한 철학적 시기의 현대예술을 1905년부터 1964년까지로 단정 짓는다. 아서단토에 따르면 1905년은 추상미술의 시작을 그리고 1964년은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뜻한다. 따라서 아서단토는 워홀의 ‘브릴로 박스’에서 현대미술의 종말을 보고 있는 것이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상점에서 판매하는 ‘브릴로 박스’를 재현한 것이다.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상점에서 판매하는 ‘브릴로 박스’ 사이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볼 경우 별 차이가 없다. 그럼 무엇으로 그들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들 사이의 차이는 시각이 아닌 인식, 즉 철학적 사유가 개입되어야만 구분이 된다.
우징은 기타, 첼로,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하프 등의 악기를 금속으로 만들었다. 악기상에서 판매하는 악기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악기들이다. 현(絃)을 맞추면 보통의 악기와 똑같은 소리를 낸다. 단지 일반 악기는 나무를 이용해 만들었다면, 이 작품들은 금속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별 차이를 찾을 수 없다. 슈퍼마켓의 ‘브릴로 박스’와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외관상 차이를 느끼지 못하듯, 우징의 금속 악기와 악기상에서 판매하는 가야금과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특히 우징은 금속에 컬러링하여 시각적으로도 금속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악기상에서 판매하는 ‘가야금’과 우징의 ‘우징금’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토의 말을 빌려 철학적 사유의 개입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1964년 이후, 즉 예술의 종말이후의 예술의 적응으로 보아야 할까? 좀 극단적인 표현으로 철학적 사유가 없어도 예술이 된다는 것으로 봐야 할지? 철학적 사유가 없음에는 예술의 경계가 가능한가의 반문으로 보자면 악기상에서 판매하는 ‘가야금’과 우징의 ‘우징금’은 둘 다 예술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첫째, 둘째 질문으로 되돌아 가보자. 첫째의 철 + 소리와 둘째의 질문 미술 + 음악이다. 철에서 나는 아름다운 소리들은 너무도 많다. 트라이앵글이 그렇고 에밀레종이 그렇다. 딱딱하고 무겁고 거친 철이 소리를 품고 있었다. 작가는 그 딱딱함 속에 품고 있는 소리를 밖으로 들추어내 놓기만 했을 뿐이다. 미술이 소리를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술가는 본능적으로 이 소리를 듣는 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소리들 중에 아름답게 들리는 소리만을 뽑아내는 것은 아닐까. 특히 무겁고 둔탁한 물성에 들어있는 소리를 말이다. 그래서 소리를 아름답게 시각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소리를 들을 줄 안다는 것,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안다는 것은 미적경험을 필요로 한다. 미적경험은 사유를 바탕으로 하며, 사유는 철학적 우위를 둔다.
그렇다면 작가는 꾸준히 철을 소재로 한 작업을 하면서 물성 속에 깃든 본질을 들추어내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철의 속성을 파악했다. 철의 속성은 보편적이지 않다. 차갑지만 따뜻함을 지닌 성격이며 무거운 물건이지만 가벼운 인상을 지닌 소재였다. 그 속에 부드러운 음률이 보였다. 특히 작가에겐. 미술이 음악이 된다. 어찌보면 미술과 음악은 하나의 소재에 녹아 있었다. 그래서 동시에 또는 따로 내놓을 수 있다. 작가는 동시에 들추어 놓았다. ‘가’를 먼저 읽느냐 ‘나’를 먼저 읽느냐에 따라 주객이 전도될 수는 있다. 작가에겐 순서는 의미가 없다. 전시장에 놓여 ‘있음’으로 미술이 우위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미술품으로 인정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악기와 작품의 관계로 귀결된다. 여전히 상품과 예술품의 논의는 진행된다. 상품에서도 브랜드가 존재하고 현대예술에서도 브랜드가 존재한다고 보아진다. 상품에서의 브랜드는 희귀성을 만들고 예술에서는 장인의 숨결이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상품이든 예술품이든 가치는 주위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브랜드 있는 악기와 우징이라는 작가가 만든 ‘우징금’이라는 악기는 보이지 않는 사의(思意)가 존재한다. 문제는 브랜드 있는 악기와 예술가의 손으로 만든 ‘우징금’에서의 철학적 사유의 개입이다. 아서단토 이후 현대예술시대에서는 철학적 사유의 개입 유무가 예술의 격을 만드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우징이라는 작가 역시 워홀의 ‘브릴로 박스’ 이전의 시대로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려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의 작품들은 ‘소통’에 의미를 둔다. 우리는, 감상자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고상한 품위를 갖추고 작품마다 철학으로 포장하려 애를 쓰고 있지는 않는가. 필자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소리가 보였고 시각예술과 청각예술이 공존하였으며, 쇠라는 물성에 부드러운 음률을 찾아내는 작가의 능숙한 솜씨에 또 다른 생각으로 포장을 해도 좋을 듯한 작품이었고 판단했다. 작품으로 보아도 악기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구본호//

장소 : 갤러리 GL
일시 : 2019. 2. 1. –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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